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절(왕국절 3주, 창조절 2주, 교회연합주일, 2020년 9월 13일 주일) 예배준비 노트
“네 주님 앞에서 떨어라”(시편 114:7)
[성서일과 4본문]
(출애굽기 14:19-31)
19. 이스라엘 진 앞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천사가 진 뒤로 옮겨가자, 진 앞에 있던 구름기둥도 진 뒤로 옮겨가서,
20. 이집트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그 구름이 이집트 사람들이 있는 쪽은 어둡게 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는 쪽은 환하게 밝혀 주었으므로, 밤새도록 양 쪽이 서로 가까이 갈 수 없었다.
21. 모세가 바다 위로 팔을 내밀었다. 주님께서 밤새도록 강한 동풍으로 바닷물을 뒤로 밀어 내시니, 바다가 말라서 바닥이 드러났다. 바닷물이 갈라지고,
22.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한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으며 지나갔다. 물이 좌우에서 그들을 가리는 벽이 되었다.
23. 뒤이어 이집트 사람들이 쫓아왔다. 바로의 말과 병거와 기병이 모두 이스라엘 백성의 뒤를 쫓아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24. 새벽녘이 되어, 주님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에서 이집트 진을 내려다보시고, 이집트 진을 혼란 속에 빠뜨리셨다.
25. 주님께서 병거의 바퀴를 벗기셔서 전진하기 어렵게 만드시니,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쫓지 말고 되돌아가자. 그들의 주가 그들 편이 되어 우리 이집트 사람과 싸운다!’ 하고 외쳤다.
26.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너는 바다 위로 너의 팔을 내밀어라. 그러면 바닷물이 이집트 사람과 그 병거와 기병 쪽으로 다시 흐를 것이다.”
27. 모세가 바다 위로 팔을 내미니, 새벽녘에 바닷물이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왔다. 이집트 사람들이 되돌아오는 물결에서 벗어나려고 하였으나, 주님께서 이집트 사람들을 바다 한가운데 빠뜨리셨다.
28. 이렇게 물이 다시 돌아와서 병거와 기병을 뒤덮어 버렸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뒤를 따라 바다로 들어간 바로의 모든 군대는 하나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29.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한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으며 지나갔는데, 바닷물이 좌우에서 그들을 가리는 벽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30. 바로 그 날,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셨고, 이스라엘은 바닷가에 널려 있는 이집트 사람들의 주검을 보게 되었다.
31.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치신 주님의 크신 권능을 보고 주님을 두려워하고, 주님과 주님의 종 모세를 믿었다.
(시편 114)
1.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야곱의 집안이 다른 언어를 쓰는 민족에게서 떠나올 때에,
2. 유다는 주님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다.
3. 바다는 그들을 보고 도망쳤고, 요단강은 뒤로 물러났으며,
4. 산들은 숫양처럼 뛰놀고 언덕들도 새끼양처럼 뛰놀았다.
5. 바다야, 너는 어찌하여 도망을 쳤느냐? 요단강아, 너는 어찌하여 뒤로 물러났느냐?
6. 산들아, 너희는 어찌하여 숫양처럼 뛰놀았느냐? 언덕들아, 너희는 어찌하여 새끼양처럼 뛰놀았느냐?
7. 온 땅아, 네 주님 앞에서 떨어라.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어라.
8. 주님은 반석을 웅덩이가 되게 하시며, 바위에서 샘이 솟게 하신다.
(로마서 14:1-12)
1.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이를 받아들이고, 그의 생각을 시비거리로 삼지 마십시오.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은 채소만 먹습니다.
3. 먹는 사람은 먹지 않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비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도 받아들이셨습니다.
4. 우리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비판합니까? 그가 서 있든지 넘어지든지, 그것은 그 주인이 상관할 일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서 있게 할 수 있으시니, 그는 서 있게 될 것입니다.
5. 또 어떤 사람은 이 날이 저 날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이 다 같다고 생각합니다. 각각 자기 마음에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6. 어떤 날을 더 존중히 여기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요, 먹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먹으며, 먹을 때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먹지 않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먹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7. 우리 가운데는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또 자기만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8.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9.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죽은 사람에게도 산 사람에게도, 다 주님이 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0. 그런데 어찌하여 그대는 형제나 자매를 비판합니까? 어찌하여 그대는 형제나 자매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11.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하신다. 내가 살아 있으니, 모든 무릎이 내 앞에 꿇을 것이요, 모든 입이 나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12. 그러므로 우리는 각각 자기 일을 하나님께 사실대로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8:21-35)
21.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22.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마치 자기 종들과 셈을 가리려고 하는 어떤 왕과 같다.
24. 왕이 셈을 가리기 시작하니, 만 달란트 빚진 종 하나가 왕 앞에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는 빚을 갚을 돈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그 아내와 자녀들과 그밖에 그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랬더니 종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참아 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 하고 애원하였다.
27. 주인은 그 종을 가엾게 여겨서, 그를 놓아주고, 빚을 없애 주었다.
28. 그러나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나자, 붙들어서 멱살을 잡고 말하기를 ‘내게 빚진 것을 갚아라’ 하였다.
29. 그 동료는 엎드려 간청하였다.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 하지 않고, 가서 그 동료를 감옥에 집어넣고, 빚진 돈을 갚을 때까지 갇혀 있게 하였다.
31.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딱하게 여겨서, 가서 주인에게 그 일을 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다 놓고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애원하기에, 나는 너에게 그 빚을 다 없애 주었다.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34. 주인이 노하여, 그를 형무소 관리에게 넘겨주고,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가두어 두게 하였다.
35.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성서일과 본문들을 이어주는 실마리는 ‘경외심(하늘 무서운 줄 알아라)’입니다.
구약, “주님을 두려워하고”(출애굽기 14:31)
시편, “온 땅아, 네 주님 앞에서 떨어라”(시편 114:7)
서신서,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로마서 14:10)
복음서, “주인이 노하여”(마태복음 18:34)
오늘 요절은, “네 주님 앞에서 떨어라”입니다.(시편 114:7)
[구약과 시편본문 정리 (출애굽기 14:19-31 / 시편 114)]
오늘 구약본문의 소제목은 ‘이스라엘이 홍해 가운데로 지나다’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의 구원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이스라엘과 이집트 모두가 하나님 두려운 줄 알게 됩니다.(14:4, 18, 31)
홍해를 걸어서 건너기까지 혼돈, 거짓말, 불신이 가득했습니다.
본문 직전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은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14:11-12)
바로의 반복되는 거짓말은 혼돈(거짓말)의 상징인 바다 용을 떠올립니다.
마치 오래 전 그 바다 용을 무찌르신 하나님께서 다시 그 바다를 치시는 듯
홍해가 갈라지고, 그 안에서 바로의 병사들이 죽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 죽음의 바다에서 다시 삽니다.
(신약은 이 과정을 죄의 권세 죽음에서 구원받은 세례의 상징으로 봅니다. 고전10:1-2)
오늘 시편본문의 소제목은 ‘출애굽 때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입니다.
본문은 구구절절 짝을 이루며 하나님을 향한 대자연의 경외심을 노래합니다.
쉬지 않고 요동치는 홍해와 요단강이, 요동을 멈추는 초자연적 현상은(3,5)
영원히 요동치지 않을 산과 언덕이 요동치는 모습과 대구를 이룹니다.(4,6)
그리고 바다와 강바닥이 마르는가 하면,
반대로 마른 바위에서 물이 솟습니다.(8)
시인은 산과 언덕들 뿐 아니라 온 땅, 즉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떨라고 합니다.(7)
하나님 두려운 줄 알고 그에 맞는 경외심을 가지라는 선언입니다.
[서신서와 복음서본문 정리 (로마서 14:1-12 / 마태복음 18:21-35)]
오늘 서신서본문의 소제목은 ‘형제자매를 비판하지 말아라’입니다.
본문이 가리키는 “믿음이 약한 이”(1,2)는 아마
로마교회 가운데 약자 그룹에 속하는 유대기독교인들로 보입니다.
그들은 안식일과 기타 유대 축일들을 고수하고 술과 고기를 멀리했습니다.
(어쩌면 고전 8-10장의 우상제사 고기와 관련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차이, 때론 이해불가 용납불가한 차이일지라도
서로가 이를 멸시하고 따돌리지 말고 용납하려 애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하나님 앞에 선 자들이며(4)
장차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자들이기 때문입니다.(10)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크고 작은 거짓을 버리는 일입니다.(5,12)
나를 속이거나, 너를 속이거나, 하나님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진짜 하나님 두려운 줄 안다면 작은 거짓말도 할 수 없습니다.
거짓말은 늘 이간질, 공동체의 분열을 낳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서본문의 소제목은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입니다.
본문은 지난 주 본문과 같은 주제로 이어지는, 용서에 관한 비유 말씀입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하나님께 큰 용서를 받았음에도 마치 그렇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릎 꿇고 애원하던(26) 자신을 순식간에 잊은 걸까요?
잊은 게 아니라면, 그는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 법, 하나님 말씀, 하나님 은혜를 가벼이 여기는 사람 말입니다.
이미 내가 하나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용납과 용서는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의무임을 압니다.
그것도 억지로가 아니라 “진심으로”(35)하는 용서여야 합니다.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는 열쇠는 기억력입니다.
하나님 은혜와 그 경외심을 온몸이 기억하는 그런 기억력 말입니다.
머리의 기억력과 달리 일생동안 변치 않는 몸의 기억력!
그리고 공동체의 기억력!
지금 우리 공동체에 그런 기억력이 있습니까?
(이상 「독일성서공회판 해설관주성경」 해설 일부 참조)
[정리]
지금 한국사회는 이런저런 정치적인 쟁점들이 우후죽순입니다.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거짓말로 인한 이간질입니다.
거짓말로 공동체가 분열되고 교회조차 갈라지고 있습니다.
그 강도가 예전보다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아 큰일입니다.
한국교회가 급속도로 노령화 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빠른 속도로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교회학교 문을 닫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소금과 빛이었던 교회가 그 맛을 잃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가 복음의 맛, 천국의 맛을 잃게 된 것은
이미 교회 안에 만연한 거짓말 때문입니다.
이는 너도나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시작하면서부터 일어난 현상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간절하지도 절실하지도, 심지어 확실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듣고 싶은 구절만 귀에 들리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본문의 3,500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러했습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불평하며 하나님과 모세를 불신했습니다.
하나님 말씀, 예언자의 대언을 가벼이 여겼습니다.
이스라엘도 이집트도 모두 그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로 오늘!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저 사람들 앞에서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같은 피조물이지만 사람들보다 자연이 더 적극적으로 순종한 것입니다.
하늘 무서운 줄 아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노래는 온통 이 사실로 가득합니다.
홍해처럼 갈라진 한국교회가
홍해처럼 다시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올 것입니다.(출 14:27)
(때마침 교회연합주일입니다.)
갈라진 바다 위로 팔을 내밀었던 모세처럼
갈라진 교회 위로 팔을 내밀 참다운 예언자,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거짓 없는 진실한 예언자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았던 홍해처럼, 교회는 어서 경외심을 회복해야 합니다.(시 114:7)
“주님께서 말씀을 하신다. 내가 살아 있으니, 모든 무릎이 내 앞에 꿇을 것이요, 모든 입이 나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로마서 14:11)
[나머지]
* 세상 두려움과 하나님 두려움(경외심)의 차이
영화 『명량』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병사들의 저 끝없는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그리고 마침내 이순신 장군은, 12척의 배로 일자진(一字陣)을 펼친 상태에서 혼자 진격합니다. 다른 부하들의 배는 두려움에 꿈쩍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대장선이 혼자 적들에게 돌진해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웁니다. 그러자 나머지 배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해결할 길 없었던 부하들의 두려움은, 이순신 장군의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는 가르침과 실천을 보면서 서서히 용기로 바뀝니다.
오늘 구약본문도 바다에서 벌어지는 전쟁입니다. 그런데 배를 타고 싸우는 게 아닙니다. 싸움은 하나님께서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은 바다를 걸어서 건너 승리합니다. 우리 상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구원 방법과 스케일! 그 결과 우리가 얻게 되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출14:31), 그것은 경외심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자부하는 교회조차 그렇습니다. 그건 구원과정의 알맹이를 전혀 맛보지 못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은,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세상 두려움과 정반대입니다. 하나님 두려움(경외심)은 오히려 우리를 씽씽 움직이게 합니다. 그 두려움(경외심)은 친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예수님의 용기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저런 세상 두려움이 나를 가위눌리게 할 때마다, 먼저 우리는 내게 진정 주님을 향한 두려움(경외심)이 있는지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 예전에 올린 것을 조금 다듬어서 다시 올립니다)
[말씀동시] 용서 (장은우 지음. 시냇물교회 초등부. 「성실문화」 104호)
살아가면서
화나고 슬프고 분한 일은
많이 일어난다
우린
그럴 때 마다
용서
용서를 해야 한다
[말씀시조] 믿음이 약한 이를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 104호)
믿음이 약한 이를 함부로 비판 말라
하나님이 받아들여 주님 손수 세울 자다
우리는 살든 죽었든 주님의것 이나니
[말씀서예] 로마서 14:6,8 (오요섭 작품. 「성실문화」 104호)
[시편노래] 시편 114, 주의 성소 나가신다 (이정훈 편사, 주원남 작곡. 「성실문화」 104호)
[본문] (시편 114)
[노랫말]
1. 이집트 떠났노라 그 세상을 떠났노라, 주의 백성 이스라엘 주의 성소 되었노라
온땅아 떨지어다 주님 앞에 떨지어다, 주의 백성 이스라엘 주의 성소 되었노라
2. 바다야 도망쳐라 요단강은 물렀거라, 주님을 모신 백성 주의 성소 나가신다
산들아 언덕들아 양떼처럼 날뛰어라, 주님을 모신 백성 주의 성소 나가신다
[해설]
시편본문을 성실교회 이정훈 목사가 다듬고, 성실문화 동인이며 찬양사역자이신 주원남 목사가 곡을 붙였다.
[악보] 시편 114 (주의 성소 나가신다) (이정훈 작사, 주원남 작곡)
[시편 송서(誦書)] 시편 114 (이정훈 다듬음. 「성실문화」 104호)
(※ 전래자장가 가락, 즉 천자문독송 가락으로)
1.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안이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2.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3. 바다-가--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니--,
4. 산들은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들 같이 뛰었-도다-∼
5.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찌함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찌함인가
6. 너--희-- 산들-아--,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고) 작은- 산들-아--, 어린 양들 같이 뛰놂은 어찌함인가-∼
7.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다함께]
8.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차돌로 샘물이 되게하셨∼도∿다∼)∥
[말씀동화] 거짓말좀비 교회침투 사건
옛날옛날 한옛날에, 이것은 호랑이가 그 무서운 곶감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엉엉 울던 시절 이야기예요.
악마가 뿌린 씨앗이 여기저기 싹트기 시작하니
온 세상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어요.
악마가 뿌린 씨앗은 코로나19 바이러스보다 훨씬 더러우며 무서운,
바로바로 거짓말 바이러스입니다.
악마의 거짓말 바이러스가 무서운 까닭은
코로나19 바이러스보다 훨씬 전염속도가 빠르고 치료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거짓말 바이러스는 좀비처럼 다가가 덥석 전염시키는데, 그뿐 아니라
스마트폰 문자나 유튜브 동영상으로 더 잘 퍼뜨립니다.
바다건너 먼 나라 미국에도 악마의 거짓말 바이러스에 제대로 감염된
트럼프라는 지독한 거짓말쟁이가 있어서
하루에도 열두 번씩 스마트폰과 텔레비전을 통해
거짓말 바이러스를 퍼뜨린다죠?
악마의 거짓말 바이러스가 더럽고 위험한 가장 큰 이유는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순간 넋 나간 좀비처럼 되면서
온몸이 간지러워 벅벅 긁는데, 가는 곳 마다
남의 몸까지 벅벅 긁어대며 간질간질 이간질,
모든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겁니다.
악마의 거짓말 바이러스가 어느새 교회에까지 번졌어요.
슬금슬금 거짓말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은,
종류별로 골라먹는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처럼
알록달록 수많은 거짓말들을 허겁지겁 잘도 먹어치웁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덥석덥석 거짓말을 퍼뜨립니다.
제 마음이 간질거리는데 남의 옆구리를 벅벅 긁어대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스마트폰 단톡방에 올라온 새빨간 거짓말들을
여기저기 아는 사람마다 다 퍼 나릅니다.
악마의 거짓말 바이러스를 예방하는 최고의 백신이며 치료제는
뭐니 뭐니 해도 하나님 말씀인 성경말씀이죠.
그래서 처음엔 성경말씀 덕분에 교인들이 그 거짓말을 잘 믿지 않았겠죠?
그러나 반복해서 덥석덥석 깨물어대고 벅벅 긁어대는 좀비들 때문에
교회는 하나 둘 좀비가 되어 검붉은 거짓말바이러스 색깔로 물들어갑니다.
하늘에서 낮잠 자다 깨어난 모세 할아버지가 눈을 비비며 땅을 내려다보았어요.
푸르른 한반도가 어느새 검붉은 거짓말 바이러스로 물들어가는 걸 보고 깜짝 놀랐겠죠?
무엇보다 모세 할아버지가 놀란 것은 교회마저 검붉게 물들어가는 거였어요.
두 눈 부릅뜬 모세 할아버지가 한반도의 교회 위로 팔을 내밉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이, 한국교회가 둘로 쫘악 갈라지는 거예요.
어라? 저런 어마어마한 분열은 악마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거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악마가 춤을 추며 졸개들을 이끌고 달려갑니다.
온갖 거짓말 뉴스를 만들어 퍼뜨리는 원흉인 바이러스 대장들이 달려가는 겁니다.
교회가 갈라진 틈을 타 얼른 교회의 심장에 달려들어
거짓말 바이러스 주사바늘을 꽂으려는 겁니다.
도무지 거짓말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는 저 성경말씀 꽉 찬 성도들까지
송두리째 전염시키려는 겁니다.
바이러스장군 즉 좀비장군들이 너도나도 일착으로 교회의 심장에 주사바늘을 꽂으려고
갈라진 교회 속으로 몽땅 달려듭니다.
이를 내려다보던 모세 할아버지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반도의 교회들 위로 팔을 내밉니다.
그러자 갈라졌던 교회가 다시 하나로 합쳐집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교회가 합쳐지기 시작하자, 검붉은 거짓말 좀비들로 변했던 교회의 반쪽이
다시 원래의 푸르른 빛깔로 되돌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거짓말 바이러스 대장, 좀비장군들이었어요.
모세 할아버지가 팔을 내밀기 직전에
가장 먼저 교회의 심장에 모기주둥이 같은 주사바늘을 꽂았던
거짓말 대장군의 검붉은 낯빛이 순식간에 푸르른 빛깔로 변화하네?
뭐지? 원조 좀비까지 예수님의 보혈에 감염, 아니 변화된 건가?
거짓말 좀비 대장군이 변화하기 시작하자
나머지 좀비장군들까지 줄줄이 변화합니다.
홍해바다에 빠져 죽은 이집트 병사들처럼,
더러운 좀비들은 다 죽고 깨끗한 성도(聖徒)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원래 성도였던 좀비들은 물론
원래 교회 밖 사람이었던 좀비장군들까지 성도가 되어가니
악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난리가 났겠죠?
악마는 거짓말 대장 트럼프와 거짓말 중대장 아베까지 총 동원해 봐도
이제 더 이상 거짓말 좀비, 거짓말 바이러스는
한국교회에는 침투하기 어렵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 거짓말 좀비와 그 바이러스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겁니다.
왜냐고요?
그야 물론 하나님 무서운 줄 알게 된 거죠.
한바탕 홍역을 치르고 나니, 하나님 말씀 더 열심히 꼭꼭 씹어 먹으며
하나님 경외심만 나날이 차오르기 시작한 겁니다.
“온 땅아, 네 주님 앞에서 떨어라.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어라.”(시편 114:7)
[이정훈 지음. 2020년 9월 12일 토요일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