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절 2주(왕국절 2주, 창조절1주, 2021년 9월 5일 주일) 예배준비 노트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보서 2:13)
[성서일과 4본문]
(잠언 22:1-2,8-9,22-23)
1. 많은 재산보다는 명예를 택하는 것이 낫고, 은이나 금보다는 은총을 택하는 것이 낫다.
2.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다 함께 얽혀서 살지만, 이들 모두를 지으신 분은 주님이시다.
8. 악을 뿌리는 사람은 재앙을 거두고, 분노하여 휘두르던 막대기는 기세가 꺾인다.
9. 남을 잘 보살펴 주는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은, 그가 자기의 먹거리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 때문이다.
22. 가난하다고 하여 그 가난한 사람에게서 함부로 빼앗지 말고, 고생하는 사람을 법정에서 압제하지 말아라.
23. 주님께서 그들의 송사를 맡아 주시고, 그들을 노략하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시기 때문이다.
(시편 125)
1.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시온 산과 같아서, 흔들리는 일이 없이 영원히 서 있다.
2. 산들이 예루살렘을 감싸고 있듯이, 주님께서도 당신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토록 감싸 주신다.
3. 의인이 불의한 일에 손대지 못하게 하려면, 의인이 분깃으로 받은 그 땅에서 악인이 그 권세를 부리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4. 주님, 선한 사람과 그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5. 주님, 비틀거리면서 굽은 길을 가는 자를 벌하실 때에, 악한 일을 하는 자도 함께 벌받게 해주십시오. 이스라엘에 평화가 깃들기를!
(야고보서 2:1-10(11-13)14-17)
1.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2. 이를테면, 여러분의 회당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금반지를 끼고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도 들어온다고 합시다.
3. 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면서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거기 서 있든지, 내 발치에 앉든지 하오” 하고 말하면,
4. 바로 여러분은 서로 차별을 하고, 나쁜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5.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6.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압제하는 사람은 부자들이 아닙니까? 또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7. 여러분이 받드는 그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8. 여러분이 성경을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으뜸가는 법을 지키면, 잘하는 일입니다.
9. 그러나 여러분이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요, 여러분은 율법을 따라 범법자로 판정을 받게 됩니다.
10. 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도 한 조목에서 실수하면, 전체를 범한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분이 또한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간음은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살인을 하면, 결국 그 사람은 율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12. 여러분은, 자유를 주는 율법을 따라 앞으로 심판을 받을 각오로, 말도 그렇게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십시오.
13. 심판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자비합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14.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15.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16.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7.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마가복음 7:24-37)
24. 예수께서 거기에서 일어나셔서, 두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셨는데,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를 바라셨으나,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 악한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자가 곧바로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 여자는 그리스 사람으로서, 시로페니키아 출생인데,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27.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28.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29. 그래서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 그 여자가 집에 돌아가서 보니, 아이는 침대에 누워 있고, 귀신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서, 데가볼리 지역 가운데를 지나, 갈릴리 바다에 오셨다.
32. 그런데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33. 예수께서 그를 무리로부터 따로 데려가서,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보시고서 탄식하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에바다” 하셨다. (그것은 열리라는 뜻이다.)
35. 그러자 곧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똑바로 하였다.
36.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명하셨으나, 말리면 말릴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퍼뜨렸다.
37. 사람들이 몹시 놀라서 말하였다. “그가 하시는 일은 모두 훌륭하다. 듣지 못하는 사람도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하신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성서일과 본문들을 이어주는 공동 주제는, ‘주님의 자비심으로’입니다.
구약, “남을 잘 보살펴 주는 사람”(잠언 22:9)
시편, “영원토록 감싸주신다”(시편 125:2)
서신서,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야고보서 2:1)
복음서, ‘탄식하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에바다” 하셨다’(마가복음 7:34)
오늘 요절은,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입니다.(야고보서 2:13)
[구약과 시편본문 정리 (잠언 22:1-2,8-9,22-23, 시편 125)]
오늘 구약본문의 소제목은 ‘훈계의 가치’입니다.
부유함보다 명예와 은총을 택하는 것이 낫다는 것은(1)
<가난한 자들의 경건함>을 암시하는 듯합니다.(22-23)
가난한 자란,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이웃들로 하여금 그 가난한 자를 보면서
하나님의 자비를 기억하고 그 자비를 닮아가게 만들
거룩한 존재인 것입니다.(9)
오늘 시편본문의 소제목은 ‘주님의 백성은 안전하다’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란
권세권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입니다.(1)
가난해지고 약자가 되는 한이 있어도 불의(不義)의 편에 서지 않고
오직 주님의 편, 정의(正義)의 편에 서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시온산처럼 든든하게 감싸 보호해 주십니다.(2)
[서신서와 복음서본문 정리 (야고보서 2:1-10(11-13)14-17, 마가복음 7:24-37)]
오늘 서신서 본문의 소제목은 ‘차별을 경고함,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입니다.
본문의 <차별금지>와 <행동하는 믿음>은 모두
약자를 만날 때 자비심을 잃지 말라는,
즉 주님의 자비심을 닮아가라는 말씀으로 모아집니다.(13)
이 또한 <가난한 자의 경건>을 강하게 드러냅니다.(5)
(지난주는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을 배웠습니다. 1:27)
약자를 보고 행동하는 것도(14-17) 물론
우리가 닮아야 할 주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복음서본문의 소제목은 ‘시로페니키아 여자의 믿음, 귀먹고 말 못하는 사람의 치유’입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자는 이방인임에도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약자(가난한 자)의 경건>을 강하게 드러내는 모범으로 등장합니다.(28)
이는 예수님을 감동시키고 마침내 <유대/이방>의 경계조차 허물어버립니다.
귀먹고 말더듬는 이는
예수님과 대화도 하지 못할 약자의 상징이요,
예수님 소문조차 듣지 못할 약자 중의 약자입니다.
예수님께서 탄식하신 까닭은,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하나,
약한 자를 향하신 <큰 사랑과 큰 슬픔(대자대비大慈大悲)>
그 하나님 마음을 강하게 드러내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상 「독일성서공회판 해설관주성경」 해설 일부 참조)
[정리]
신정절(왕국절·창조절)의 큰 주제는 <창조질서(천국질서)회복>입니다.
<정의·평화·창조질서회복> 말입니다.
창조질서(천국질서) 회복을 위한 지난 주 신정절(왕국절) 첫 주일을 여는
본문말씀의 주제 즉, 첫째단추는 ‘주님의 말씀으로’였는데,
오늘 둘째 주일 주제는, ‘주님의 자비심으로’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본문들마다 가난한 자, 약자들이 나옵니다.
성경의 눈으로 볼 때 가난한 자, 약자들이란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의 상징이요, 동시에
이웃들로 하여금 그를 보면서 하나님의 자비를 기억하고 닮게 하는 존재입니다
오늘 복음서본문의 시로페니키아 여자가 예수님께 그 자비를 구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개타령>을 하십니다.
오늘 서신서본문의 차별금지에 비추어(1),
이해하기 어려운 심각한 차별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 이 이방여자의 경건, 오직 주님만 바라고 주님께만 집중하는
<약한 자의 경건>이 극대화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지금도 우리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즐비합니다.
내가 가진 <성경거울>에 비추어 도저히 납득 안 되는 일들 투성입니다.
그럴수록 더 강렬하게 우리가 붙잡을 것이 바로
오늘 시로페니키아 여자의 경건인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에바다!” 우리의 닫힌 눈과 귀를,
그리고 입까지 열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 백성은 최우선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즉
하나님의 자비(慈悲)를 구하는 자입니다.
동시에
그 자비를 닮아가는, 즉 주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나머지]
* “에바다”1
오늘 복음서본문의 예수님 심정이 매우 격하십니다. 6장 첫머리, 고향에서 배척당하신 예수님, 7장 첫머리,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8)는 동포들로 인한 실망과 상처... 바로 그 때 시로페니키아 이방 여자를 만난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예수님의 개타령과 이방여자의 부스러기타령!’이라 부르곤 합니다.) 개타령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심정과 부스러기타령으로 답가를 부르는 이방여자의 심정이 묘하게 어울립니다. 이어서 갈릴리 바다에 오셔서 만난 청각장애인을 고치실 때도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탄식하십니다. 그리고 “에바다”하고 외치십니다. 몸도 힘들고 마음도 힘드신 우리 예수님께서 잠시라도 쉬고 싶어 아무리 깊이 숨으려 해도(24) 세상엔 왜 이렇게 약한 사람이 많은 것일까요? 이방여자도, 청각장애인도 물밀 듯이 밀려옵니다. 너무 힘들어 외면하시다가, 저들이 애달파 탄식하십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오늘 시로페니키아 여자의 믿음으로 힘을 얻으시고, 청각장애인의 막힌 귀와 입을 열어주심으로, 예수님의 꽉 막혔던 가슴, 고향사람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때문에 꽉 막혔던 가슴이 활짝 열리셨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로페니키아 여자와 저 귀먹고 말 못하는 장애인이 참 고맙습니다. 주님의 몸 교회를 오늘도 수많은 약자들이 바라봅니다. 그런데 저들의 심정이, 저 시로페니키아 여자처럼, 청각장애인처럼 두근거릴지는 의문입니다. 교회가 예수님처럼 공감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예수님처럼 실천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고 말로만 선을 외치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오늘 우리 교회는 약자들의 심정, 비통하고 억울한 외침 앞에 무릎 꿇고 귀 기울여 경청해야 할 때입니다.
** “에바다”2
사람이 살다보면 구별은 할 수 있지만 차별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늘 약자의 편을 들고 계시는 마당에,(잠언 22:23) 그건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늘 약자 편을 드시는 까닭은, 강자와 약자를 모두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자 편을 드시는 것을 보고서 강자들은 내 힘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교만을 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자와 약자의 차별뿐 아니라, 혈연, 지연, 학연 때문에 차별하는 것도 안 됩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공의, 즉 공평과 정의를 훼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개타령이(마가 7:27) 차별인지, 표적 (스스로) 금지 때문인지, 또는 이방여자의 믿음을 끌어올리기 위함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마음이 섞여 있다 해도, ‘차별’이 두드러져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방여자의 “부스러기” 탄원이 대단한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니 말입니다. 마치 옥합을 깨뜨린 여자처럼, 제 자존심과 온 마음을 깨뜨려 굳게 닫힌 지친 예수님 마음에 부어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곧 이어지는 예수님의 “에바다”에서 먼저 예수님 마음이 활짝 열리신 것이 느껴집니다. 이방여자와도 통했으니 동포들과 다시 통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에바다”는 모든 동포들의 닫힌 귀와 입이 열리라는 선포입니다. 그리고 오늘 수많은 차별로 하나님과 단절된 우리의 닫힌 귀와 입, 그리고 마음이 열리라는 사랑의 선포입니다.
(* 전에 올린 것을 다듬어 다시 올립니다.)
[말씀동시] 치유 (김현서 지음. 세움교회 청년부. 「성실문화」 108호)
한 걸음 한 걸음
나아온 자들에게
주님은 기꺼이
손 내밀어 고쳐주시네
더 이상 못할 순간에도
믿음으로 나아온 자들에게
세상에 비할 수 없는
평안을 주시네
[말씀시조] 주 예수를 믿는 자여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 108호)
주 예수를 믿는 자여 사람을 차별 말라
차별은 범죄이니 차별 말고 자비하라
굶주린 형제자매께 믿음대로 행하길
[시편노래] ‘시편 125, 주님을 의지하는 든든한 사람이여’ (이정훈 편사, 이방실 작곡. 「성실문화」 108호)
[본문] (시편 125)
[노랫말]
1. 주님을 의지하는 든든한 사람이여, 영원무궁 우뚝 솟은 시온산 닮았어라
주님이 감싸주는 영원한 백성이여, 산들이 둘러주는 예루살렘 닮았어라
2. 의인의 땅 더럽히는 악한권세 몰아내고, 비뚤어진 거짓의 길 악인들을 벌하소서
선하고 정직한 자 주 은혜를 베푸소서, 오 주여 이 땅 위에 평화를 베푸소서
[해설]
시편본문을 성실교회 이정훈 목사가 다듬고, 성실문화 동인이며 거문고 연주자인 국립국악원 정악단 이방실 선생이 곡을 붙였다.
[악보] 시편 125 (주님을 의지하는 든든한 사람이여) (이정훈 편사, 이방실 작곡)
1. 주님을 의지하는 든든한 사람이여, 영원무궁 우뚝 솟은 시온산 닮았어라
주님이 감싸주는 영원한 백성이여, 산들이 둘러주는 예루살렘 닮았어라
2. 의인의 땅 더럽히는 악한권세 몰아내고, 비뚤어진 거짓의 길 악인들을 벌하소서
선하고 정직한 자 주 은혜를 베푸소서, 오 주여 이 땅 위에 평화를 베푸소서
[시편송서(誦書)] 시편 125 (이정훈 다듬음. 「성실문화」 108호)
(※ 전래자장가 가락, 즉 천자문독송 가락으로)
1.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2. 산들-이-- 예루살렘을-,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3.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
4. 여호와여-- (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
[다함께]
5.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 평강이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 동화] 바다의 마음이 넓어진 이유
옛날옛날 한 옛날에, 이건 호랑이가 바다에서 늦은 해수욕하다가 감기 걸리던 시절 이야기예요.
“바다야, 이바다 아빠 좀 도와줘.”
아빠가 부르시는 소리에 바다는 냉큼 달려갑니다.
고깃배 청소랑 그물 손질하는 거랑
우리 마을에서 바다만큼 잘하는 사람은 아빠 말고는 없을 겁니다.
“동해바다∼ 푸른물결∼ 강릉이라 경포대에 달이 떴구나∼
어부들아∼ 노저어라∼ 예수제자 베드로의 본을 받아 본을 받아
한 마린들 놓칠 소냐 내손아귀에∼♬”
[‘뱃노래’ 1970년대 무렵 김아무개 목사 지어부름]
바다는 아빠랑 신바람 나게 뱃노래를 부르며 일합니다.
바다에서 태어나 이름이 바다인 바다는
바다가 참 좋습니다.
다른 아이들보다 어눌하고 생각하는 힘이 부족해서 공부는 못하지만
아빠를 도와 배랑 그물이랑 손질하는 일은 누구보다 자신 있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바다에서 갈매기랑 장난치는 게 바다는 더 좋습니다.
“이바다, 에바다∼, 바다는, 에바다∼”
등굣길에 바다를 발견한 아이들이 노래를 합니다.
염불소리처럼 흥얼흥얼 쉬지 않고
바다를 놀려댑니다.
말을 심하게 더듬는 바다는 수업시간에 종종
의도치 않은 거센 발음으로
까르르∼
교실을 한바탕 웃음바다로 만들곤 합니다.
그러고 나면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중얼중얼
“에바다∼” 타령을 시작합니다.
‘에바’는 정도를 넘어서 지나치게 하는 행동을 이르는 아이들 유행어입니다.
왜, 언제부터 오버(over)를 에바라고 하게 된 건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게다가 바다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아이들이 놀려대는 게 싫어서
바다는 더 말수가 줄어들고 웃음도 줄어들고, 그런데
아이들을 미워하는 마음은 늘어만 갑니다.
“너를 놀리는 아이들이 많이 밉지?”
시무룩한 바다를 바라보며 아빠가 묻습니다.
아빠를 올려다보는 바다의 눈가가 촉촉합니다.
아빠의 따듯한 목소리는 언제나 바다에게 힘을 줍니다.
“아이들은 너를 미워하는 게 아니야. 아이들은 아직 생각하는 힘이 부족해서 그런 거야.”
아빠는 바다의 마음을 위로해주십니다.
어린아이들은 생각하는 힘이 부족해서 마음이 넓지 못한 거라고,
그래서 놀려댈 때마다 미운마음이 생긴다면
바다 같은 마음도 간장종지처럼 작아진다고.
“아이들이 뭐라고 놀려대느냐?”
바다는 아빠의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에바다’ 타령을 털어놓습니다.
그 순간 아빠의 눈이 보름달처럼 커집니다.
그런데 ‘에바’의 뜻을 알려드리자
아빠의 입이 해물탕 큰 조개만큼 떡 벌어집니다.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야!”
아빠는 얼른 바다에게 성경책을 펼쳐 보여주셨습니다.
마가복음 7장 34절에 놀라운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예수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보시고서 탄식하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에바다” 하셨다.(그것은 열리라는 뜻이다.)’ (마가복음 7:34)
동그래진 바다의 눈이 샛별처럼 빛납니다.
예수님도 에바다 타령을 하셨다니요!
그런데 에바다의 뜻이 열리라는 뜻이었다니요!
열려라 참깨는 들어봤어도 열려라 에바다라니요!
바다의 볼이 점점 발그레해지고
아빠의 입은 점점 벙글벙글하며 말씀을 잇습니다.
“예수님도 갈릴리 바다에서 에바다 하셨네?”
바다의 마음 귓가에
아이들의 에바다와 예수님의 에바다가 이중창처럼 메아리칩니다.
바다의 마음이 점점 따듯해집니다.
앞으론 아이들의 에바다 타령이 바다의 마음을 점점 더 넓게 만들어줄 것만 같습니다.
[이정훈 지음. 2021년 9월 4일 토요일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