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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4주 (2019년 5월 12일 주일) 예배준비 노트

서무천사 2019. 5. 11. 11:17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시편 23:4)

 

[성서일과 4본문]

(사도행전 9:36-43)

36. 그런데 욥바에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있었다. 그 이름은 그리스 말로 번역하면 도르가인데, 이 여자는 착한 일과 구제사업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37. 그 무렵에 이 여자가 병이 들어서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씻겨서 다락방에 두었다.

38. 룻다는 욥바에서 가까운 곳이다. 제자들이 베드로가 룻다에 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을 그에게로 보내서, 지체하지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였다.

39. 그래서 베드로는 일어나서, 심부름꾼과 함께 갔다. 베드로가 그 곳에 이르니, 사람들이 그를 다락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과부들이 모두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지낼 때에 만들어 둔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여 주었다.

40. 베드로는 모든 사람을 바깥으로 내보내고 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시신 쪽으로 몸을 돌려서,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 여자는 눈을 떠서,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서 앉았다.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서, 그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서, 그 여자가 살아 있음을 보여 주었다.

42. 그 일이 온 욥바에 알려지니,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43. 그리고 베드로는 여러 날 동안 욥바에서 시몬이라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묵었다.

 

(시편 23)

1.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2.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3.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4.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5.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6.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7:9-17)

9. 그 뒤에 내가 보니,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인데, 흰 두루마기를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10. 그들은 큰 소리로, "구원은 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의 것입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11. 모든 천사들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을 둘러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12.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영원무궁 하도록 있습니다. 아멘!” 하고 말하였습니다.

13. 그 때에 장로들 가운데 하나가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 사람들은 누구이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14. 내가 장로님, 장로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하고 대답하였더니,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서 희게 하였습니다.

15.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밤낮 그분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이 그들을 덮는 장막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16. 그들은 다시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도 않고, 해나 그 밖에 어떤 열도 그들 위에 괴롭게 내려 쬐지 않을 것입니다.

17. 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10:22-30)

22. 예루살렘은 성전 봉헌절이 되었는데, 때는 겨울이었다.

23. 예수께서는 성전 경내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다.

24. 그 때에 유대 사람들은 예수를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시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그렇다고 분명하게 말하여 주십시오.”

25.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가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그 일들이 곧 나를 증언해 준다.

26. 그런데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도 더 크시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성서일과 본문들을 관통하는 알맹이는 목자는 약자() 가까이에 있다입니다.

 

사도행전, “과부들이 모두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사도행전 9:39)

시편,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시편 23:4)

서신서, “그들을 덮는 장막이 되어주실 것입니다”(계시록 7:15)

복음서,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요한복음 10:27)

 

오늘 요절은,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입니다.(시편 23:4)

 

 

[사도행전과 시편본문 정리 (사도행전 9:36-43 / 시편 23)]

오늘 사도행전본문 소제목은 다비다가 살아나다입니다.

과부들은 공동체에서 가장 가난한 약자들입니다.

다비다는 그 과부들의 후원자였습니다.(39)

다비다에게 붙은 여제자라는 이 표현은 성경에서 유일합니다.(36)

 

베드로가 묵은 집주인의 직업이 무두장이입니다.(43)

무두장이는 부정한 직업이라 유대인들이 꺼리고 가까이 하지 않음에도

베드로는 그 집에 들어가고 거기서 잠도 잡니다.

 

부활예수님을 따르는 교회의 능력은,

죽은 이가 되살아나는 능력만큼이나(40) 큰 능력은,

(예수님께서 평생 양들의 고단한 삶의 현장을 지키는 목자이셨던 것처럼)

약자들(여자-여제자, 과부들, 무두장이)을 높이고 섬기고 가까이 하는데서 나옵니다.

교회의 능력은!

 

오늘 시편본문 소제목은 좋은 목자입니다.

오늘 시인은 약자의 상징을 여럿 내보입니다.

약자의 인생길에는 그늘 골짜기와(4) 원수들이(5) 늘 가까이 있습니다.

그래서 약자의 노래인 시 23편은 목자를 노래합니다.

약자여서 목자가 더 간절한 것입니다.

 

이를 알기에 목자는 약자가 더 눈에 밟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다시 새 힘 주시고(3)

심지어 원수들 보는 앞에서까지

약자를 높이시고 극진히 대접하시는 것입니다.(5)

 

약자는 약자여서 무엇보다도 안전한 집을 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집에 주님과 영원히 살고 싶습니다.(6)

이는 오늘 본문들 (7:15-16, 10:28-29)과 짝을 이룹니다.

 

 

[서신서와 복음서본문 정리 (요한계시록 7:9-17 / 요한복음 10:22-30)]

오늘 계시록본문 소제목은 모든 족속으로부터 나오는 큰 무리입니다.

흰옷(흰 두루마기) 입은 수많은 사람들은(9) 땅에서 약자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순교자들이기도 했습니다.(7:14, 6:9-11)

흰옷은 죄 없음의 상징이요, 천상의 존재를 가리킵니다.(9:3, 16:5)

 

흰옷 입은 무리는 본문 바로 앞에서 말한 인()치심을 받은 자들인데,

하나님의 도장이 찍혔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라는 강렬한 표현입니다.

이들의 외침은(10) 땅의 노래인 시 23편의 하늘버전처럼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16-17절이 시 23편과 통합니다.

 

오늘 복음서본문 소제목은 선한 목자입니다.

오늘 수전절 예수님의 위기는 이미 초막절(7)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수전절이 겨울이어서인지,

유대사람들과 예수님 관계가 점점 더 얼음처럼 차가워져 갑니다.

 

그럼에도 수전절은, 쓰러진 성전 등불을 다시 세우고 다시 밝힌

빛의 절기, 광명절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본문은 예수님 안의 그리스도, 하나님 모습을 밝히 드러냅니다.

 

그것은 약한 양떼를 끝까지 지키시려는 목자의 모습입니다.(28-29)

양떼를 위해 생명까지 바치는 목자!

이 대답은(28-29) 24절의 어두운 질문에 대한 밝고 밝은 대답입니다.

(이상 독일성서공회판 해설관주성경해설 일부 참조)

 

 

[정리]

오늘 성서일과 4본문에는 곳곳에 양들과 목자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양과 목자의 관계를 간단하면서도 강력하게 밝혀주시고(요한복음)

예수님께 위임받은 제자 베드로가 죽은 양 다비다를 살리는 목자의 역할을 합니다.(사도행전)

예수님께서 어린양으로서 목자의 역할을 끝내 영원히 감당하시는 감격스런 모습에 이르니(계시록)

목자와 양의 노래, 23편을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시편)

 

부활의 신비, 부활의 기쁨, 부활의 능력을 지니고 사는

주님의 몸 교회는,

그 신비, 그 기쁨, 그 능력, 즉 부활의 열매란

약한 양과 끝까지 함께 하는 목자의 사랑임을 압니다.

그 사랑이 곧 참 생명이요 영생임을 기억합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이 말씀에서(요한복음 10:30)

또 한편, 양들과 나는 하나다라는 주님의 마음을 느낍니다.

참 목자는 양과 하나 되어 그 양(약자들)의 고통을 느끼며,

그 고통을 느낌으로 목자의 능력을 드러냅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시편 23:4)

 

양과 하나 되는 순간, 아버지와 하나 되고,

아버지와 하나 되는 순간 양과 하나 되는 이 사랑의 원리를

요람에서 무덤까지, 예수님은 일생을 통해 보여주셨고

천상천하 영원무궁, 예수님은 이 사랑의 언약 이루십니다.

 

 

[나머지]

* 목자와 양

오늘 사도행전본문의 주인공은 베드로입니다. 지난주일 복음서본문에서 예수님께로부터 내 양을 먹이라는 명령을 받은 뒤 오늘 본문에서 즉각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그러고 보니 다비다(도르가)의 이름이 양과 통합니다. (도르가는 사슴보다는 영양 즉, gazelle가젤로 번역합니다. TEB, 유진피터슨 번역 성경 메시지) 다비다는 살아생전 억세고 활발한 영양처럼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약자를 도왔습니다. 다비다는 가난한 과부들에게 목자와 같은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세상에 이렇게 행복한 양이 또 있을까요? 씩씩하게 되살아나는 다비다를 보면서 오늘 시편본문 23:3절이 떠오릅니다.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시편 23편은 목자와 양의 관계를 가장 아름답고 알차게 묘사한 시입니다. 목자였던 다윗이 양이 되어 지은 노래입니다. 그러고 보니 베드로도, 다비다도, 다윗도, 모두 모두 양이면서 목자요, 목자이며 동시에 양, 즉 양의 마음을 잘 아는 목자요, 목자의 마음을 잘 아는 양들입니다.

 

** 다비다(도르가)에 대하여

오늘 사도행전에 나오는 중요한 등장인물인 다비다(도르가)의 이름 뜻이 산양(山羊; 염소, 가젤)입니다. 사슴, 노루라는 뜻으로 번역하지만 산양(염소)이 더 어울리는 까닭은, 산양은 험한 바위산을 오르내리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모험심도 강하고 적극적이며, 그 젖과 고기 또한 사람들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산양의 젖이 우리 몸에 우유보다 더 유익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다비다의 평소 삶이 이웃들에게, 마치 산양처럼, 적극적이고 유익했습니다. 산양의 억센 활동력과 그 활동반경을 연상하며 다비다의 평소 착한 일과 구제사업의 정성이 느껴집니다. 다비다만큼이나 적극적인 욥바의 제자들과(38) 과부들(39)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리고 그 거울에 나와 우리 교회를 비추어 봅니다.

(3년 전 올린 것을 조금 다듬어 다시 올립니다.)

 

***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27)를 묵상하다 문득

오늘 사도행전본문은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 것만큼이나 괄목할만한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유대교 율법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 약자취급 받던 자들, 말도 섞지 않던 자들과 통하는 광경입니다. 약자인 여자가 드높은 제자의 반열에 오르고, 약자인 과부가 대우받고, 약자인 부정한 직업 무두장이의 집에서 교황 같은 감독회장 같은 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먹고 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사도행전말씀은, 교회는 이런 곳이라는 사실을, 이런 곳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웅변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제가 가장 감동적으로 읽고 묵상한 장면은 이것입니다.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바로 이 대목입니다.

40. 베드로는 모든 사람을 바깥으로 내보내고 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시신 쪽으로 몸을 돌려서,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 여자는 눈을 떠서,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서 앉았다.

베드로는 먼저 주님과 대화합니다. 그 대화에 집중하기 위해서 주변사람들을 다 내보냅니다. 그리고 이어서 누구와 대화합니까? 죽은 사람과 대화합니다.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그리고 그 대화가 통합니다. 죽은 사람이 눈을 떠서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은 걸 보니, 말이 통한 겁니다. 동물과 말이 통한 정도가 아니라 죽은 사람과 말이 통한 겁니다. 베드로의 입을 통해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비다는 주님의 양이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그런 곳입니다. 그럴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 소통 능력이 있는 곳입니다. 그게 교횝니다.

 

 

 

 

 

 

[말씀동시] 바람 (김현서 지음. 세움교회 청년부. 성실문화98)

나는 너무 자유로워서

하고 싶으면 하고

먹고 싶으면 먹고

만나고 싶으면 만나니까 몰랐지

 

내 위에 하나님이 계시단 걸.

 

힘들 때만 찾고

기쁠 때만 찾으니까 몰랐지

 

하나님은 항상 날 바라보고 계시다는 걸.

 

그 분을 두려워하고 존대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되고 싶다고, 되어야 한다고

다짐하는 거야

 

 

 

 

[말씀시조] 여제자 다비다가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98)

여제자 다비다가 병들어 죽은 뒤에

제자들 간청하니 베드로가 당도하네

기도 뒤 믿음의 일성 일어나라 다비다

 

 

 

 

[말씀서예] 사도행전 9:40 (오요섭 작품. 성실문화98)

 

 

 

 

[말씀노래] 내 양들은 (주원남 지음. 성실문화98)

[본문] (요한복음 10:22-30)

[노랫말]

1. 내 양들은 내 목소리 알아듣고 / 나는 내 양 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날 따른다 /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2.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 멸망하지 아니하며 빼앗을 자 없으리라 /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3. 만유보다 더 크신 이 내 아버지 / 내게 주신 내 양들을 누구도 뺏지 못하리 /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해설]

유대인들이 주님께 스스로 메시아임을 밝혀달라고 요구하자 주님께서 답변하시는 내용(27-30)에 곡을 붙였다.

 

[악보] 내 양들은 (주원남 지음, 2019. 1. 25.)

 

 

 

 

 

[시편 송서(誦書)] 시편 23 (이정훈 다듬음. 성실문화98)

(전래자장가 가락으로, 즉 천자문독송 가락으로)

 

1. --------, ---- 목자-시니-,

---- 부족-함이-,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 ------, ----시키-시고-,

-기 이름을 위하---, -의 길-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 -수의 목전-에서-, -게 상-차려 주----,

기름을 - -리에 부으셨----, 내 잔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

 

[다함께]

6. -- 평생에 선하심과--, ----하심---,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

 

------------------- (또는) --------------------

 

1. --------, ---- 목자-시니-,

---- 부족-함이-, 없으-------

 

2. ---- ----, -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 물 가---, -(-)하시는도다-

 

3. 내 영--- (내 영혼)--, ----시키-시고-,

-기 이름을 위하---, -의 길-인도하시는-도다-

 

4. -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골짜기)--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함께 하--이라-

 

-지팡이-- 막대-기가-, -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 -수의 목전-에서-, -게 상-차려 주----

기름을 - -리에 부으셨----, 내 잔이 (내 잔이) 넘치나

 

[다함께]

6. -- 평생에 선-하심과-, ----하심---,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

 

 

 

 

[말씀놀이] (이정훈 지음)

부활절 4, 2019512일 주일 (성서일과 본문 낱말 맞추기)

사도행전 9:36-43, 시편 23, 요한계시록 7:9-17, 요한복음 10:22-30

 

 

 

 

 

 

 

 

 

 

 

 

 

 

 

 

 

 

 

 

 

 

 

 

 

 

 

 

 

 

 

 

 

 

 

 

 

 

 

 

 

 

 

 

 

 

 

 

 

 

 

 

 

 

 

 

 

 

 

 

 

 

 

 

 

 

 

 

 

 

 

 

 

 

 

 

 

 

 

 

 

 

 

 

 

 

 

 

 

 

 

 

 

 

 

 

 

 

 

가로열쇠

다윗의 아내 밧세바가 나은 둘째 아들. 이름 뜻은 평화롭다는 뜻이다. 지혜의 대명사이며 수많은 잠언과 시가를 지었고, 예루살렘 성전까지 건축했지만, 여러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이방 신까지 받아들이는 결정적인 범죄를 저질러 끝이 안 좋은 왕의 대명사가 되었다.(요한복음)

욥바에서 동남쪽 약 18km 지점으로 구약에는 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베냐민의 성읍인데, 이름 뜻은 장식이다. 베드로가 이곳에서 중풍병으로 8년이나 침상에 누워있던 애니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쳤다.(사도행전)

짐승 가죽에서 털과 기름을 뽑고 가죽을 부드럽게 다루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사도행전)

하나님, 임금, 주인, 기타 높은 지위에 있는 이를 부를 때, 그 권위를 인정하는 의미로 쓰던 호칭.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이렇게 부르며, 특히 개역성경의 여호와를 새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했다. 아람어로 마레’, 헬라어로 퀴리오스를 이렇게 번역한다.(사도행전, 시편)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Epiphanes) 왕이 예루살렘 성전의 번제단 자리에 제우스 동상을 세워 성전을 더럽히자 B.C. 164년경 유다 마카비(JudasMaccabeus)가 군사를 일으켜 시리아 군대를 물리치고 성전을 정화하여 하나님께 봉헌한 날을 기념하는 축제다(외경 마카비상 4:52-59; 마카비하 10:5). ‘수전절(修殿節)’ 또는 히브리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하누카라고 한다. 유대 종교력 9(키스레브kislev, 양력 11-12) 25일부터 8일 간 지켜졌다(10:22). 요세푸스(Josephus)는 이 절기를 빛의 절기라고 불렀다(Ant. , 5:4). ○○○○○이 되면 이스라엘 각 가정에서는 가지가 여덟 개인 등대에 하루에 한 등씩 불을 밝혀 8일째는 등대의 불을 모두 밝혔다. 이런 점에서 수전절은 광명절’(Feast of Light, ‘빛의 절기’)로도 불렸다.(요한복음)

 

세로열쇠

사사 시대에 사사가 전쟁 때 지휘관으로, 평상시는 재판관으로 역할을 한 것처럼, 이스라엘 각 족속 가운데서 가장 힘센 가족들의 우두머리가 이 역할을 했다. 이들은 ○○라 불리며 일종의 귀족계층을 이루었다. 왕정 초기에 이스라엘의 ○○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 것으로 보아 왕정시대 내내 부족들의 ○○들 중심의 위원회가 있어서 전통적인 지휘체계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왕정시대에는 다소 약해졌던 ○○들의 힘이 포로기와 귀환 이후에 영향력을 되찾는다. 유대교의 모범을 따라 초기기독교는 ○○들이 교회를 이끌었다. 한편 계시록의 ○○(24○○)는 천사와 같은 존재들로서 하늘보좌 회의에 참석하는데, 이들은 임금의 기능과 제사장의 기능도 수행한다.(요한계시록)

욥바에 살던 예수님의 여제자의 이름인데, 이름 뜻은 암사슴’, ‘영양이란 뜻으로서 도르가의 아람식 이름이다. 욥바는 예루살렘 서북쪽 약 55km지점 지중해 안에 있는 항구 도시로서 아름답다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솔로몬 때 성전 건축에 쓰인 레바논의 백향목은 뗏목으로 이 항구에 운반 되었으며(대하2:16, 에스라3:7), 요나가 이 항구에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1:3) “그런데 욥바에 ○○○라는 여제자가 있었다.”(사도행전) 참고로, 성경에서 예수님의 여제자라는 이름이 붙은 곳은 여기 단 한 곳뿐이다.(사도행전)

성경에서 이 나무는, 번성하는 생명, 승리와 늘 푸름을 상징하는 나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이 가지를 꺾어 들고 호산나를 외쳤었다. 원래 대추알 같은 열매가 열려서 대추야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나무인데 성경에는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요한계시록)

우리나라에서 예전부터 입는 한복 가운데 하나로서, 원래 우리나라 옷은 말도 타고 태껸 발차기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긴 도포조차 뒤와 양옆이 트여 있는데, 이 옷은 드물게 뒤와 옆이 두루 막혀 있어서 옷 이름도 이렇게 불리게 되었다. 옛 성경이 둘둘 말게 되어 있어서 불리는 이름 두루마리와 비슷해서 혼동하기 쉽다.(요한계시록)

여러 개의 기둥만 나란히 서 있고 벽이 없는 복도를 가리키는 말.(요한복음)

(*독일성서공회판 해설관주성경(대한성서공회), 성경낱말사전(성도출판사), 인터넷 사전 등을 참고하고 부분 인용했습니다.)

 

 

 

 

 

[말씀동화] 길고양이에게 배신당한 동구의 다짐

 

옛날옛날 한 옛날에, 이건 호랑이가 장화를 신은 고양이를 만나 펜싱 하던 시절 이야기예요.

 

동구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난리가 났어요.

왜냐고요?

왜긴 왜겠어요, 오늘도 고양이들한테 배신당한 거죠.

너 자꾸 하악하악 거릴래? 내가 너 밥 주는 사람인 거 몰라, 물도 맨날 새물 떠주는 사람인데, 너 미쳤어?”

 

동구가 아침저녁으로 밥 주는 고양이는 세 마립니다.

언젠가 새까만 길고양이가 어린 새끼 두 마리를 데리고 왔을 때

측은한 마음으로 밥을 주기 시작한 게 벌써 일 년이 다되어갑니다.

 

어미랑 새끼 하나는 새까맣고,

나머지 새끼 하나는 까만 바탕에 얼굴 조금, 발 조금

하얀색이 섞여있습니다.

 

어미는 새끼들이 다 컸는데도 늘 새끼들 밥을 먼저 챙깁니다.

무슨 나쁜 기억이 있는지

새끼들이 밥 먹기 시작하면 잠깐 주변을 살피며 지켜줍니다.

 

그리고 잊을만하면 밥 주러 온 동구에게 하악하악

무서운 표정을 짓습니다.

그러면 동구도 얼른 마음이 상해버립니다.

 

넌 몸통만 까만 게 아니야, 마음까지 온통 시커먼 진짜 올블랙이야!”

 

그러곤 밥그릇을 도로 들고 집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립니다.

마음 문도 쾅 닫혀버립니다.

그리고 조금 지나면 늘 마음이 무겁습니다.

오늘도 동구 마음이 시커먼 고양이들만큼이나 어둡고 우울합니다.

 

동구야, 너무 속상해 하지 마. 네가 새끼 때부터 기른 고양이가 아니라 그래. 집에서 기른 집 고양이가 아니라 길고양이잖아.”

 

누나의 위로를 받으며 동구는 생각했어요.

 

고양이들이 내 말을 알아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고양이랑 말이 통하면 얼마나 좋을까?’

 

 

주일예배시간에 동구 눈이 번쩍, 귀가 번쩍 열립니다.

웬일인지 목사님 설교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오는 겁니다.

 

그런데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요한복음 10:26-27)

 

난생처음 예수님 말씀이, 예수님 그 마음이 동구의 마음속에 환히 차오릅니다.

고구마 열두 개 먹은 것처럼 답답한 예수님 마음이

바로 동구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어지는 목사님 말씀에 동구의 눈이 대왕콩자반만큼이나 커지네?

 

베드로는 모든 사람을 바깥으로 내보내고 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시신 쪽으로 몸을 돌려서,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 여자는 눈을 떠서,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서 앉았다.’(사도행전 9:40)

 

동구 머릿속이 복잡해집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예수님 말씀은 산 사람들도 안 듣는데, 베드로 말씀은 죽은 사람이 들은 거네?’

 

목사님 설교가 이어집니다.

 

베드로는 먼저 주님과 대화합니다. 그 대화에 집중하기 위해서 주변사람들을 다 내보냅니다. 그리고 이어서 누구와 대화합니까? 죽은 사람과 대화합니다.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그리고 어떻게 되었죠? 죽은 사람이 눈을 떠서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은 겁니다. 말이 통한 겁니다. 동물과 말이 통한 정도가 아니라 죽은 사람과 말이 통한 겁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렇습니다. 베드로의 입을 통해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죽은 다비다가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그런 곳입니다. 그런 소통의 능력이 있는 곳입니다. 성령이 일하시는 곳, 주님의 몸, 그게 교횝니다.”

 

동구는 목사님 설교말씀을 다는 몰라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어미 고양이가 하악거리는 건,

내 고양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말을 못 알아듣기 때문인 게 분명합니다.

 

언젠가 목사님께 들은 성 프란치스코 형제님처럼,

하나님 말씀, 하나님 사랑, 하나님 냄새가 내 안에 차오르면

검은 길고양이들도 내 말을 알아들을 것입니다.

내 고양이는 아니어도 하나님의 고양이기 때문입니다.

 

문득 동구는 교회의 한 사람인 게 새삼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 제자 베드로처럼, 프란치스코 형제님처럼

주님의 말씀, 주님의 사랑, 주님의 냄새 담뿍 받은 교인이 꼭 되고 싶습니다.

어느덧 동구의 마음은 배고픈 길고양이 가족에게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정훈 지음. 2019512일 주일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