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4주(2020년 5월 3일, 어린이 주일) 예배준비 노트
“내게 잔칫상을 차려주시고”(시편 23:5)
[성서일과 4본문]
(사도행전 2:42-47)
42.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43.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44.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45.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46.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시편 23)
1.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2.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3.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4.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5.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6.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
(베드로전서 2:19-25)
19.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20.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 참으면, 그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입니다.
21. 바로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22. 그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23. 그는 모욕을 당하셨으나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이에게 다 맡기셨습니다.
24. 그는 우리 죄를 자기의 몸에 몸소 지시고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매를 맞아 상함으로 여러분이 나음을 얻었습니다.
25. 전에는 여러분은 길 잃은 양과 같았으나, 이제는 여러분의 영혼의 목자이며 감독이신 그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요한복음 10:1-10)
1.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요 강도이다.
2.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양들의 목자이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
4. 자기 양들을 다 불러낸 다음에, 그는 앞서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라간다.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5. 양들은 결코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고, 그에게서 달아날 것이다. 그것은 양들이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6.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7.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다 도둑이고 강도이다. 그래서 양들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나는 그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드나들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
10.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뿐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성서일과 본문들을 관통하는 알맹이는 ‘주님께로 가는 까닭’입니다.
사도행전,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사도행전 2:46)
시편,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시편 23:6)
서신서, “여러분의 영혼의 목자이며 감독이신 그에게로 돌아왔습니다”(베드로전서 2:25)
복음서,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요한복음 10:9)
오늘 요절은, “내게 잔칫상을 차려주시고”입니다.(시편 23:5)
[사도행전과 시편본문 정리 (사도행전 2:42-47 / 시편 23)]
오늘 사도행전본문의 소제목은 ‘신도의 공동생활’입니다.
오순절 예루살렘 세례자들로 최초의 교회가 선 뒤에
그들의 생활모습을 오늘 본문이 소개합니다.
사도들의 가르침(말씀), 친교, 기도(42),
애찬(성찬)(46), 그리고 찬양(47)이 그들의 일상이었습니다.
이를 성전과 집에서 함께 누렸으며(46)
“모두 함께 지내며”(44) 모든 것을 함께 나누었습니다.(44-45)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습니다.(47)
오늘 시편본문의 소제목은 ‘좋은 목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좋은 목자, 그리고 좋은 집주인으로 묘사합니다.
양이 겪는 위기와(4) 기도자가 겪는 위기를(5) 주님께서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사랑받고 환대받는 기회로 바꿔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거기서 끝이 아니고 영원히 계속됩니다.(6)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새 힘”을 받아 바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3)
오늘 복음서본문의 예수님께서 이 사실을 잘 드러내십니다.
[서신서와 복음서본문 정리 (베드로전서 2:19-25 / 요한복음 10:1-10)]
오늘 서신서본문의 소제목은 ‘종들에 대한 권고’입니다.
본문은 종(하인)들이 까다로운 주인 밑에서도(18)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도를 따라 잘 견디라고 권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입니다.(25, “목자이며 감독”)
그러니 우리는 밑바닥 인생 같은 종의 삶조차 너끈히 견딜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사야서 53장의 ‘고난당하시는 하나님의 종’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십자가조차 감당하셨습니다.(22-25)
오늘 복음서본문의 소제목은 ‘좋은 목자’입니다.
7장부터 점점 고조되고 있는 적대자들과의 논쟁 중에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목자와 문(門)으로 비유하여
당신께서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미리 보이십니다.(14:6)
주님께서 기르시는 양이라면,
저 엉터리 종교지도자들의 거짓말에 귀를 팔지 않습니다.(1, 5, 8, 10a)
주님의 양이라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르며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을 것입니다.(10)
[정리]
오늘 부활절 4주 본문에는 목자와 양의 비유가 많습니다.
특히 시편과 복음서의 소제목이 똑같이 “좋은 목자”입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주님의 몸 교회로 가는 까닭은
거기 좋은 목자 주님께서 우리를 먹이려고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방주가 항해 중에 종종 풍랑을 만나지만
뜻밖의 암초 같은 코로나19시대를 만나니 정신이 번쩍 듭니다.
오늘 사도행전본문처럼 “모두 함께 지내며”(44)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46)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사는(47)
이 아름다운 역사를 코로나19시대에 가장 잘 계승할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길은 무엇일까요?
그 첫 걸음이 “말씀”이라고 오늘 본문들이 가리키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행 2:42), “푸른 풀밭...”(시 23:2),
“그의 목소리를 알아 듣는다... 드나들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요 10:3,9)
분주한 마음, 부산한 관계들을 잠깐 내려놓고
말씀으로 돌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요,
말씀으로 돌아가야만 할 절박한 시기입니다.
또한 지금까지 “길 잃은 양”처럼(벧전 2:25) 다른 소리에 내 귀를 팔아온 것을 돌이켜,
다른 소리에 중독된 내 귀를 다스리고 또 다스려서
주님의 목소리에 민감하게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요 10:3,5)
그렇게 교회의 기초체력, 내 영혼의 기초체력을 다질 때입니다.
고개만 들면,
이 위기에서 우리 주님께서 특별히 내게 차려주신 잔칫상이(시 23:5)
저렇게 푸짐한데,
어찌 주님께 몰두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나머지]
* 야누슈 코르착
소아과 의사였다가 유대인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 원장이 된 야누슈 코르착은 나치가 유대인 고아들 모두를 가스실로 끌고 가는 과정에서, 자신은 몇 차례 살 기회가 있었음에도, 끝까지 고아들을 버리지 않으려 죽음의 길을 갔습니다.
아이들이 놀라지 않도록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마치 소풍을 가듯 노래 부르며 행진합니다. 행진하면서 자신의 열 손가락을 펼쳐 나이 어린 아이들이 하나씩 붙잡게 했습니다.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요한 10:15) 예수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인 히틀러 나치는 고아들을 죽이는 늑대가 되고, 유대인인 코르착은 오히려 참 목자 예수를 닮은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몸 교회에 참 좋은 목자 예수님의 향기가 남아있을까요?
** 나는 예수님의 양(羊) 맞나?
지난 화요일 밤 기도회 때 저희 집 둘째 진구가 날카로운 질문을 합니다. 오늘 요한복음 10:3∼5절에 보면 연거푸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고 하셨는데, 왜 지난 주 엠마오 제자들은 예수님과 대화하면서도 예수님을 못 알아보았느냐는 것입니다.
‘엠마오 제자들이 예수님의 양이 아니었나요?’
이것이 진구 질문의 핵심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자들이 처음에는 양으로서 2%(또는 20%) 부족했지만, 부활예수님 만난 뒤부터 점점 100%에 가까운 양이 되어갔을 것이다. 처음에는 염소끼가 있었지만, 점점 염소끼가 빠지고 온전한 양이 되어 간 게 아니었을까?”
[그런데 우리는 염소를 산양(山羊)이라고도 부릅니다. 양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양과 염소는 염색체 숫자도 다를 정도로 차이가 많습니다. 양은 염소와 달리 맹수나 산불 등 위기상황에서 얼른 도망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목자가 어디 계시나 살피며 풀을 뜯는 편입니다. 그러나 염소는 양과 달리 풀보다 나뭇잎을 더 좋아하는 잡식성입니다. 목자를 살피는 것 같지도 않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염소는 독립심과 모험심이 강하고 생존능력도 양에 비해 강하기 때문입니다. 염소는 양에 비해 뭉치기를 싫어해서 숫자가 많아지면 금세 몇 마리씩 나뉘는 습성도 있습니다... (인터넷 여기저기서 참조)]
문제는 ‘내가 양이 맞나?’입니다. 돌아보면, 나는 양보다는 산양(염소)에 가깝습니다. 양처럼 풀(말씀)만 먹는 것이 아니라, 염소처럼 이것저것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잘도 먹습니다. 그래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주님 말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말씀에 귀 기울이는 정성이 약합니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말씀을 통해서, 세상사를 통해서 내게 다급히 외치시는 그분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편입니다. 우리도 엠마오 제자들처럼, 어서 부활예수님 제대로 만나 진짜 양으로 변해가야 합니다. 날이 갈수록 점점, 이게 참 급한 문제라는 생각이, 더 미루면 안 될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 ‘목자여’
교회는 참 목자 예수님을 따르는 양이면서, 동시에 주님을 머리로 한, 이 시대의 목자입니다. 박재봉 목사님이 쓴 이 찬송시는 새 찬송가 개편 때 당연히 실려야 했던 한국인이 지은 최초의 찬송가입니다. 한국교회 목사와 교사들에게 가사가 너무 무거워서 싣기 어려웠다는 후문입니다.
목자여 (박재봉 작사, 장수철 작곡)
1.저목자여 깊은잠을 어서 깨어라 / 밤은벌써 사라지고 먼동이 터온다
희미하던 지평선도 완연해오니 / 목자들아 양을몰아 가야하리라
2. 금빛같은 새벽놀이 비낀 저언덕 / 신기하게 이슬맺힌 푸른 저초원
신선하고 거룩하다 내목장이니 / 목자들아 양을몰아 그리로 가자
3. 비탈길을 싸고돌제 다리 아프고 / 산마루를 올라갈때 숨이 막혀도
주린양떼 생각하여 참고 갈지니 / 양을치는 참목자의 장한 뜻이라
4. 몸에걸친 단벌옷이 내게 족하고 / 짚고나선 지팡이가 넉넉하여라
이제내게 다른염려 아주 없으니 / 이한날을 목장에서 양을 치리라
(※ 여러 해 전에 올린 것을 조금 다듬어 다시 올립니다)
[말씀동시] 구원을 얻는 방법 (김현서 지음. 세움교회 청년부. 「성실문화」 102호)
“아저씨 예수님 믿으세요!”
“나는 내가 믿는 게 있어
나는 나를 믿고 살거야”
우리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한 채로
시야가 좁아지고
계속해서 좁아져서
길을 잃어버리곤 하지
죄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가
구원을 얻는 방법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그 복음을 통한 길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삶으로 살아내자
지켜내자
그런, 준비된 용사가 되자
[말씀시조] 우리 죄 대신 지고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 102호)
우리 죄 대신 지고 나무에 달리신 분
그 발자취 본이 되니 그 길만을 따르오리
천지에 아름다운 분 그리스도 예수여
[말씀서예] 베드로전서 2:24 (오요섭 작품. 「성실문화」 102호)
[시편노래] 시편 23, ‘주사랑2’ (홍의종 지음. 「성실문화」 102호)
[본문] (시편 23)
[해설]
시편본문을 성실문화 동인이며 찬양사역자이신 전일교회 홍의종 목사가 다듬어서 곡을 붙였다.
[악보] 시편 23 (주 사랑 2) (홍의종 작곡)
[시편 송서(誦書)] 시편 23 (이정훈 다듬음. 「성실문화」 102호)
(※ 전래자장가 가락, 즉 천자문독송 가락으로)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주--의--)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말씀동화] ‘죽음의 그늘골짜기’ 프로젝트
옛날옛날 한옛날에, 이것은 호랑이가 달나라에서 옥토끼랑 절구질하던 시절 이야기예요.
늘 꿈꾸는 듯 편안하고 너그러운 표정으로
몽이는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봅니다.
창밖은 언제나 깜깜하고 별들만 반짝입니다.
몽이는 진돗개, 나이 많은 진돗개입니다.
지금 주인아저씨와 우주선을 타고 단 둘이 여행 중입니다.
나이 많은 지구, 너무 힘들어하는 지구를 살리기 위한 여행입니다.
가뜩이나 노쇠한 지구가 너무 많이 늘어난 사람들 때문에 힘겨워합니다.
사람들의 숫자만 늘어난 게 아니라 탐욕도 늘어났기 때문에 더 힘듭니다.
자원이 필요하다며 땅을 뚫고, 산을 뚫고, 심지어 바다까지 깊이깊이 뚫어댑니다.
핵발전소 사고가 끊이질 않고 전염병까지 맹렬합니다.
급기야 전염병 예방을 위해 <물리적 거리두기>를 하던 지구인들은
아예 <지구와 거리두기>를 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최대한 지구에 사람 숫자를 줄이기 위한 비상조치입니다.
‘죽음의 그늘골짜기’ 프로젝트는 그렇게 생겨났습니다.(시편 23:4)
죽음의 그늘골짜기 같은 시대를 지나고 있는 지구와 지구인을 보살피기 위한 겁니다.
핵발전소 사고와 무시무시한 전염병 때문에 지구에 사람 숫자가 많이 줄어들긴 했어도,
그래도 인구를 더 줄이려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지구 밖으로 내보내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시편 23:4)
지구에 있는 크고 작은 모든 우주선을 총동원해서
자원자들에게 10년 치, 20년 치 월급을 주고 우주여행을 보냅니다.
물론 영원히 지구를 떠나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
10년 뒤, 또는 20년 뒤에 지구로 귀환하여 교대할 것입니다.
우주선에 타려면 전염병 검사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전염병 검사를 잘할 뿐 아니라, 가장 우수한 우주선을 만드는 대한민국이지만
기나긴 우주선 생활이 얼마나 불편할까요?
특히 맛있는 걸 마음껏 먹지 못하는 것 때문에 대부분 사람들은 포기합니다.
몽이네 주인집 식구들도 맛있는 거 포기할 수 없어서
결국 주인아저씨만 10년 치 월급을 받아 가족을 챙기고서 몽이와 떠나기로 한 것입니다.
2인승 작은 우주선이라, 달처럼 인공위성처럼
지구 주위를 뱅뱅 돌기만 할 것입니다.
커다란 우주선은 머나먼 우주공간으로 한없이 여행할 수도 있습니다.
혹시라도 지구처럼 살기 좋은 별을 발견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주는 너무 깜깜합니다.
‘죽음의 그늘골짜기’가 따로 없습니다.
“그래도 하늘나라랑 더 가까워지니까 좋은 거 아닌가?”
하늘나라란 머나먼 우주공간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나라,
즉 우리가 사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나라라고 목사님은 말씀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우주여행을 하는 것이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것만 같다고
그렇게 믿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가장 분명한 사실은,
우주여행을 하면서 지구가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귀한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창조질서의 꽃 ‘에덴동산’이 있던 곳,
‘우주의 에덴동산’이 바로 지구라는 사실 말입니다.
우주선에서도 주일예배를 합니다.
지구의 교회와 실시간 영상을 주고받으며, 성찬식 성령임재의 기원도 동시에 진행합니다.
비록 떡이 한 덩이가 아니라 미리 쪼개져 있고 잔도 나뉘어 흩어져 있으나
한마음으로 동시에 기도하며 주님의 몸과 피가 되는 신비를 먹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시편 23:5)
지구에서도 우주에서도 이 노래를 합창하며 힘을 얻습니다.
주인아저씨가 시편노래를 부르는 것을
몽이가 따뜻한 표정으로 바라봅니다.
몽이와 눈이 마주친 주인아저씨가 문득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자 몽이도 따라 부릅니다.
집에 살 때 두부장수 차가 지나가며 마이크 소리를 낼 때마다
늑대울음소리처럼 화답하던 습관 때문인지
몽이는 마이크 노랫소리에 맞춰 목청 높여 구슬프게 장단 맞춥니다.
지구만큼 늙은 몽이가 숨질 때가 되어가니
누구보다 주인아저씨가 견딜 수 없이 슬픕니다.
단둘이 우주여행을 하는 동안
물리적 거리두기가 필요 없는 가장 가까운 벗이었기 때문입니다.
“몽이야, 나는 너의 주인이 아니고 너의 벗이었다. 목줄 없이 살고, 좋은 사료를 먹이기는 했어도, 우주선이라 북어 국도 못 끓여주고, 달리기도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나 외롭지 않으려고 너를 우주선에 태운 것이 너무너무 미안하다. 이제 진짜 너의 주인님 품으로 돌아가렴.”
그래도 너그럽고 따뜻한 표정을 잃지 않고
마지막 숨을 쉬는 몽이를 어루만지며
아저씨가 중얼중얼 나머지 작별인사를 합니다.
“천국에도 양이 있고 양치기 개가 있다면, 넌 분명히 천국에 갈 거야. 우리 조금 있다가 천국에서 만나자 몽이야! 우리 마을에서, 아니 우주에서 가장 잘 생기고 가장 멋진 목소리를 가진 진돗개였으니까, 천국에서도 너는 인기가 많을 거야. 천국가면 너의 주인이신 참 목자 예수님을 시냇물처럼 졸졸졸 따라다니렴.”
천국이 정확히 어디 있고, 천국에도 개가 있는지,
몽이의 친구가 되어줄 개도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아저씨는 하나밖에 없는 말동무였던 몽이와 헤어지는 게
하도 슬프고 아파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구부렸던 다리를 쭉 뻗으며 숨을 거두자
우주선에는 몽이를 묻어줄 흙이 없어서
규정에 따라 몽이를 우주선 밖으로 내보내며 작별합니다.
편안히 누워있는 것처럼도 보이고
든든히 서있는 것처럼도 보이며 몽이는 우주선을 떠납니다.
비록 흙을 밟고 마음껏 달리지는 못해도
저렇게 넓은 우주공간에서 지구를 돌며 천천히 별이 되어 갈 것입니다.
창밖으로 멀어지는 몽이를 바라보며 아저씨가 노래합니다.
주르르 흘러내리는 눈물이 별빛에 반짝입니다.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시편 23:6)
[이정훈 지음. 2020년 5월 2일 토요일 아침]
(16년을 하루같이 매일아침 함께 달리던 몽이, 지난 수요일 숨진 몽이를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