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4주(2022년 5월 8일, 어버이주일) 예배준비 노트
“어린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서”(요한계시록 7:14)
[성서일과 4본문]
(사도행전 9:36-43)
36. 그런데 욥바에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있었다. 그 이름은 그리스 말로 번역하면 도르가인데, 이 여자는 착한 일과 구제사업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37. 그 무렵에 이 여자가 병이 들어서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씻겨서 다락방에 두었다.
38. 룻다는 욥바에서 가까운 곳이다. 제자들이 베드로가 룻다에 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을 그에게로 보내서, 지체하지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였다.
39. 그래서 베드로는 일어나서, 심부름꾼과 함께 갔다. 베드로가 그 곳에 이르니, 사람들이 그를 다락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과부들이 모두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지낼 때에 만들어 둔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여 주었다.
40. 베드로는 모든 사람을 바깥으로 내보내고 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시신 쪽으로 몸을 돌려서,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 여자는 눈을 떠서,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서 앉았다.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서, 그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서, 그 여자가 살아 있음을 보여 주었다.
42. 그 일이 온 욥바에 알려지니,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43. 그리고 베드로는 여러 날 동안 욥바에서 시몬이라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묵었다.
(시편 23)
1.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2.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3.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4.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5.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6.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7:9-17)
9. 그 뒤에 내가 보니,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인데, 흰 두루마기를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10. 그들은 큰 소리로, “구원은 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의 것입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11. 모든 천사들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을 둘러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12.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영원무궁 하도록 있습니다. 아멘!” 하고 말하였습니다.
13. 그 때에 장로들 가운데 하나가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 사람들은 누구이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14. 내가 “장로님, 장로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더니,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서 희게 하였습니다.
15.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밤낮 그분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이 그들을 덮는 장막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16. 그들은 다시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도 않고, 해나 그밖에 어떤 열도 그들 위에 괴롭게 내려 쬐지 않을 것입니다.
17. 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10:22-30)
22. 예루살렘은 성전 봉헌절이 되었는데, 때는 겨울이었다.
23. 예수께서는 성전 경내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다.
24. 그 때에 유대 사람들은 예수를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시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그렇다고 분명하게 말하여 주십시오.”
25.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가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그 일들이 곧 나를 증언해 준다.
26. 그런데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도 더 크시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성서일과 본문들을 관통하는 알맹이는 ‘양은 누구인가?’입니다.
사도행전, “욥바에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있었다”(사도행전 9:36)
시편,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곳에서 살겠습니다”(시편 23:6)
서신서,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 사람들은 누구이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요한계시록 7:13)
복음서,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복음 10:27)
오늘 요절은, “그들은 어린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서 희게 하였습니다”입니다.(요한계시록 7:14)
[사도행전과 시편본문 정리 (사도행전 9:36-43 / 시편 23)]
오늘 사도행전본문의 소제목은 ‘베드로가 다비다를 살리다’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니 온갖 박해 중에도 제자들은 활발하게 주님의 일을 합니다.
그렇게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교회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때에(9:31)
사도 베드로는 룻다의 성도들에게 가서 중풍병자 애니아를 일으키고
곧 이어서 욥바에 살다 죽은 주님의 제자 다비다 살려냅니다.
다비다를 가리키는 “여제자”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유일한데,
이는 다비다가 교회의 큰 일꾼이요(39) 동시에 주님의 참된 양임을 뜻합니다.
다비다가 살아남으로 욥바의 교회는 더 든든하게 자라갑니다.(42)
오늘 시편본문의 소제목은 ‘선한목자’입니다.
이 시는 온 교회의 오랜 애창곡으로서, 대표적인 <양들의 노래>입니다.
즉 오늘 복음서본문인 요한복음 10장(선한목자)의 예수님 말씀에 대한
가장 정확한 응답찬송이라 할 만합니다.
이 시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4-5절에 나오는 <양떼의 위기>입니다.
선한목자가 계시므로 양떼들은 일생동안 그런 위기들을 견딜 만합니다.
오히려 이런 위기가 일생동안 선한목자와 양떼의 관계를
더 생생하고 단단하게 해줍니다.
[서신서와 복음서본문 정리 (요한계시록 7:9-17 / 요한복음 10:22-30)]
오늘 서신서본문의 소제목은 ‘모든 나라에서 온 무리’입니다.
주님의 참된 양떼라는, 즉 주님의 소유라는 도장(인)이 찍힌
구원받은 자의 상징 수 144,000명을
오늘 본문은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9)라는 사실적인 숫자로 묘사합니다.
이들은 마치 양떼를 연상시키듯 흰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이것은 어린양의 피로써 죄 씻음을 받은 자, 즉
‘영생을 얻은 자’(요10:28)를 강하게 드러내는 상징입니다.
이들을 복스러운 상태를 묘사하는 14-17절은, 오늘 4본문의 양들의 모습과 통하며
늘 위기 가운데 사는 이 땅의 교회에게
큰 위로와 힘을 주는 계시입니다.
오늘 복음서본문의 소제목은 ‘선한목자’입니다.
초막절 때도 일어났던 <예수가 그리스도인가?>라는 질문이(7:25-31)
한겨울 수전절에 다시 일어납니다.
이런 질문이 계속 일어나는 것은,
예수님의 표적과 위대하신 가르침 때문에 저들의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들을 귀가 없는 자들, 즉
예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26-27)
저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인 26-30절 말씀은
주님의 양에 대한 정의요, 양과 목자의 관계도(關係圖)입니다.
(이상 「독일성서공회판 해설관주성경」 해설 일부 참조)
[정리]
부활절 4주에 읽은 성서일과 본문말씀은
온통 양에 관한 느낌으로 가득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더욱 끈끈하고 생생해진
목자와 양 사이의 관계도(關係圖)입니다.
죽은 주님의 양 다비다가 눈을 뜨고 일어나는 모습에서(행9:40)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10:27)는 예수님 말씀이 떠오릅니다.
베드로의 목소리에 예수님의 사랑이 담긴 것입니다.
지난 주 베드로가 반복해서 들은 “내 양떼를 먹이라”는 그 말씀, 그 사랑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은 살아난 다비다의 노래처럼 들리고
오늘 계시록 본문 15-17절에 그 내용이 고스란히 실현됩니다.
계시록 본문의 흰 두루마기를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양떼처럼 보입니다.
흰 두루마기를 입은 모습 때문이기도 하고
예수님 말씀을 고스란히 순종한 참 제자(계7:14),
참 양들이기 때문입니다.(요10:27)
오늘 부른 시편 23편이 우리 한국교회의 노래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럴 만큼 참 목자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기를(요10:27), 그래서
온갖 편리와 편안을 추구하다 엉뚱한 길로 빠지지 말고,
큰 환난조차 거리낌 없이 어린양 예수님 보혈에 두루마기를 빨아 입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계7:14)
[나머지]
* 수전절(修殿節) 예수님 마음
수전절이라는 이름은 신구약 성경 중에, 요한 10:22 단 한곳, 단 한 번 나옵니다. 성전봉헌절이라고도 하고 광명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성탄절과 날짜가 거의 일치합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의 때가 수전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수전절을 맞아 솔로몬 행각(주랑)을 거니시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지 궁금합니다. 추측컨대, 주전 165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더럽혀지고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정결하게 회복되고 재건된 것을 기념하는 이 절기를 맞아, 성전이신 당신의 몸이 모욕당하시고 무너지실 것, 그리고 마침내 다시 정결하고 신비로운 부활의 첫 열매로 세워지시리라는 언약(요한 2:19-21)을 되새기고 계셨을 것 같습니다.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20.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짓는 데에 마흔여섯 해나 걸렸는데, 이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다구요?" 21. 그러나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 솔로몬 행각(주랑)에서
요한복음 10:23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사람들과 신론(神論)에 관하여 심하게 갑론을박하는 장면이 나오고, 사도행전에서는 사도들의 놀라운 표적을 본 백성들이 모여드는 장면이 나옵니다.(행 3:11, 행 5:12) 솔로몬 행각에는 이방인들도 들어갈 수 있었으며, 주로 종교적인 강의, 대화, 토론이 이루어지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 목자의 사랑
오늘 성서일과 4본문에는 곳곳에 양들과 목자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양과 목자의 관계를 간단하면서도 강력하게 밝혀주시고(요한복음) 예수님께 위임받은 제자 베드로가 죽은 양 다비다를 살리는 목자의 역할을 합니다.(사도행전) 예수님께서 어린양으로서 목자의 역할을 끝내 영원히 감당하시는 감격스런 모습에 이르니(계시록) 목자와 양의 노래, 시 23편을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시편) 부활의 신비, 부활의 기쁨, 부활의 능력을 지니고 사는 주님의 몸 교회는,
그 신비, 그 기쁨, 그 능력, 즉 부활의 열매란 약한 양과 끝까지 함께 하는 목자의 사랑임을 압니다. 그 사랑이 곧 참 생명이요 영생임을 기억합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이 말씀에서(요한복음 10:30) 또 한편, 양들과 나는 하나다라는 주님의 마음을 느낍니다. 참 목자는 양과 하나 되어 그 양(약자들)의 고통을 느끼며, 그 고통을 느낌으로 목자의 능력을 드러냅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시편 23:4) 양과 하나 되는 순간, 아버지와 하나 되고, 아버지와 하나 되는 순간 양과 하나 되는 이 사랑의 원리를 요람에서 무덤까지, 예수님은 일생을 통해 보여주셨고 천상천하 영원무궁, 예수님은 이 사랑의 언약 이루십니다.
**** 목자와 양
오늘 사도행전본문의 주인공은 베드로입니다. 지난주일 복음서본문에서 예수님께로부터 내 양을 먹이라는 명령을 받은 뒤 오늘 본문에서 즉각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그러고 보니 다비다(도르가)의 이름이 양과 통합니다. (도르가는 사슴보다는 영양 즉, gazelle가젤로 번역합니다. TEB, 유진피터슨 번역 성경 「메시지」 등) 다비다는 살아생전 억세고 활발한 영양처럼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약자를 도왔습니다. 다비다는 가난한 과부들에게 목자와 같은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세상에 이렇게 행복한 양이 또 있을까요? 씩씩하게 되살아나는 다비다를 보면서 오늘 시편본문 23:3절이 떠오릅니다.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시편 23편은 목자와 양의 관계를 가장 아름답고 알차게 묘사한 시입니다. 목자였던 다윗이 양이 되어 지은 노래입니다. 그러고 보니 베드로도, 다비다도, 다윗도, 모두 모두 양이면서 목자요, 목자이며 동시에 양, 즉 양의 마음을 잘 아는 목자요, 목자의 마음을 잘 아는 양들입니다.
***** 다비다(도르가)에 대하여
오늘 사도행전에 나오는 중요한 등장인물인 다비다(도르가)의 이름 뜻이 산양(山羊; 염소, 가젤)입니다. 사슴, 노루라는 번역보다 산양(염소)이 더 어울리는 까닭은, 산양은 험한 바위산을 오르내리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모험심도 강하고 적극적이며, 그 젖과 고기 또한 사람들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산양의 젖이 우리 몸에 우유보다 더 유익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다비다의 평소 삶이 이웃들에게, 마치 산양처럼, 적극적이고 유익했습니다. 산양의 억센 활동력과 그 활동반경을 연상하며 다비다의 평소 착한 일과 구제사업의 정성이 느껴집니다. 다비다 만큼이나 적극적인 욥바의 제자들과(38) 과부들(39)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리고 그 거울에 나와 우리 교회를 비추어 봅니다.
******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27)를 묵상하다 문득
오늘 사도행전본문은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 것만큼이나 괄목할만한 또 하나의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유대교 율법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 약자취급 받던 자들, 말도 섞지 않던 자들과 통하는 광경입니다. 약자인 여자가 드높은 제자의 반열에 오르고, 약자인 과부가 대우받고, 약자인 부정한 직업 무두장이의 집에서 교황 같은 감독회장 같은 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먹고 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말씀은, 교회는 이런 곳이라는 사실을, 이런 곳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웅변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제가 가장 감동적으로 읽고 묵상한 장면은 이것입니다.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바로 이 대목입니다. <40. 베드로는 모든 사람을 바깥으로 내보내고 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시신 쪽으로 몸을 돌려서,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 여자는 눈을 떠서,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서 앉았다.> 베드로는 먼저 주님과 대화합니다. 그 대화에 집중하기 위해서 주변사람들을 다 내보냅니다. 그리고 이어서 누구와 대화합니까? 죽은 사람과 대화합니다.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그리고 그 대화가 통합니다. 죽은 사람이 눈을 떠서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은 걸 보니, 말이 통한 겁니다. 동물과 말이 통한 정도가 아니라 죽은 사람과 말이 통한 겁니다. 베드로의 입을 통해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비다는 주님의 양이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그런 곳입니다. 그럴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 소통 능력이 있는 곳입니다. 그게 교횝니다.
(※ 전에 올린 것을 조금 다듬어 다시 올립니다.)
[말씀동시] 아버지 목소리 (이진구 지음. 성실교회 청년부. 「성실문화」 110호)
해질녘 눈부신 낙조 아래
매서운 겨울바람 맞으며
저 멀리 언덕 위에
지팡이 쥐고
서성이는 그
지긋이 우리를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목소리
매운바람을 타고
귓가에 맴돌아
우리를 안심시키면
그 품속으로 돌아가 잠을 잔다
아버지
[말씀시조] 셀 수 없이 많은 무리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 110호)
셀 수 없이 많은 무리 흰옷입고 찬양하네
하나님과 어린양께 엎드려 경배하네
어린양 예수님께서 목자되어 이끄사
[시편노래] 시편 23, 주님 나의 목자시니 (이정훈 편사, 이방실 작곡. 「성실문화」 110호)
[본문] (시편 23)
[노랫말]
1. 주님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 없네, 푸른 풀밭 좋은 물가 인도하시네
나에게 또다시 새 힘 주시고, 그 이름 바른 길로 날 인도하네
2. 나 비록 죽음골짝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함께하니 두려움 없네
주님의 막대기와 주님 지팡이, 날 보살펴 주시니 두려움 없네
3. 내 원수들 눈앞에서 잔칫상 차려, 내 머리에 기름 부은 나의 하나님
귀한 손님 영접하듯 날 맞으시니, 오 주여 나의 잔이 넘치옵니다
4. 진실로 주의 인자 그 선하심이, 내가 사는 평생 동안 날 따르리니
나 주님의 집으로 어서 돌아가, 영원히 그곳에서 살겠습니다.
[해설]
시편본문을 성실교회 이정훈 목사가 다듬고, 성실문화 동인이며 거문고 연주자인 국립국악원 정악단 이방실 선생이 곡을 붙였다.
[악보] 시편 23 (주님 나의 목자시니) (이정훈 편사, 이방실 작곡)
[시편송서(誦書)] 시편 23 (이정훈 다듬음. 「성실문화」 110호)
(※ 전래자장가 가락, 즉 천자문독송 가락으로)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
[다함께]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말씀동화] 귀가 막힌 길고양이 까망이
옛날옛날 한 옛날에, 이건 호랑이가 눈에 검은 안대를 차고 장애체험 하던 시절 이야기예요.
까망이는 길고양이예요.
온몸이 검은색이라 까망이죠.
까망이를 처음 만난 영희가 붙여준 이름입니다.
까망이는 처음 만났을 때
작고 작은 새끼였는데
어미도 형제도 가까이 없는 외톨이였어요.
어쩌다 저리 되었나 했더니
아이쿠! 까망이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
조용한 고양이였죠.
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일까?
바쁘게 좌우를 살피며 도리도리하는 까망이가
영희는 참 불안해 보이고 안쓰러웠습니다.
그래서 사료도 주고 통조림도 주며 보살펴주다 보니
어느덧 까망이는
영희네 집 울타리 안에 들어와 살게 되었어요.
“화분에 올라앉으면 어떡해! 저리가!”
영희 엄마가 평평한 나무 난간에 올려놓은 화분이에요.
얼마 전 엄마가 화분에 아스파라거스 뿌리 덩이를 심어서
오랜만에 싹이 나서 길게 솟고 있었는데
그만 까망이가 그 위에 턱 앉아 있네,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까망이는 태평하게 그대로 앉아있고
마치 둥지를 틀고 앉은 듯 편안해 보이는 까망이를 보면서
빙그레 웃으며 영희 아빠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암탉이 알을 품었네.”
아스파라거스 싹이 돋기를 엄마가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아는 영희는
얼른 까망이 앞으로 다가가 눈을 맞추며 손짓으로 말합니다.
“까망아, 어서 내려와!”
“이게 도대체 몇 번째야. 어디서 저런 골칫덩이 귀머거리를 데려와서!”
엄마가 또 투덜거리며 영희를 타박하십니다.
귀머거리라는 말에 속이 상한 영희가 도끼눈을 뜨고
엄마한테 종알거렸어요.
“장애를 가지고 사는 게 얼마나 힘든데, 그런 막말을 해.”
영희는 까망이 덕분에 장애를 가지고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얼마나 많은 지혜가 필요한지
조금씩 알게 되었죠.
“장애를 가진 사람과 동물들이 얼마나 용감하고 슬기로운 지 알기나 해?”
영희의 도끼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는 걸 본 엄마가
아무 말 없이 영희에게 다가가 꼭 껴안아주시고
아빠는 또 이렇게 능청을 떠십니다.
“네 엄마 아스파라거스도 태어나자마자 장애식물이 되었네.”
영희가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우리 까망이가 제 말을 좀 알아듣게 해주세요.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고!(요한복음10:27)”
그런데 기도를 하던 영희가 갸웃거립니다.
그러고 보니 까망이가 내 고양인가? 그런 생각이 든 거예요.
눈을 더 꼭 감고 두 손을 더 꼭 맞잡고 다시 기도합니다.
“아무튼 까망이의 진짜 주인은 하나님이시잖아요. 부디 까망이한테 아스파라거스 화분 위에 절대 올라가지 말라고 말씀해주세요. 저는 암만 말해도 못 알아들어요.”
곁에서 영희의 기도를 듣고 있던 아빠가 말씀하셨어요.
“까망이는 귀가 막히지 않았어도 사람 말 못 알아들어.”
영희의 눈이 또 도끼눈이 됩니다.
고양이의 지능을 얕잡아보는 아빠를 얕잡아보는 눈빛으로!
그리고 영희는 다시 눈을 꼭 감고 기도를 시작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시편23:1,4)
교회학교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 시편노래입니다.
교회학교 선생님께서 시편은 아주 훌륭한 기도라고 가르쳐주신 대로
영희는 정성을 다해 노래하며 기도합니다.
꼭 감은 영희의 눈에서 또 눈물이 솟습니다.
영희의 시편노래를 하나님이 들으신 걸까?
아니면 까망이가 알아들은 걸까?
까망이가 다시 난간 위에 폴짝 뛰어오르더니
둥지처럼 편안한 아스파라거스 화분 위에 오르지 않고
화분 곁에 가만히 앉아 물끄러미 영희를 바라봅니다.
이 모습을 보며 아빠는 아재개그로 또 너스레를 떠십니다.
“귀가 막힌 까망이가 기가 막힌 고양이로다!”
눈이 보름달만 해지신 엄마아빠 보란 듯이
영희는 얼른 까망이 앞에 참치통조림 특식을 차려줍니다.
그리고 물그릇도 놓아주며 시편노래를 부릅니다.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시편23:5)
엄마가 얼른 중얼거리십니다.
“내가 무슨 원수야. 내가 까망이 얼마나 잘해주는데.”
“도둑이 제 발 저린다∼”
아빠의 순발력, 아빠의 재치는 끝이 없습니다.
오랜만에 차린 잔칫상을 맛있게 먹는 까망이의 머리위에
둥근 햇빛과 영희네 가족의 고운 눈빛이
따듯하고 사랑스레 감돌고 있습니다.
[이정훈 지음. 2022년 5월 7일 토요일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