성실문화 응용하기/설교준비 일지

추수감사절 (한정훈)

한, 정훈 2013. 11. 18. 21:48

예수,

생명의 몸

생명의 밥

 

 

 

 


신명기 26: 1 - 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실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에 거주할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가져다가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3 그 때의 제사장에게 나아가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4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받아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앞에 놓을 것이며 5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6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7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8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9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10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실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 거주할 때에’라는 말로 시작하면서 나중 일을 가정하고 있다(1). 거기서 ‘맏물’을 거두게 되면, 하나님께 감사하며 즐거워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신명기의 연대를 모세 시대가 아니라 훨씬 후대로 본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요시아 시대에 발견된 ‘율법책’(621년)과 상당히 유사할 뿐만 아니라 신명기 전체 구조가 아시리아 봉신 조약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는 확신 때문이다. 어쨌든 신명기의 연대가 모세 시대가 됐든 그 후가 되었든 가나안 땅 바로 앞에서 역사 뒤로 사라졌던 모세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여호수아를 비롯한 다음 세대는 분명한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 전망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리라는 확신이다. 이 확신은 신명기가 모세의 설교이든지, 아니면 후대에 요시아를 섬긴 서기관들에 의해 쓰인 율법이든지 상관없다. 왜냐하면 확신의 근거는 출애굽 즉, 더 근본적인 역사의 신뢰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희망을 거두지 않고, 검질기게 한 전망을 붙드는, 또 붙들 수 있는 까닭은 누구에 의해, 또는 어떤 시기를 딛고 서 있는지에 따라 좌우지되지 않는다. 우리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팔려가지 않게 하는 참된 전망은 인물과 시대에 따라 부침을 겪지 않고, 언제나 모든 것을 초월해 제 스스로 굳세게 서 있다. 참된 전망은 그래야 하고, 그걸 우리는 진리라 부른다.

 

시편 100: 1 - 5

1 여섯째 달 이십사일이었더라 1 일곱째 달 곧 그 달 이십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라 3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 4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5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6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7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8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9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시인은 온 땅을 흔들어 깨우며, 하나님께 찬송을 부르자고 한다(1).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가자고 한다(2).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이고, 우리는 그의 소유이며, 백성이라고 한다(3). 시인은 어떤 마음으로 이렇게 사람 사이를 뛰어다니면서 눈을 맞추고, 노래하자 하는 것일까?노래하게 하는 이유가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기쁨의 노래는 슬픔을 딛고 설 때 참으로 부르게 된다. 건강한 사람은 건강의 소중함을 모르고, 넉넉한 사람은 가난의 실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기쁨의 노래를 부르자는 시인의 들뜬 제안은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에서 시작됐다. 시들해지지 않을 감사는 어둔 밤을 지나서 뒤를 돌아볼 때 할 수 있다. 은총을 깨닫게 되는 순간은 승승장구하는 시절이 아니라 한계를 넘은 인내라도 붙들어야 했던 그 팍팍한 의지가 쉼을 만난 시절에 있다. 우리가 성공이라 부르는 모든 종류의 성취 이면에는 인내의 시간과 누구도 저울질 할 수 없는 고통의 상처가 있게 마련이다. 희망의 시작을 보는 사람은 이제 막 절망의 끝을 본 사람이라고 추측한다. 평화, 정의, 생명 등 무슨 빛이든, 빛을 한 조각이라도 본 사람은 밤을 지나온 사람일 것이다.


빌립보서 4: 4 - 9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절망의 끝을 보고 희망의 시작을 품어 안은 사람에게 반드시 드라마와 같은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세상은 극적인 승리를 좋아한다. 역경이 마침내 큰 성취로 바뀌는 대반전을 기다린다. 그러나 인생은 마음을 사로잡는 플롯으로 잘 짜여진, 기승전결이 분명한 문학 작품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온 일상은 우리가 얼마나 하찮은 일에 무너지고, 조그마한 소동에 마음의 평화가 깨지게 되는지 그 과정이 환희 드러나는 기억의 역사이다. 누구나 극의 주인공이 되지 않아도 마음에서 일어나는 지긋지긋한 줄다리기를 알고 있다. 한 번 웃고 한 번 우는 일을 반복하는 것으로도 우리의 존재는 충분히 바닥이 난다.

신앙의 성숙 또는 성숙한 신앙인은 이 부침을 겪지 않는가?이 굴레를 초월하는가?그렇지 않다. 만약 그랬다면 기뻐하라고, 염려대신 기도를 드리라고 권유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우리가 기뻐하면, 염려를 기도로 바꾸려 한다면, 지각에 뛰어난 즉, 우리의 이성을 초월한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라 말한다. 이것이 예수 안에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는 암시이다(7). 예수는 말구유에 나서 홀로 십자가에서 죽은 철저히 실패한 인생이며, 예수가 가르친 복도 이해가 쉽게 되지 않는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에게 복이 있다 했다. 실패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 못되지만, 모든 실패가 완전한 허무는 아니라고 예수의 삶이 손사래를 치고, 예수의 삶이 주장한다. 우리는 예수의 완벽한 실패가 삶의 길,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믿고, 이 믿음이 제 모습을 드러낼 때, 그 빛에 의지해 삶의 모든 의미를 길어내는 사람이다.

 

요한복음 6: 25 - 35

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33). 우물가의 여인과의 만남이 있은 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요 4: 32) 제자들은 자신들 말고 누가 예수님께 양식을 가져다줬는지 궁금해 한다(33).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34). 오천 명이 배불리 먹은 후에 그 가운데 몇몇은 포만감을 잊지 못해 산 넘고 물 건너 예수님을 찾아 나선다. 예수님은 무리에게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배가 불렀기 때문에 다시 나를 찾아 온 것이라 말씀하신다(26). 그러면서 썩을 양식 위해 일하지 말고, 영원한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하신다(27). 무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묻자(28)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하신다(29).

우리가 밥 힘으로 산다는 말을 쓰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힘으로 산다고 하셨고, 영원한 생명의 힘은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설명을 가만히 살펴보면 생명의 양식은 몸(존재)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몸,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 몸이 생명의 양식이다. 밥이 되어 세상에 생명을 주는 몸이 곧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다. 밥만 먹고는 못 산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앞선 세대보다 풍족한 세상을 살고 있다. 밥이 없으면 라면이나 빵을 먹으면 되지 않냐 했던 되물음은 우리세대의 말이 틀림없다. 결핍을 우리세대의 주관성에 기대어 이해할 수밖에 없는 떫은 이해력도 문제이지만, 가난을 지나온 것 말고는 자신들의 역사를 설명할 수 없는 앞선 세대의 한계 역시 문제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에 기대하는 것은 가난을 극복하는 ‘하면 된다’식의 팍팍한 삶의 기술만이 아니라 모든 세대의 문제이기도 한 더 근본적인 몸(존재)의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의지로 인도할 깊이 있는 시선이다.

1970년 11월 13일은 22살 기독 청년 전태일은 노동자 인권을 위해 스스로의 몸을 불살랐다. 모세가 본 떨기나무에 붙은 불은 떨기나무를 사르지 않았지만, 청년 전태일에 몸에 붙은 불은 그의 몸을 태웠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영원한 몸(존재)은 불기운과 함께 스러지지 않고, 지금도 살아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선배들로부터 들어야 할 이야기는 지금도 살아있는 그의 몸(존재)이 지닌 의미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다. 전태일의 어머니였던 이소선 권사는 모교회에 출석하셨다. 하지만 나는 모교회를 떠난 이후에야 이 사실을 알았다. 영원하도록 있는 양식에 대해 묻고, 또 우리에게 자신이 어디까지 물었는지를 일러주는 선배가 있었더라면 이렇게 늦게 알지는 않았을 텐데. 전태일의 어머니가 타워 크레인에 올랐던 김진숙 위원에게 이제 그만 내려오라고, 사는 것이 먼저라고 말하던 영상을 보고 혼이 나갔던 기억이 난다.

죽어서 갈 천당과 자녀가 잘 되고, 으뜸이 되는 축복 말고도 어떤 삶이 영원한 삶이며, 어떤 몸이 죽지 않고 사는 몸인지, 또 지금 어디 그 누군가에게 그 몸이 필요한지, 우리는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다. 그리고 우리가 그 몸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예수의 몸이 겪은 죽음과 부활에서 길어낼 수 없다면, 어디에도 희망을 걸 수 없는 우리 세대가 존재를 뒤집어엎는 감사를 경험할 가능성 역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