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문화 응용하기/본문묵상

신정절 10주(왕국절 10주, 창조절 9주 - 종교개혁주일, 2022년 10월 30일 주일) 예배준비 노트

서무천사 2022. 10. 28. 09:49

주님의 증거는 언제나 의로우시니(시편 119:144)

 

[성서일과 4본문]

(하박국서 1:1-4, 2:1-4)

1. 이것은 예언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말씀이다.

2.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폭력이다!" 하고 외쳐도 구해 주지 않으시니, 주님,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3. 어찌하여 나로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악을 그대로 보기만 하십니까? 약탈과 폭력이 제 앞에서 벌어지고, 다툼과 시비가 그칠 사이가 없습니다.

4.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합니다. 악인이 의인을 협박하니, 공의가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2:1. 내가 초소 위에 올라가서 서겠다. 망대 위에 올라가서 나의 자리를 지키겠다.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지 기다려 보겠다. 내가 호소한 것에 대하여 주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실지를 기다려 보겠다.

2. 주님께서 나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라. 판에 똑똑히 새겨서, 누구든지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여라.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다. 끝이 곧 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공연한 말이 아니니, 비록 더디더라도 그 때를 기다려라. 반드시 오고야 만다.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

4.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시편 119:137-144)

137. 주님, 주님은 의로우시고, 주님의 판단은 올바르십니다.

138. 주님께서 세우신 증거는 의로우시며, 참으로 진실하십니다.

139. 내 원수들이 주님의 말씀을 잊어버리니, 내 열정이 나를 불사릅니다.

140. 주님의 말씀은 정련되어 참으로 순수하므로, 주님의 종이 그 말씀을 사랑합니다.

141. 내가 미천하여 멸시는 당하지만, 주님의 법도만은 잊지 않았습니다.

142. 주님의 의는 영원하고, 주님의 법은 진실합니다.

143. 재난과 고통이 내게 닥쳐도, 주님의 계명은 내 기쁨입니다.

144. 주님의 증거는 언제나 의로우시니, 그것으로 나를 깨우쳐 주시고 이 몸이 활력을 얻게 해주십시오.

 

(데살로니가후서 1:1-4, 11-12)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사람의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2.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3.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을 두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니,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크게 자라고, 여러분 모두가 각자 서로에게 베푸는 사랑이 더욱 풍성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4. 그러므로 우리는 온갖 박해와 환난 가운데서도 여러분이 간직한 그 인내와 믿음을 두고서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여러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11.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나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해 주시며 또 그의 능력으로 모든 선한 뜻과 믿음의 행위를 완성해 주시기를 비는 것입니다.

12. 이렇게 해서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에게서 영광을 받고,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9:1-10)

1. 예수께서 여리고에 들어가 지나가고 계셨다.

2.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세관장이고, 부자였다.

3.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려고 애썼으나, 무리에게 가려서, 예수를 볼 수 없었다. 그가 키가 작기 때문이었다.

4. 그래서 그는 예수를 보려고 앞서 달려가서, 뽕나무에 올라갔다. 예수께서 거기를 지나가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러서 쳐다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6. 그러자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를 모셔 들였다.

7.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서, 모두 수군거리며 말하였다.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

8.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10.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성서일과 본문들을 이어주는 끈은 말씀이 내게 오시니입니다.

 

구약,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라” (하박국 2:2)

시편, “주님의 계명은 내 기쁨입니다” (시편 119:143)

서신서, “데살로니가 사람의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1)

복음서,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러서 쳐다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19:5)

 

오늘 요절은, “주님의 증거는 언제나 의로우시니, 그것으로 나를 깨우쳐 주시고입니다. (시편 119:144)

 

 

[구약과 시편본문 정리 (하박국 1:1-4, 2:1-4 / 시편 119:137-144]

오늘 구약본문 소제목은 하박국의 호소, 주님의 응답입니다.

바빌론의 무자비한 창검이 천하를 삼키던 시절에,

오매불망 하나님말씀만 기다리며 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리던 예언자 하박국이

무자비한 권력, 불의한 권력의 악행을 토로합니다(2-3), 동시에

말씀기둥이 무너져 공의가 허물어진 시대를 한탄합니다.(1:4)

 

그런 가운데서도 줄기차게 말씀을 기다리던 하박국 예언자에게

드디어 하나님말씀이 내리십니다.

그것은 묵시였으며, 일회성 외침이 아니라

아주 큰 대자보처럼 만들어서 두고두고 모두가 볼 수 있게 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말씀기둥이 허물어진 시대에,

그래서 불의한 권력에 취해 잔뜩 교만해진 권력자들이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법이라고,

하나님말씀만 붙드는 법이라고

예언자는 외칩니다.(2:4, 이는 롬1:17, 3:11, 10:38 등에서 인용합니다.)

 

오늘 시편본문 소제목은 주님의 법을 찬양함입니다.

여덟 절의 첫음절 모두가 18번째 히브리어 알파벳인 차데(צ)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유달리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소리 높여 찬미합니다.

 

스스로 사회적 약자임을 드러내면서(141) 시인은

권력자들의 멸시조차 하나님말씀으로 이겨낼 수 있을 만큼,

의로우신 하나님말씀은 늘 나의 기쁨이라고 노래합니다.(143)

 

 

[서신서와 복음서본문 정리 (데살로니가후서 1:1-4, 11-12 / 누가복음 19:1-10)]

오늘 서신서본문 소제목은 교회의 환난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입니다.

자칫 임박한 종말신앙이 왜곡되는 바람에 교회가,

저 거짓투성이 불의한 권력자들이 발호하는 세상사에 무관심해질까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깨어있기를 바라며 이 편지를 씁니다.

 

지금 불의한 자들이 장차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받을 것은

불을 보듯 환한 사실인데(5-10), 그보다 더 깊은 바울의 관심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의 천국복음이 교회 안팎에서 되살아나고(11)

그리하여 주님이 영화로와지시는 것, 곧 하나님 공의의 결실입니다.(12)

 

오늘 복음서본문 소제목은 예수와 삭개오입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여리고에서 악명 높은 부자가 된 세관장 삭개오가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가 사는 마을을 지나가시게 되었고

이에 키 작은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고 싶은 마음에 애써 달려가 뽕나무 위에 오릅니다.

이런 삭개오와 눈이 마주친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네 집에서 묵겠다는 파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이에 삭개오는 크게 기뻐하며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단호한 회개의 선언을 하고(8), 이어서

예수님은 사죄(赦罪)의 선언을 하십니다.(9)

 

삭개오의 선언은(8) 구원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맛본 자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맛본 자의 큰 기쁨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은(특히 142-144절은) 삭개오의 노래처럼 느껴집니다.

 

 

[정리]

종교개혁주일인 오늘 성서일과본문 곳곳에

주님의 법(,말씀)과 의()에 관한 내용이 즐비합니다.

 

오늘 복음서본문의 예수님은

뽕나무 위에서 당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삭개오를 올려다보십니다.

뽕나무 위에서 잔뜩 긴장하고 흥분한 상태의 삭개오 눈빛에서 어떤 회개의 씨앗을 보셨는지

매우 파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19:5)

 

집 주인이 초청하기도 전에 그 집에 들어가겠다고 하는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당시 관례로나 예수님의 행적으로 볼 때 매우 이례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임으로써(6) 삭개오는

말씀을 받은 자의 순종을 보여줍니다.

이어진 참회의 선언은(8) 말씀을 제대로 받은 자의 모범이요

말씀이신 예수님(1:1), 몸을 입고 오신 그 말씀(1:14)을 영접한 자의 전형입니다.

 

 

종교개혁가 루터 시절의 교회가

예수님 천국복음의 맛, 말씀의 맛 가득한 소금과 빛이 아니라

권력의 맛 즉 돈맛에 중독된 오염원이었던 것처럼,

지금 한국교회는 말씀의 기운을 가파르게 잃어가고 있습니다.

 

돈독이 오른 권력자들이 점점 더 큰 권력을 잡고 광란의 춤을 추기까지

역사의 기둥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도

하나님말씀으로 의()와 진리를 세우기는커녕

저들의 더러운 술잔치에서 장단만 쳐주는 꼴입니다.

 

이 뿌리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니 반민특위(反民特委)가 보입니다.

일제강점기 반민족 행위들을 처벌하기 위하여 1948년 제헌 국회에 설치되었던

그 반민특위를 무너뜨린 저 불의한 자들, 사리사욕에 붙들린 권력자들 때문에

갱생의 기회를 놓친 친일파는 배가된 그 독기를 퍼뜨려 나라는 사분오열됩니다.

 

오늘 여리고의 돈독 오른 권력자 삭개오 안에 태풍 같은 회개를 일으키신 예수님처럼,

오늘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의 삭개오들 안에 회개의 바람을 일으킬 수 있으려면

먼저 교회부터 무너진 말씀기둥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먼저 교회부터 무너진 마음으로 주님 앞에 엎드려 회개해야 합니다.

 

 

 

[나머지]

* 삭개오처럼!

하박국 시대가 그랬듯이,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랬듯이, 오늘 한국교회 역시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무슨 뜻인지 몰라도 끊임없이 말씀을 읽으려 뽕나무에 오르는 수고를 아끼지 않을 때, 그 말씀께서 기쁨으로 내 안에 들어오시는 기적을 체험할 것입니다. 내 안에 들어오신 말씀과 어울리다보면, 시나브로 나는 삭개오처럼 변화해갈 것입니다.

 

** 루터 종교개혁의 알맹이, <온 세상을 수도원으로!>

수도원에서나 읽을 수 있었던 성경이었습니다. 성경을 가질 수도 읽을 수도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수도사의 길을 버리고 파계한 것으로만 알았는데, 사실 루터의 목표는 수도원정신을 붙들고 세상 모두가 성경말씀을 읽을 수 있게 하려던 것이었습니다. “수도원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온 마르틴 루터의 길은 초대교회 이래 이 세상에 대하여 수행된 가장 날카로운 공격이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길은 이제 이 세상 한 복판에서 실천되어야 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벗어난 수도원 생활에서 특별한 능력으로 실천되던 것들이 이제는 세상 안에 살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피할 수 없는 명령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명령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 일상적인 직업생활에서 수행되어야 했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인의 삶과 세상 삶 사이의 갈등이 예측할 수 없을만큼 깊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맞서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백병전이었습니다... (본훼퍼, 허혁 역나를 따르라서회, 1965. 30-31 / 채수일. ‘종교개혁-세상을 수도원으로 만드는 운동’,기독교사상2015. 3월호 8쪽 재인용)

 

*** 뽕나무를 찾아라

공의가 왜곡되고 악인이 득세하는 무법천지 세상이 영원할 것처럼 보여도(1:4) 마침내 주님의 때가 옵니다. 예언자는 말씀을 받아 그 때의 예감을 확신합니다. 하박국은 치열하게 여쭙고 또 여쭈어 받은 말씀으로 마침내 든든하게 찬양합니다.(3:17-18) 하박국이 받은 말씀 똑똑히 새긴 그 말씀은(2:2)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을 만큼 생생하게 내 손 안의 스마트폰에도 새겨 있습니다. 주님의 때가 반드시 속히 온다는 말씀이고 이를 굳세게 믿는 자가 믿음찬 의인입니다.(4) 오늘 시편 역시 이 말씀이 얼마나 의롭고 진실한지, 얼마나 순수하고 올바른지, 그 말씀을 사랑하고 기뻐한다고 노래합니다.(140, 143) 문제는 속히 오실 주님의 때를 맞이할 준비자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모습은 우리에게 훌륭한 반면교사입니다. 교회의 믿음과 사랑은(살후 1:3) 불의가 판치는 세상에서도 지켜져야 합니다.(4) 주님의 때가 임박할수록, 세상의 온갖 불법과 불의에 눈감지 말고 직시해야 교회는 주님의 이름을 빛낼 수 있습니다.(12) 지금 한국은 그 어떤 이념도 이상도 아니고 오직 이득만이 신념인, 부당한 이득도 마다하지 않는 자들이 득세하는 세상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일(1031)을 하루 앞둔 종교개혁주일입니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주님의 이름을 어둡게 하는 거짓과 불법에 놀아나지 말고 나의 불편과 불리, 불이익을 무릅쓰고 진실을 밝혀 주님의 이름을 빛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부당한 이득만을 추구하며 살던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급격히 변화하는 모습이 충격적입니다. 삭개오를 보신 예수님께서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하고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사실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오해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얼굴 환히 바라보고 싶지만, 지금 나의 영이 삭개오처럼 키가 작고, 예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인파처럼, 나와 복음 사이를 가로막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내 가까이 다가오고 계심을 예감할 때입니다. 삭개오처럼 망신을 무릅쓰고 뽕나무를 찾아 올라야 할 때입니다. 기를 쓰고 뽕나무에 매달려 예수님과 눈을 맞추려고 바둥거리는 그런 나를 보신 예수님 마음이 어떠시겠습니까?

 

**** 예수님과 삭개오

삭개오는 판의 흐름을 읽는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삭개오는 평소 몸에 밴 이익을 쫓는 동물적 감각으로 인생을 올인해야 할 승부처를 찾은 것입니다. 처음엔 마치 노름판의 타짜(사기 놀음 전문가)처럼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를 듣자마자 자기 집으로 모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자기 집에 들어오시자 삭개오는 점점 그분 예수님께 몰입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가장 귀하게 여기던 돈, 꽁꽁 묶어두었던 돈주머니를 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뒤 삭개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무튼 삭개오는 단 한번 예수를 만나 인생이 변화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생 예수님 만난다고 하면서도 인생이 변하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말씀의 바다에 나를 풍덩 던지기는커녕 말씀을 내 인생에 맞추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아니라 계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목수들의 그렝이법()은 여기서 참 소중한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렝이법, 그렝이질이란 한옥 지을 때 쓰는 말입니다. 톱으로 자른 매끈한 나무기둥을 받치기 위해 주춧돌 면을 매끈하게 하지 않고, 정반대로 주춧돌 면은 원래 울퉁불퉁한 대로 두고 그 울퉁불퉁한 주춧돌 면에 맞추어 나무기둥 밑동을 울퉁불퉁하게 깎아내어 주춧돌 위에 딱 맞추어 끼워 세울 수 있게 하는 기법입니다. ‘주춧돌이신 주님 말씀에 딱 맞추어 나를 깎아내는 그렝이질이 필요합니다!’) 이런 생각도 듭니다. 단 한번 예수를 만난 삭개오의 인생이 송두리째 변한 반면에, 우리 인생이 여태 변하지 못하는 까닭은 어쩌면 우리가 아직 예수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아니 바로 그것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예수를 만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아직 나무 위에만 있다는 말입니다. 나와 눈이 마주치신 예수님께서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어서!” 하고 부르시는데도, 무엇 때문인지 머뭇거리고 있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나무 위에서 언제까지 예수가 어떤 분인지, 조사만하고 있을 것입니까? 멀리서 바라보듯 관망하고만 있을 것입니까?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과 만나는 곳입니다. 만나서 그분을 맛보고, 그분을 먹고, 그분과 하나 되는 곳입니다. 그분의 맵고 쓰고 짜고 시고 달콤한 오미자와 같은 오만가지 맛을 보고, 그 희로애락, 기쁨과 공포와 십자가의 눈물과 핏물, 그리고 마침내 신비로운 부활의 환희를, 부활의 능력을 맛보아야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 이상  「성실문화 112호 예배마당에서 옮겼습니다.)

 

 

 

 

 

[말씀동시] 용기내어 주님 앞에 (김현서 지음. 세움교회 청년부. 성실문화112)

​​다른 이들에게 미움받는 나

이미 큰 죄인으로 살고 있지만

오늘 주님 앞에 나아가고 싶어서

용기 내어

한걸음 앞서

후다닥 달려

뽕나무에 올라간다

그 때에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

또 다가오시는 주님

이런 나에게

말을 걸어주시는

구원을 주시는

사랑의 주님

평안의 주님

나의 영원한 친구

 

 

 

 

[말씀시조] 믿음이 크게 자라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112)

믿음이 크게 자라 사랑이 풍성하고

온갖 박해 환란 중에 믿음을 간직했네

여러분 데살로니가 큰 믿음의 교회여

 

 

 

 

[시편노래] 시편 119, 올바르신 주의 판단 진실하신 주의 증거 (이정훈 편사. 이석훈 작곡. 성실문화112)

[본문] (시편 119:137-144)

[노랫말]

올바르신 주의 판단 진실하신 주의 증거, 원수들은 잊은 말씀 주의 종이 사랑하네

나는 비록 미천하여 멸시를 당하지만, 순수하신 주의 법도 절대 잊지 않습니다

주님의 의 영원하고 주님의 법 진실하니, 재난 고통 닥쳐와도 주의 계명 나의 기쁨

언제나 의로우신 주의 증거 날 깨우쳐, 이 몸이 활기차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해설]

시편본문을 성실교회 이정훈 목사가 다듬고, 성실문화 동인이며 찬양사역자인 이석훈 목사가 곡을 붙였다.

 

[악보] 시편 119 (올바르신 주의 판단 진실하신 주의 증거) (이정훈 편사, 이석훈 작곡)

 

 

20221030_시편가 119 올바르신 주의 판단.m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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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송서(誦書)] 시편 119:137-144 (이정훈 다듬. 성실문화112)

(전래자장가 가락, 즉 천자문독송 가락으로)

 

137. --와여 -는 의로우시고-, -의 판단은 옳으니이다-,

138. 주께서 --하신 증거-들은-,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니이다---

 

139. 내 대적들이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으므로 내 열정이 나를 삼켰나이다

 

140. -의 말씀이 심-히 순수-, (----)하므---,

-의 종이- 이를- 사랑-, (----)하나-이다-

 

141. 내가 미천하여 멸시를 당하나 주의 법도를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142.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율법은 진리로소이다

 

143. 환난--- 우환---, ---- 미쳤-으나-,

---- 계명---, -의 즐거움이니-이다-

 

[다함께]

144. ---- 증거-들은-, 영원--- 의로우시니-,

-로 하여금 깨닫게 하사-, (깨닫게 하-) 살게 하∼∥

 

20221030_시편송서 119;137-144.m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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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동화] 삭개오는 뽕나무 오디열매를 좋아했을까?

 

옛날옛날 한옛날에, 이건 호랑이가 늦가을 뽕잎 따다가 뽕잎차 만들던 시절 이야기예요.

 

소구는 지난주에 오빠랑 함께 아빠 일손을 도왔어요.

소구네는 매년 첫서리 내린다는 상강(霜降)이 지나자마자

이산저산 부지런히 다니며 뽕잎을 따죠.

 

낙엽의 계절이지만 뽕나무에는 마른 잎이 아직 많이 달려있고

상강 지난 뽕잎으로 아빠는 뽕잎차를 만듭니다.

 

뽕나무는 참 좋은 나무야. 파릇파릇 봄철 뽕잎은 최고나물이고, 까무잡잡한 초여름 열매 오디는 정말 맛있지. 게다가 가을철 뽕잎으로 만든 차는 참 좋은 건강 차란다.”

 

아빠는 뽕나무를 되게 좋아하세요.

뽕나무야말로 하나님의 초록은총 가운데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거라고,

뽕나무는 이파리와 열매는 물론

껍질과 뿌리까지 모두모두 좋은 약이라고!

 

 

소구가 친구들에게 이산저산 뽕잎 따러 다닌 거 얘기하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뽕나무 자랑 중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이 작디작은 삭개오를 금세 발견하셨겠냐. 뽕나무니까! 그 뽕나무 눈여겨보시다가 발견하신거지.”

 

? 우리 교회에서는 뽕나무가 아니라 돌무화과나무라고 배웠는데?”

 

소구 친구 대식이가 갸웃거리며 하는 말에

초희도 거듭니다.

 

맞아 우리 교회 성경책에도 여리고 삭개오가 올라간 나무는 돌무화과나무야.”

 

무슨 소리야. 뽕나무가 언제 돌무화과나무로 변신했어?”

 

소구가 갸웃갸웃 도리도리하는 동안

초희가 얼른 스마트폰으로 성경본문을 찾아 보여줍니다.

 

어라?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람?”

 

 

얼굴이 빨개진 소구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빠께 질문했어요.

아빠는 우리말 성경책들 가운데 새번역과 개역개정번역은 각각

뽕나무와 돌무화과나무라고 달리 번역했다고 하셨어요.

심지어 아모스서 7:14절은 번역이 서로 뒤바뀌었다나 뭐라나?

 

돌무화과나무가 더 정확한데, 뽕나무라고 번역한 것도 틀리다고 하지 않지.”

 

135년 전인 1887년에 나온 성경책인 예수셩교젼셔

존 로스 목사님의 성서번역팀이 번역했고

만주 성경(盛京)의 문광서원에서 만들었는데,

거기도 뽕나무라고 번역했대요.

 

다른 경우지만 이건 어떨까? 전혀 다른 두 나무를, 다른 고장에서 같은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거든. 우리나라 북쪽 지역인 강원도와 경기도에서 동백나무라고 부르는 나무는 실제로 남도지역의 동백나무가 아니고 생강나무란다. 물론 꽃도 빨간 꽃이 아니라 산수유꽃을 빼닮은 노란 꽃이지. 그렇다고 강원도와 경기도의 생강나무를 동백나무라고 부르는 것을 틀렸다고 하지 않거든!”

 

남도지역보다 추운 강원도와 경기도에는 동백나무가 자라기 어려워서

동백나무 기름 대신 기름을 얻을 수 있는 생강나무를

동백나무라고 부른 것을 틀렸다고 하지 않듯이,

돌무화과나무가 없는 우리나라에서 삭개오 나무를 뽕나무라고 부른 것도 괜찮다는 말씀이셨어요.

 

 

알 듯 모를 듯 그 설명이 더 복잡하고 이상해서

계속 갸웃거리는 소구에게 아빠가 좀 더 설명해주셨어요.

 

나무 이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삭개오가 한 행동이야. 나무는 그 도구였고.”

 

아빠는 소구에게 삭개오가 한 행동을 차례차례 정리해주셨어요.

삭개오가 높은 나무 위에 있었건 반대로 군중 틈에 파묻혀 있었건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으시는 참 목자 예수님의 눈이 놓칠 리 없었을 거라고!

그러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삭개오가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무릅쓰고 예수님을 보고 싶은 일념으로 나무에 오른 일이었다고!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눈이 마주친 삭개오가 예수님 말씀에 바로바로 순종한 거지.”

 

예수님의 첫 명령은 뽕나무에서 내려오라는 것이었어요.

어서 내려오라는 것이었어요.(누가복음19:5)

이어서 내가 너의 집에 들어가서 묵겠다는 말씀이었고요.

 

 

따듯한 미소를 지으며 아빠는 소구에게 말씀하셨어요.

 

단 한번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예수님 말씀에 얼른 순종한 삭개오와 비교해 볼 때 우리는 너무 다르지 않으냐? 우리는 오래 교회에 다니면서도, 자기만의 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관찰만 하고 있는 꼴이 아닐까? 예수님이 내려오라고, 내가 네 안에 들어가겠다고 하셔도, 잠깐 기다리시라고 아직 예수님에 대한 공부가 덜 끝났으니 좀 더 기다려달라고 하면서!”

 

아빠는 소구에게 계속 말씀하셨어요.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고 변화하였듯이

우리가 변하고 한국교회가 예수님이 기뻐하실 만큼 개혁되려면,

예수님을 나에게 맞추려 하지 말고 주님 말씀에 나를 맞추어야 한다고!

 

말씀과 내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 말씀이 내게 명하시는 순간

곧바로 행동해야 한다고,

그게 아무리 불편하고 불리하고 불안해도 얼른 행동해야 한다고!

 

아빠, 내일도 우리 뽕잎 따러 가요. 부지런히 뽕잎차 만들어서 마을 어르신들께 선물해요.”

 

뚱딴지같은 소구의 제안에 아빠가 빙그레 웃습니다.

뽕나무 가지를 타고 흐르는 삭개오의 심장소리에 귀 기울이다보면

바로 저기쯤 어디서 삭개오보다 더 두근거리는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질지도 모른다고

상상만 해도 소구는 가슴이 설렙니다.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112호 예배마당에서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