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절 제6주 (한정훈)
죽었다
깨어난다
하더라도
지난 목요일 오랫동안 병으로 고생하던 교우가 세상을 떠났다. 스무 해 넘게 뇌종양을 앓았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참으로 낯선 삶이다. 처음 만났을 때 들은 그분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여동생이 “언니가 예수 믿고 잘 된 게 뭐야?”하고 물었단다. 어떤 마음으로 물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언니에 대한 안타까움과 신에 대한 원망이 뒤섞인 복잡한 정서가 담긴 질문이었겠지 싶다. 어쨌든 그의 대답이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안 믿었으면 벌써 죽었지.” ‘믿음으로 산다’는 말을 나는 이제 이 깊이로 이해한다.
‘믿음으로 산다’는 천둥과도 같은 이 첫말에 이끌려 한 걸음 다가섰다. 그렇게 편지도 주고받고 그분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마음껏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발인 예배 때, 내가 대표로 기도를 했다. “돌아갈 곳이 있는 영혼은 복됩니다.”, “못 다 핀 삶이 주님 품 안에서 화알짝 피어나게 해주십시오.”, “보내는 발걸음이 무겁지만, 남은 가족이 마음으로 희망을 붙들도록 해주십시오.”, “또 병에 저항했던 그 삶을 기억하면서 어떠한 삶의 어려움에도 무너지지 않도록 날마다 주의 은총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나라면 그 고통을 견딜 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은 어리석은 질문이라는 것쯤은 나도 안다. 어쨌든 그녀의 삶이 나에게는 너무도 낯설어 그저 우문을 던지는 수밖에는 없다. 그녀를 보낸 가족의 마음에는 무엇이 위로가 될까? 스무 해 넘게 눈물로 보낸 세월인데, 지긋지긋한 고통의 시간을 함께 한 가족은 마지막 순간 오열한다. 눈물이 남아 있다. 삶을 저울에 놓고 달아볼 수는 없지만 이 낯선 삶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이 생명이 품은 생명력은 어떤 것일까? 조심스럽게, 이 땅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해본다. 우리가 지금의 삶 너머에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심 없이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든 여기서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
예레미야 32: 1 – 3a, 6 - 15
1 유다의 시드기야 왕 열째 해 곧 느부갓네살 열여덟째 해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2 그 때에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의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혔으니 3 이는 그가 예언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차지할 것이며 유다 왕 시드기야는 갈대아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진 바 되리니 입이 입을 대하여 말하고 눈이 서로 볼 것이며 그가 시드기야를 바벨론으로 끌어 가리니 시드기야는 내가 돌볼 때까지 거기에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6 예레미야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느니라 이르시기를 7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시더니 8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 나에게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는지라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9 내 숙부의 아들 하나멜의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는데 은 십칠 세겔을 달아 주되 10 증서를 써서 봉인하고 증인을 세우고 은을 저울에 달아 주고 11 법과 규례대로 봉인하고 봉인하지 아니한 매매 증서를 내가 가지고 12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과 매매 증서에 인 친 증인 앞과 시위대 뜰에 앉아 있는 유다 모든 사람 앞에서 그 매매 증서를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바룩에게 부치며 13 그들의 앞에서 바룩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 증서 곧 봉인하고 봉인하지 않은 매매 증서를 가지고 토기에 담아 오랫동안 보존하게 하라 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유다 왕 시드기야 십 년, 느부갓네살 십팔 년이 되던 해에 바빌론 왕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이때 예레미야는 왕궁 감옥에 갇혀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이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의 설교를 싫어했다. 예레미야의 전망은 너무 어둡고, 비관적이다. 그래서 어떻게 그런 예언을 할 수 있냐고 하면서 시위대 뜰에 가뒀다. 사람은 희망적인 전망을 내세우는 사람을 좋아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외면하거나 적대한다. 진실인지 아닌지 중요하지 않다. 자신과 자신의 미래를 긍정하지 않는 전망은 미워한다. 큰 병에 걸렸다거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한다. 사람이 때때로 진실을 미워하는 이유는 아마도 차가운 현실감각으로 내키지 않는 오늘을 보게 하며,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미래를 가리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진실은 잿빛이어야 하는가?
중간에 한 이야기가 예레미야를 찾아온다. 예레미야가 찾은 게 아니라 예레미야를 찾아 왔다는 표현이 적확하다. 큰 어려움을 겪겠지만 정상적인 생활을 되찾게 된다.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찾아온 이 이야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달았다. 진실이 본래 어두운 것은 아니다. 참된 것은 언제나 빛을 향한다. 궁극까지 부정인 진실은 있을 수 없다. 진실은 마지막에서는 반드시 희망이어야 한다. 그러나 때때로 희망은 절망에서 비롯된다. 희망만 가득한 희망은 비현실적 -그래서 속임수-이다. 절망에서 희망, 희망에서 절망, 절망과 희망을 넘나들면서 끝내 희망을 향해 가는 것이 참 희망이다. 온통 희망으로 덧칠한 세계는 오히려 절망이다. 그러나 절망을 더 큰 희망으로 밀어내지 못한다면 결국 모든 자리를 절망에게 내줘야 한다.
시편 91: 1 – 6, 14 – 16
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2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3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4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5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6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14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15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16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
과연 우리의 희망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서 희망의 꿈을 꾸어 와야 하는가? 숨바꼭질할 때는 옷깃만 봐도 머리카락만 봐도 ‘찾았다’를 외친다. 희망은 숨어있다. 그러나 반드시 있다.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것은 널려있고, 절망은 곧잘 눈에 띄고, 희망은 찾고 찾아야 가까스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있다. 우리는 어디에 살고 있나? 어떤 이는 지옥에 살고 있고, 어떤 이는 지루한 일상 속에 파묻혀 있고, 어떤 이는 혼자만의 공간 속에서 외톨이로 살고 있다. 마음먹기 달렸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자신의 삶의 터전이 지존자의 은밀한 곳, 전능자의 은밀한 곳을 딛고 서 있다고 알고 또 믿고 사는 이의 삶은 얼마나 든든한가?
믿음과 돌봄, 관심과 애정을 인생의 기반으로 삼고 사는 사람과 의심과 방임, 무관심과 증오를 인생의 기반으로 삼고 사는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다. 보통 우리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어떻게 생각하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그대로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는 낙원에 살지 않는다. 믿음과 돌봄, 관심과 애정의 땅에서 추방당한 우리의 영혼이 의심과 방임, 무관심과 증오에 길들여졌다. 그런 사람들은 소유를 통해 쉼을 얻고, 평화를 얻는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소유를 추구한다. 돈에 의지하고, 권력에 호소한다. 이런 삶은 사는 게 아니다 죽어가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6: 6 – 19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17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살지 못하는 인생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약 2년 전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민영은’의 후손들이 청주시가 소유하고 있는 과거 민영은의 땅을 돌려 달라고 소송을 제기했다. 1심 법원은 민영은 후손의 손을 들어줬고, 다음 달 항소심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지난 25일 민영은의 외손자 권호정씨가 기자회견을 했다. ‘할아버지 땅을 빨리 돌려 달라!’ 이런 내용일 줄 알았는데, 정반대로 ‘땅 찾기 소송을 제발 그만두자’ 이런 내용이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친일파 후손이라는 운명은 씻을 수 없지만 좋은 일을 하며 역사에 진 빚을 갚아야 한다고 말했고, 땅 찾기 소송을 포기하는 건 상식이라고 했다. 더 가지려는 사람에게 양심과 상식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미 욕망이 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족하라고 가르친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더 가지려는 사람은 사는 데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정말 붙잡아야 할 것은 소유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싸워야 한다. 증인들, 그렇다, 그들이 있다. 우리가 욕망을 이겨내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붙잡기를 응원하는 수많은 증인들이 있다. 우리의 영혼이 육체와 이별할 때가 있다. 어떤 영혼은 그 안에 생명이 없어서 죽음으로 마치지만 ‘하나님의 사람(11)’은 그 안에 생명이 있어서 육체와 영혼이 이별할 때 영원한 생명으로 깨어난다. 바울은 선을 행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주라고 한다(18). 그렇게 해서 앞날을 위하여 든든한 기초를 쌓고, 참된 생명을 얻으라고 한다.
누가복음 16: 19 – 31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오병이어 이야기는 ‘나누면 남는다’는 진실을 품고 있다. 사르밧 과부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예수의 생애 역시 마찬가지다. 마땅히 움켜쥐어도 될 것을 나누었을 때 어떻게 생명(력)이 넉넉히 남게 되는지 성경은 우리에게 전한다. 움켜쥐는 사람은 결코 영원한 생명을 움켜쥘 수 없다.
마더 데레사 수녀의 일일 묵상집 가운데 이런 글이 있다. ‘나는 어느 날 밤 한 남자가 우리 집에 와서 이렇게 말했던 일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아이가 여덟이나 있는 한 가족이 굶고 있습니다. 좀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나는 그 가족에게 밥을 좀 가지고 갔습니다. 가서 보니 그 집 아이들 얼굴에는 지독한 굶주림의 모습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밥을 받은 그 어머니는 밥을 나누어주러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어디에 가셨었습니까?” 그랬더니 그 어머니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굶주리는 이웃이 또 있습니다.” 나는 그 여인이 밥을 나누어주었다는 사실보다도 그 여인이 이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습니다. 이 가족은 힌두교 가족이었고, 그 가족은 이슬람교 가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이웃이 고통 받고 굶주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아이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데도 그 여인은 자기 아이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기에 앞서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기쁨과 용기를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가족, 즉 우리의 남편, 우리의 아내, 우리의 아이들보다 우선해서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사항을 지적한 것입니다.’(한희철 <나누면 남습니다> 244-246)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는 실은 가짜 부자와 가짜 거지 이야기이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과 영원한 생명 대신 온갖 가짜 생명을 가진 사람의 운명은 건널 수 없는 큰 구렁텅이가 있는 것과 같다(26). 이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31) 영원한 운명은 기적적인 체험-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나서 말하는 것-에 의해 돌이킬 수 있는 게 아니다.
죽었다 깨어난다 하더라도 쉽지 않은 일, 되지 않을 일이다. 예수는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라 했다(16). 자발적인 동참 없이는 어떠한 기적적인 외적 요소로도 불가능하다. 무엇으로 영원한 생명을 강제할 것인가? 이 완벽한 자율성이 진리가 주는 자유이다. 황현산은 “내가 어떤 것을 진실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그렇게 말하기로 결정하는 이유에 대해 내가 자유로워야 한다. 무엇에 대한 진실은 무엇에 대한 자유이다. (중략) 그래서 문학의 자율성은 그 이름으로가 아니라 그 실천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실천한 것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실천하려는 것에 의해서도, 실천하려 했으나 실패한 것에 의해서도 평가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 고립과 증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긍지에서 평가되어야 한다.”(황현산 <잘 표현된 불행> 49) 진실은 언제나 희망을 향한다. 오늘이 거세게 가로막는다 할지라도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 또한 희망을 향해 가는 진실의 행진에 강제란 없다. 진실의 울림에 마음이 움직인 자들이 그 길을 긍지로 걸어간다. “예수 믿어서 잘 된 게 뭐야?” 현실이 아무리 절망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희망은 결코 죽지 않는다. 움켜쥐지 않는 길, 나누어 사는 길, 영원한 생명의 길, 예수의 길, 말씀이 열어 보이는 그 길은 죽었다 깨어난다 하더라도 끝나는 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