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절 10주(성령강림 후 9주, 2020년 8월 2일 주일) 예배준비 노트
“내게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시편 17:15)
[성서일과 4본문]
(창세기 32:22-31)
22. 그 밤에 야곱은 일어나서,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데리고, 얍복 나루를 건넜다.
23. 야곱은 이렇게 식구들을 인도하여 개울을 건너보내고, 자기에게 딸린 모든 소유도 건너보내고 난 다음에,
24. 뒤에 홀로 남았는데, 어떤 이가 나타나 야곱을 붙잡고 동이 틀 때까지 씨름을 하였다.
25. 그는 도저히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가 엉덩이뼈를 다쳤다.
26. 그가, 날이 새려고 하니 놓아 달라고 하였지만, 야곱은 자기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27. 그가 야곱에게 물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야곱입니다.”
28. 그 사람이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29. 야곱이 말하였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나 그는 “어찌하여 나의 이름을 묻느냐?” 하면서, 그 자리에서 야곱에게 축복하여 주었다.
30. 야곱은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뵙고도, 목숨이 이렇게 붙어 있구나!” 하면서,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하였다.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솟아올라서 그를 비추었다. 그는, 엉덩이뼈가 어긋났으므로, 절뚝거리며 걸었다.
(시편 17:1-7, 15)
1. 주님, 나의 진실을 변호하여 주십시오. 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거짓 없이 드리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2. 주님, 친히 “너는 죄가 없다”고 판결하여 주십시오. 주님의 눈으로 공평하게 살펴보아 주십시오.
3. 주님께서는 나의 마음을 시험하여 보시고, 밤새도록 심문하시며 샅샅이 캐어 보셨지만 내 잘못을 찾지 못하셨습니다. 내 입에서 무슨 잘못을 발견하셨습니까?
4. 남들이야 어떠했든지, 나만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따랐기에, 약탈하는 무리의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5. 내 발걸음이 주님의 발자취만을 따랐기에, 그 길에서 벗어난 일이 없었습니다.
6. 하나님, 내가 주님을 부르니, 내게 응답하여 주십시오. 귀 기울이셔서, 내가 아뢰는 말을 들어 주십시오.
7. 주님의 미쁘심을 크게 드러내 주십시오. 주님께로 피하는 사람을 오른손으로 구원하여 주시는 주님, 나를 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
15. 나는 떳떳하게 주님의 얼굴을 뵙겠습니다. 깨어나서 주님의 모습 뵈올 때에 주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내게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로마서 9:1-5)
1.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내 양심이 성령을 힘입어서 이것을 증언하여 줍니다.
2.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3. 나는, 육신으로 내 동족인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4. 내 동족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이 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들이 있고, 율법이 있고, 예배가 있고,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습니다.
5. 족장들은 그들의 조상이요, 그리스도도 육신으로는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만물 위에 계시며 영원토록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마태복음 14:13-21)
13.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거기에서 배를 타고, 따로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다. 이 소문이 퍼지니, 무리가 여러 동네에서 몰려나와서, 걸어서 예수를 따라왔다.
14.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 가운데서 앓는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15. 저녁때가 되니,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그러니 무리를 헤쳐 보내어, 제각기 먹을 것을 사먹게,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16.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러갈 필요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17.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18. 이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들을 이리로 가져 오너라.”
19. 그리고 예수께서는 무리를 풀밭에 앉게 하시고 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축복 기도를 드리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이를 무리에게 나누어주었다.
20.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남은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21.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어린아이들 외에, 어른 남자만도 오천 명쯤 되었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성서일과 본문들을 관통하는 알맹이(주제어)는 ‘주님 가까이 있는 행복’입니다.
구약,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뵙고도”(창세기 32:30)
시편, “주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시편 17:15)
서신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로마서 9:3)
복음서, “걸어서 예수를 따라왔다”(마태복음 14:13)
오늘 요절은, “내게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입니다.(시편 17:15)
[구약과 시편본문 정리 (창세기 32:22-31 / 시편 17:1-7, 15)]
오늘 구약본문의 소제목은 ‘얍복나루에서 씨름하는 야곱’입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형 에서를 만날 준비하는 야곱의 안쓰러운 모습이
오늘 본문까지 내내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은 그 준비의 마지막 과정입니다.
빈 몸 빈 마음으로 하나님께 매달리는 장면이 보입니다.
이 장면이 묘하고 신비롭습니다.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으려 갖가지 잔꾀를 부리던 과거 야곱과 달리
지금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으려 온몸으로 필사적입니다.
이 내면의 몸부림이 씨름하는 장면으로 드러나고
심지어 다쳐서 장애를 입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절뚝거리며 걷는 야곱의 끝 모습은 더 이상 안쓰럽지 않습니다.
햇빛을 받는 것만큼이나 희망찹니다.(31)
이름도 새롭고 힘차게 바뀌었습니다.(28)
오늘 시편본문의 소제목은 ‘무고한 자의 구조요청’입니다.
오늘 구약본문의 야곱이 밤새 씨름하듯이, 오늘 시인도
결백을 입증해 주시기를 구하며 (성소에서) 밤새 기도합니다.(3, 15)
주님 얼굴 뵙는 장면이(15) 특히 오늘 구약본문과 통합니다.
이런 기쁨 또 없습니다.(15)
[서신서와 복음서본문 정리 (로마서 9:1-5 / 마태복음 14:13-21)]
오늘 서신서본문의 소제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다’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그 언약과 상상초월 십자가 사랑,
이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존재,
선택받은 민족 이스라엘의 미묘하고 민감한 문제 이야기를 바울은 시작합니다.
동족을 향한 바울의 사랑이 역설적으로,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주님의 사랑,
그리스도와 강렬하게 연결된 바울의 사랑을 보여줍니다.(3)
오늘 복음서본문의 소제목은 ‘오천 명을 먹이시다’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잃고 참 목자 예수님을 따르려 애쓰는 백성의 모습이 선명합니다.(13b)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 사랑은
마치 광야 40년간 하나님께서 만나를 먹이시듯 오병이어를 먹이십니다.
본문은 빛을 찾는, 생명의 주인을 찾는 백성의 열심과(13)
그런 양떼를 먹이시는 모자람 없는(20) 목자의 사랑을 보여주며,
이는 마치 2천년 넘게 쉬지 않고 모자람 없이 이어지는 성찬,
그 성찬의 사랑과 신비를 미리 보여주는 듯합니다.
(이상 「독일성서공회판 해설관주성경」 해설 일부 참조)
[정리]
오늘 야곱이 결사적으로 씨름하는 모습이 딱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처럼 여겨지는 것은,
<씨름과 기도의 공통점 하나> 때문입니다.
결판이 나기까지, 점점 가까이 밀착해가는 그 점 말입니다.
“어떤 이가 나타나 야곱을 붙잡고” 이 대목이 인상적입니다.(창 32:24)
하나님, 또는 천사가 직접 와서 야곱을 붙잡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을 바치려는 순간 황급히 아브라함에게 멈추라고 외치던 천사처럼(창 22:11)
엉덩이뼈가 어긋나는 고통 중에도 끝까지 샅바를 놓지 않는 야곱에게 그가 당황합니다.(26)
코로나 <거리두기 시대>가
오히려 얍복나루 씨름처럼 점점 더 밀착할 <기도의 기회>라는 사실을
오늘 구약본문이 보여줍니다.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지쳤음에도,
일어나 절뚝이며 걷는 야곱의 얼굴 위에 브니엘(30, 하나님의 얼굴)의 햇빛이 비치듯,(31)
만신창이가 되는 한이 있어도 교회는,
모든 육적인 관계와 재산을 다 떠나보내야(23) 비로소 하나님과 밀착할 수 있고
마침내 브니엘의 진미를 맛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쳐야 합니다.
돌베개 베고 자다 <벧엘>의 하나님을 처음 만난 야곱이
얍복나루에서 밤새 씨름하다 <브니엘>의 하나님을 만나
이름이 바뀌어 <이스라엘>이 됩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이름은 어떻게, 무엇으로 변화해 갈까요?
얍복강 배수진을 친 야곱의 씨름처럼
오늘 바울의 배수진 선언처럼(롬 9:3)
오늘 예수님을 찾아 한없이 걷고 또 걷는 백성이 있습니다.(마 14:13)
지금 우리의 모든 세상 낙과 모든 관계들이 끊기는 것은,
우리가 마침내 오병이어 현장의 맛,
하나님께서 차리실 하늘잔치의 진미를 이 땅에서 맛볼 절호의 기회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가시는 곳이 어디인지 관심조차 없던
그런 이상한 교회의 시대는 끝낼 때가 된 것입니다.
“깨어나서 주님의 모습 뵈올 때에 주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내게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시편 17:15)
[나머지]
* 오병이어 사건
제자들이 작고 작은 오병이어 도시락 하나를 가져오자 예수님께서 그 작은 것을 들어 축사하시고 천국잔치를 펼치십니다. 어쩌면 열두 광주리 부스러기를 거두면서 제자들은 기억했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얼마 전에 들려주신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말입니다. 누룩과 같은 천국의 축사, 천국의 숨결이 들어가니 서 말 밀가루가 부풀 듯이 오병이어가 한없이 나눠집니다. 문득 오천 명 오만 명이 먹은 오병이어가 얼마나 맛있었을지 저는 그게 궁금합니다. 천국잔치 음식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때 거기 있었던 사람들은 그 맛을 평생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피난살이 때 얻어먹은 개떡 한조각의 맛에 비길까요? 아니 세상 어느 성찬(盛饌)도 비길 수 없이 맛있었을 것입니다. 그건 천국잔치였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으로 해석하자면 이렇습니다. 누군가 바친 오병이어 도시락, 예수님 손에 들린 그 도시락을 보고, 예수님께서 축사하신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눈으로 본 도시락과 귀로 들은 예수님 축사가 마치 누룩처럼 군중들 마음속에 파고듭니다. 그렇게 군중들 마음속에 숨어있던, 겨자씨처럼 작은 사랑이 부풀어 오릅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꼬불쳐둔 도시락을 꺼내는 바람에 삽시간에 빈들에 뷔페가 펼쳐지더라는...! 사실 이런 그림은 예나 지금이나 화수분 같은 오병이어 표적보다 더 큰 기적이요, 더 큰 신비로 보입니다. 물질구조 바뀌는 것보다 사람 마음 바뀌는 게 더 어려워 보이는 세상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논리적 해석보다 전통적인 해석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만 예수님이라면, 아무리 어렵고 견고한 조건이어도 그것이 물리화학의 세계이건, 심리의 세계이건 거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오병이어에 누룩이 들어가 그 자체가 부푼 것이든 아니면 백성들 마음에 누룩이 들어가 겨자씨 사랑이 부푼 것이든 (그도 아니면 이 두 경우가 섞인 상황이든지) 그날 빈들은 천국의 잔치였음이 틀림없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들로 변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 말씀이 새겨졌을 것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내가 바로 겨자씨라는! 내가 바로 누룩이라는! 우리가 바로 천국이라는 자신감을 어렴풋이나마 얻었을 것입니다.
(※ 예전에 올린 것을 조금 다듬어서 다시 올립니다)
** 이순신처럼, 기드온처럼, 예수님처럼
겨레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 이순신은, 1597년 정유재란 때 해전(海戰)을 포기하고 육지에서 싸우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러자 이순신장군은 바다를 포기하면 절대 안 된다면서, ‘상유십이(尙有十二) 미신불사(微臣不死)’라는 유명한 장계(狀啓)를 올립니다. “오히려(아직) 12척의 배가 있고, 보잘 것 없지만 신(臣)이(제가) 살아 있습니다.” 결국 이순신은 명량해협(울돌목)에서 12척의 배로 133척 (전체 333척)의 왜선을 물리칩니다. 12척 가운데 단 한척도 침몰하지 않은, 세계 해전사(海戰史)에 길이 남은 역사입니다.
갑자기 ‘상유십이 미신불사’가 떠오른 것은 오늘 복음서본문의 오병이어밖에 없다는 제자들 때문이었습니다.(마 14:17) 제자들은 지금 우리와 똑같이 계산적이었습니다. 물론 이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순신에게, 조정(朝廷)의 똑똑한 사람들의 계산을 넘어서는 겨레사랑이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께는 계산과 숫자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오병이어, 보리떡 다섯 개...를 생각하니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또 있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으로 끙끙 앓다가, 그 계산을 넘어서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 사사 기드온입니다. 저 유명한 보리떡 한 덩어리 꿈 이야기를 들은 기드온 이야기는 사사기 7장에 나옵니다. ‘보리떡 다섯 개밖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라면, 보리떡 한 개(기드온)만으로도 충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12.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사막 부족들이 메뚜기 떼처럼 그 골짜기에 수없이 널려 있었으며, 그들의 낙타도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13. 기드온이 그 곳에 이르렀을 때에, 마침 한 병사가 자기가 꾼 꿈 이야기를 친구에게 하고 있었다. "내가 꿈을 꾸었는데, 보리빵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 장막에 이르러서 그 장막을 쳐서 뒤엎으니, 그만 막이 쓰러지고 말았다네" 하고 말하니까, 14. 꿈 이야기를 들은 그 친구가 말하였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인 기드온의 칼이 틀림없네.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을 그의 손에 넘기신다는 것일세." 15. 기드온은 그 꿈 이야기와 해몽하는 말을 듣고, 주님께 경배하였다...
(※ 예전에 올린 것을 조금 다듬어서 다시 올립니다)
[말씀동시] 오병이어 (장연우 지음. 시냇물교회 초등부. 「성실문화」 103호)
다섯 개의 빵
두 개의 물고기
다섯 개의 희망
두 개의 사랑
이것으로
배를 불리는
예수님의 기적
[말씀시조] 내 동족 생각하면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 103호)
내 동족 생각하면 큰 슬픔 일어나네
내 동포 이스라엘 언약의 백성이여
내 겨레 구원을 위해 이 한 목숨 바치리
[말씀서예] 로마서 9:1 (오요섭 작품. 「성실문화」 103호)
[시편노래] 기도 들어주소서 (이정훈 작사, 홍의종 작곡. 「성실문화」 103호)
[본문] (시편 17:1-7, 15)
[노랫말]
1. 주님의 말씀만 따랐나이다, 주님의 발자취만 따랐나이다,
진실하신 주님만 따랐사오니, 진실한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2. 거짓 없는 이 기도를 들어주소서, 부르짖는 이 소리를 들어주소서,
오른손으로 날 구하신 미쁘신 주여, 주 얼굴 뵈올 기쁨 허락하소서
[해설]
시편본문을 성실교회 이정훈 목사가 다듬고, 성실문화 동인이며 찬양사역자이신 전일교회 홍의종 목사가 곡을 붙였다.
[악보] 시편 17 (기도 들어주소서) (이정훈 작사, 홍의종 작곡)
[시편 송서(誦書)] 시편 17:1-7, 15 (이정훈 다듬음. 「성실문화」 103호)
(※ 전래자장가 가락, 즉 천자문독송 가락으로)
1.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2. 주께-서-- 나--를--,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공평함을--) 살피-소서-∼
3.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
4.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5.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실족하지-- 아니하-였- 나이다---)∼
6.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7.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다함께]
15.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말씀동화] 신나는 돼지씨름
옛날옛날 한옛날에, 이것은 호랑이가 다람쥐랑 낙락장송 아래서 입씨름하던 시절 이야기예요.
코로나 거리두기 바람에 온 세상이 우울합니다.
학교 운동장에서도 축구나 농구도 못하고
기껏해야 피구뿐이네?
서로 몸 부딪힐 일 없는 거리두기 피구만, 그것도 아주 가끔!
학교 마치고 귀가한 영구가 투덜거렸어요.
“코로나 미워! 애들이랑 축구도 못해, 농구도 못해, 다 못해!”
먼저 귀가한 맹구랑 소구가 공기놀이 하다말고 영구를 바라봅니다.
그나마 가족끼리는 거리두기 하지 않아도 되어 참 다행이라고,
아우들을 바라보며 영구는 생각했어요.
영구의 마음을 헤아린 엄마가 말씀하셨죠.
“우리 가족끼리는 거리두기 안 해도 되니까, 오늘 우리 가족 씨름 한판 어때?”
때마침 귀가하시던 아빠가 거드십니다.
“그거 좋은 생각인 걸? 거리두기 스트레스를 집에서 푸는 데는 씨름이 최고지, 최고!”
영구도 맹구도, 막내 소구도 눈이 반짝입니다.
씨름은 몸을 가장 밀착하는 놀이이니
거리두기 스트레스 푸는 데는 최고 맞겠죠?
엄마는 상품으로 맛있는 저녁밥을 걸었어요.
막상 씨름판을 벌이려다보니 한 가지 문제가 생겼어요.
체급이 안 맞는 겁니다.
덩치 큰 아빠는 상대가 없고, 영구와 맹구는 중학생과 초등학생,
그리고 막내 소구는 초등학교 1학년 여자아인걸요.
바로 그때 영구가 샛별처럼 눈을 반짝이며 소리쳤어요.
“돼지씨름 어때?”
온 가족이 어리둥절 영구를 바라보자
영구는 신나게 설명합니다.
“돼지씨름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양팔로 자기 허벅지를 감싸 안쪽 아래로 엇갈려 왼손으로 오른 발목을, 오른손으로 왼 발목을 잡고, 그런 부자유스런 상태에서 상대방을 어깨나 엉덩이로 밀거나 발로 걸어 넘어뜨리면 이기는 경기예요. 손으로 발목 잡는 게 어려우면 그냥 허벅지만 감싸고 허벅지 아래서 두 손 잡기만 해도 돼요. 손은 꼭 붙잡고 해야 해요. 잠깐이라도 자기 맞잡은 손을 놓쳐도 져요.”
“그럼 아빠는 혼자하고 우리 셋이 같은 편먹고 하면 되겠다!”
맹구가 신명나게 외치자 소구가 엄마를 바라보며 종알거립니다.
“그럼 엄마는?”
그러자 엄마는 나팔꽃처럼 활짝 웃으며 크게 대답하셨어요.
“엄마는 심판이지. 상품도 엄마가 내는 거니까, 엄마가 심판할래, 돼지씨름 국제심판!”
아빠돼지를 포위한 새끼 돼지 세 마리가 꿀꿀꿀 큰소리를 내며
아빠를 동시에 공격하네.
둘째 셋째 돼지새끼들이 아빠의 앞뒤에서 깐족거리는 사이에
어느새 아빠 옆구리로 바짝 다가온 영구가
아빠의 오금 아래로 발을 쏙 집어넣고 순식간에 번쩍 들어 올리니
아빠는 어이쿠 소리치며 벌러덩 넘어졌어요.
심판엄마가 휘리릭 휘파람 신호로 판결을 선언하자마자
아이들은 동시에 벌떡 일어나 만세,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고
아빠는 빙그레 웃으시며 항복 선언을 하십니다.
그만하려는 아빠에게 아이들은 더 하자고 졸랐겠죠?
한바탕 돼지씨름 덕분에 코로나 거리두기 스트레스가 확 풀립니다.
엄마가 지어주신 맛있는 양푼 비빔밥을 배불리 먹은 뒤에
아빠가 말씀하셨어요.
“그러고 보니 이번 주일 구약 말씀이 야곱의 씨름 이야기네?”
야곱은 온 가족과 온 재산을 얍복강 건너로 먼저 보냅니다.(창세기 32:23)
그렇게 모든 재산, 그리고 모든 사람과 거리두기를 한 뒤에
운명을 건 한판 씨름을 벌입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야곱의 씨름을, 온몸과 마음 다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엉덩이뼈를 다칠 만큼 필사적으로 기도하는 것으로 여겼단다.”(창세기 32:25)
엄마의 해설에 아빠가 덧붙이셨어요.
“그래서 아빠 어렸을 때는 삼삼오오 산기도 가서 밤새 소나무 한그루씩 붙들고 씨름하며 기도했지.”
영구와 맹구와 소구는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소나무 붙들고 씨름하는 모습이 머리에 잘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겠죠?
문득 맹구가 무언가 깨달은 듯 이렇게 외쳤어요.
“기도랑 씨름이랑 되게 많이 닮았네? 기도도 씨름도 하면할수록 점점 더 가까워지잖아요. 기도하면 하나님이랑 가까워지고, 씨름도 결판나기까지 점점 몸을 밀착하며 가까워지고! 거리두기랑 완전반대로!”
온 가족 눈이 휘둥그레졌겠죠?
바로 그때 나도 질세라 소구도 한마디 하네?
“맞아. 우리도 돼지씨름 해서 더 가까워졌어. 돼지씨름 재미있어.”
환하게 웃으며 영구, 맹구, 소구 모두 같은 꿈을 꿉니다.
어서 코로나 거리두기를 끝내도 되는 날이 불쑥 다가와서
동무들이랑 마음껏 돼지씨름 할 수 있게 되기를,
그런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이정훈 지음. 2020년 8월 1일 토요일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