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문화 응용하기/설교준비 일지

왕국절 제11주 (한정훈)

한, 정훈 2013. 11. 5. 14:25

올라가야만

했던

사람에게

 

 

 

 

 

성경은 삭개오가 세리장이고 부자라고 말한다(눅 19: 2). 그가 가진 조건은 그가 힘겹게 지켜왔을 것이지만, 예수님을 만나는데 도움이 되진 않았다. 사람들은 그의 집을 ‘죄인의 집’이라 불렀다(눅 19: 7). 세리는 곧 민족반역자였고, 삭개오는 세리 중에서도 우두머리였다. 성경은 삭개오의 키가 작았다고 말한다. 얼마나 키가 작았을까? 예수님을 볼 수 없을 만큼 작았다. 그리고 삭개오가 예수를 만나러 온 그 자리에 사람이 많았다고 말한다(눅 19: 3). 예수님과 자신을 가로막은 사람들을 뛰어넘지 않고는 예수를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삭개오는 나무 위로 올라갔다. 아니, 올라가야만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올라가야만 했던 사람에게 ‘내려오라’ 말씀하신다.

 

시편 119: 137 - 144

137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 138 주께서 명령하신 증거들은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니이다 139 내 대적들이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으므로 내 열정이 나를 삼켰나이다 140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141 내가 미천하여 멸시를 당하나 주의 법도를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142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율법은 진리로소이다 143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144 주의 증거들은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

 

내가 미천하여 멸시를 당하나 주의 법도를 잊지 아니하였나이다(141). 시인은 곤경에 처해있다.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143). 시인은 곤경 중에도 주의 법도, 주의 계명을 붙든다. 그리고 청원한다. 살게 하소서(144). 시인이 여러 차례 또 다양한 각도에서 자신이 처한 위기를 설명하는 것과 자신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모하는지 이야기하는 것이 힘겨운 싸움으로 읽힌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래도 멈출 수 없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하박국 1: 1 – 4, 2: 1 - 4

1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 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희덕 시인의 <천장호에서>라는 시가 있다.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께 따지듯 묻는다. 언제까지 침묵만 하고 계실 겁니까? 주님, 어디 계십니까?(2) 얼어붙은 호수처럼 아무것도 비추지 않고,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버린, 입을 굳게 다문 무뚝뚝한 침묵의 빛은 두려움을 느낄 만큼 서슬이 푸르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 그 침묵 앞에 완벽한 거절을 당한다. 하박국은 정의를 찾을 수 없는 현실, 율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모습에서 하나님의 부재 곧, 철저한 침묵의 거절 앞에 서있다.

그러나 시인이 얼어붙은 호수에 던진 돌멩이에 ‘들’자를 붙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부를 이름이 있는 사람은 거절에 순응하지만은 않는다. 하박국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철저한 침묵의 거절 앞에서 내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의 응답을 기다린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대답을 듣는다(2). 하나님의 메시지는 “때가 있다. 반드시 끝이 있고, 더딜지라도 지체되지 않는다. 기다리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이 참…. 더딜지라도 지체되지 않는다. 재촉한다고 앞당길 수가 없고, 나무란다고 고칠 수가 없고, 염려한다고 목숨을 늘릴 수가 없다(마 6: 27). 하나님의 때는 비타협적이다.


데살로니가후서 1: 1 - 4, 11 - 12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12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신약 본문에서도 박해와 환난을 견디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격려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1, 4).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단지 어떤 명제에 ‘예’ 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합 2: 4). 믿음으로 산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 데살로니가 교회 사람들에게서 읽을 수가 있다.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삶의 조건을 뛰어넘는다는 말이고, 박해와 환난 즉, 고난에 의해 생명의 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삶의 조건을 뛰어넘으려면, 고난을 이겨내려면 삶보다 고난보다 커야한다. 작은 것이 큰 것을 품어 안을 수는 없다.

크다는 것은 상처 하나 없는 완벽한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고난에 꺾이지 않는 삶은 믿음을 지닌 모든 삶의 자랑거리인데(10), 한 대도 맞지 않은 쉬운 승리보다 승리를 얻기 위해 수없이 인내하고, 온몸에 영광의 상처를 지닌, 마침내 승리한 흔적이 있는 역사를 말하고, 우리는 이 역사를 영광이라 부른다. 이 영광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 의미가 되며,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영광이다(12).

 

누가복음 19: 1 – 10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삭개오의 열정이 아니다. 이 감격스런 이야기는 자주 ‘열심을 내라!’라고 하는 선동에 침범 당한다. 오히려 삭개오 이야기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한 사람의 이야기를, 또 예수님을 만난 한 사람의 이야기를 밝게 그림으로써 우리에게 생명력을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삶이 줄기차게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삶이었음을 드러낸다. 사마리아 사람이 등장하는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세리장이 구원받는 이야기는 유대 전통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불편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또 다른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보려고 한다. 이번에 삭개오 이야기는 삶의 한계와 하나님께서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품어 안으시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고, 오늘날 청년들과 함께 읽기에 좋다고 생각했다. 삶은 저마다 한계를 안고 있다. 우리는 이 한계를 활동으로써 극복하라는 주문에 걸려있다. 우리는 자신을 착취하는 삶에 익숙하다. 자신을 계속해서 계발시키고, 최대한 적게 자고, 최대한 많이 일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구원은 자신을 착취해서 얻는 성취가 아니다.

삭개오와 예수님 사이를 가른, 또 가로막은 많은 사람들은 삭개오와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삭개오가 평생 느꼈을 소외감은 사람이 많다는 성경 표현에서 오히려 모순으로 드러난다. 많지만 자신과 아무 관련 없는 사람들, 자신에게 어떤 호의도 품지 않는 사람들, 자신을 적대시하고 밀쳐냈던 사람들. 삭개오가 알고 있는 사람은 이런 사람들이다. 삭개오는 그들을 뛰어넘어야 했고, 그것만이 살 길이었다. 그래서 나무 위로 올라가야만 했다. 자신을 받아주는 어떤 마음도 갖지 못한 사람, 그들의 위로 올라가야만 살 길이 열렸을 사람, 그가 삭개오다.

그는 나무 위에 올라가 비로소 예수님을 굽어본다. 사람들 위에 올라섰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비로소 (참된 기쁨을 줄 진실과 눈을 맞추기 위해) 내려다 봤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삭개오의 눈 맞춤이 있은 후에 삭개오는 기쁨과 예수님의 마음을 얻었다. 예수님은 올라가야만 했던 사람에게 ‘내려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마음을 얻을 때, 나를 용납하는 예수님의 눈 속에 비친 자신을 발견했을 때, 비로소 내려오는 삶이 열린다. 예수님은 내려오는 삶에 함께 하시고, 무엇보다 예수님은 낮은 데에 계신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마음을 얻었고, 그리고 그의 삶 곧, 이제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에서 돌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