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2주(2019년 3월 17일 주일) 예배준비 노트
“주님은 나의 도움이십니다”(시편 27:9)
[성서일과 4본문]
(창세기 15:1-12, 17-18)
1. 이런 일들이 일어난 뒤에,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
2. 아브람이 여쭈었다.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 저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식이라고는 다마스쿠스 녀석 엘리에셀뿐입니다.
3. 주님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으니, 이제, 저의 집에 있는 이 종이 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말씀드리니,
4.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5. 주님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리고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6.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7.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다. 너에게 이 땅을 주어서 너의 소유가 되게 하려고, 너를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내었다."
8. 아브람이 여쭈었다. "주 나의 하나님, 우리가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9.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에게 삼 년 된 암송아지 한 마리와 삼 년 된 암염소 한 마리와 삼 년 된 숫양 한 마리와 산비둘기 한 마리와 집비둘기 한 마리씩을 가지고 오너라."
10. 아브람이 이 모든 희생제물을 주님께 가지고 가서, 몸통 가운데를 쪼개어, 서로 마주 보게 차려 놓았다. 그러나 비둘기는 반으로 쪼개지 않았다.
11. 솔개들이 희생제물의 위에 내려왔으나, 아브람이 쫓아 버렸다.
12. 해가 질 무렵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가운데, 깊은 어둠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
17. 해가 지고, 어둠이 짙게 깔리니, 연기 나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갑자기 나타나서, 쪼개 놓은 희생제물 사이로 지나갔다.
18. 바로 그 날, 주님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이 땅을, 이집트 강에서 큰 강 유프라테스에 이르기까지를 너의 자손에게 준다.
(시편 27)
1. 주님이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신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이 내 생명의 피난처이신데,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랴?
2. 나의 대적자들, 나의 원수들, 저 악한 자들이, 나를 잡아먹으려고 다가왔다가 비틀거리며 넘어졌구나.
3. 군대가 나를 치려고 에워싸도, 나는 무섭지 않네. 용사들이 나를 공격하려고 일어날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려네.
4.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5. 재난의 날이 오면, 주님의 초막 속에 나를 숨겨 주시고, 주님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감추시며, 반석 위에 나를 올려서 높여 주실 것이니,
6. 그 때에 나는 나를 에워싼 저 원수들을 내려다보면서, 머리를 높이 치켜들겠다. 주님의 장막에서 환성을 올리며 제물을 바치고, 노래하며 주님을 찬양하겠다.
7. 내가 주님을 애타게 부를 때에, 들어 주십시오.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응답하여 주십시오.
8. 주님께서 나더러 "내게 와서 예배하여라" 하셨을 때 "주님, 내가 가서 예배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으니,
9. 주님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의 종에게 노하지 마십시오. 나를 물리치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은 나의 도움이십니다. 나를 버리지 마시고,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10.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돌보아 주십니다.
11. 주님, 주님의 길을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내 원수들이 엿보고 있으니, 나를 안전한 길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12. 그들이 거짓으로 증언하며, 폭력을 휘둘러서 나에게 대항해 오니, 내 목숨을 내 원수의 뜻에 내맡기지 마십시오.
13. 이 세상에 머무는 내 한 생애에, 내가 주님의 은덕을 입을 것을 나는 확실히 믿는다.
14. 너는 주님을 기다려라. 강하고 담대하게 주님을 기다려라.
(빌립보서 3:17-4:1)
17. 형제자매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은 것과 같이, 우리를 본받아서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십시오.
18. 내가 여러분에게 여러 번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19.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땅의 것만을 생각합니다.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21. 그분은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4:1. 그러므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계십시오.
(누가복음 13:31-35)
31. 바로 그 때에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여기에서 떠나가십시오. 헤롯왕이 당신을 죽이고자 합니다."
3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기를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하여라.
33.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35. 보아라, 너희의 집은 버림을 받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말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 할 그 때가 오기까지, 너희는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성서일과 본문들을 이어주는 끈은 ‘나를 도우시는 주님’입니다.
구약,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창세기 15:1)
시편, “주님이 내 생명의 피난처이신데,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 27:1)
서신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빌립보서 3:21)
복음서,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누가복음 13:34)
오늘 요절은, “주님은 나의 도움이십니다”입니다.(시편 27:9)
[구약과 시편본문 정리 (창세기 5:1-12, 17-18, 시편 27)]
오늘 구약본문의 소제목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다’입니다.
오늘 본문에 아브람의 두려움이 두 차례 나옵니다.
환상 중에(1), 그리고 잠 들었을 때(12), 이 두 차례입니다.
두려움의 원인은 하나님 부재, 또는 반대로 하나님의 임재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후자인 듯합니다.
그리고 아브람 내면 깊숙한 문제가 그 두려움의 원인 일 수도 있습니다.
불투명한 미래, 즉 대를 이을 자식이 없음 말입니다.
아브람이 자조적으로 뇌까린 그 이름 엘리에셀!(하나님은 나의 도움!)
그 낙심과 절망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희망으로 역전시키는 약속을 주십니다.
아브람의 요구가 없음에도 자손과 땅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아브람을 위하시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오늘 시편본문의 소제목은 ‘하나님과 사귀는 자의 기도’입니다.
전반부의 기도자는 성전에서 하나님과 가까이 친교함으로써
원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후반부의 기도자는 두려움으로 간절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예배”(8), “얼굴”(9) 등은 하나님께서 내 가까이 계심,
가까이에서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염원하고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우리의 모든 두려움, 죽음의 공포...(11-12)
이 근원적인 두려움의 문제까지 근본적으로 풀어주실 분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사귀는 예배에서
끝까지 우리를 도우실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10)
[서신서와 복음서본문 정리 (빌립보서 3:17-4:1, 누가복음 13:31-35)]
오늘 서신서 본문의 소제목은 ‘목표를 향한 달음질’입니다.
빌립보에 살면서 로마 시민권을 갖듯이, 우리가 땅에 살면서도 하늘 시민권을 가졌으니,
하늘로부터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에 사는 우리를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키실 것입니다.(21)
그러니 우리는 더 이상 거짓교사들처럼 땅의 것에 얽매이지 않고(18-19)
주님과 친교(4:1), 나아가 성도간의 친교까지 가능합니다.(4:2)
내 힘만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주님이 도우시니 가능합니다.(21)
오늘 복음서본문의 소제목은 ‘예루살렘을 보고 한탄하시다’입니다.
헤롯의 악한 계획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예수의 길(예언자의 길, 십자가의 길)은 권력자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정해지고 진행된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가르치십니다.
예루살렘을 한탄하심은,
그렇게 애타게 도우려는 주님의 손길을 외면하고 오히려 악으로 갚기 때문입니다.(34)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예루살렘이 왜 저러는 걸까요?
하나님의 도우심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예루살렘의 모습이
오늘 우리 모습 같아서 두렵습니다.
(이상 「독일성서공회판 해설관주성경」 해설 일부 참조)
[정리]
오늘 구약본문 하반부에서 하나님께서 보이신 장면,
쪼개놓은 제물 사이로 연기 나는 화덕과 횃불이 지나가는 장면은(17)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약속에 얽어매시는> 모습입니다.
아브람이 만난 하나님은 지나치게 보일만큼 적극적으로 아브람을 도우십니다.
시편본문 하반부 10절 말씀 역시 그렇습니다.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돌보아 주십니다.”
이 땅 마지막 보루인 부모조차 나를 버리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나를 도우시는 주님!
시인 다윗이 만난 하나님의 도우심은 늘 우리 한계를 뛰어 넘으십니다.
서신서본문 하반부에 있는 21절 말씀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2주전 서신서본문이었던 고후 3:18절 말씀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바울이 만난 하나님 역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적극적으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복음서본문 하반부 34절 말씀 역시 그렇습니다.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백성이 그것을 원하지 않음에도,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지나치리만큼 반복해서 다가오시는 하나님!
사순절 두 번째 주일 말씀에서 우리가 만난 하나님은
우리의 극한 상황, 우리의 바닥소리에 귀 기울이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입니다.
세상 끝까지 우리를 도우실 분입니다.
그럼에도
복음서본문의 예루살렘,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지금 우리 한국사회, 한국교회는
끝없이 참으시며 회개를 촉구하시는 주님의 수많은 싸인, 경고음들을
여전히 무시합니다. 회개는커녕 쉽게 덮어버리고 쉽게 잊습니다.
버닝썬이라는 클럽에서 벌어진 추악한 일들,
몇몇 가수들로부터 시작해서 고구마줄거리처럼 줄줄이 드러나는 범죄들...
김학의 사건, 장자연 사건 등 묻혔던 추악한 범죄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광주항쟁과 관련한 은폐된 범죄들,
반민특위 운운하며 스스로 드러내는 친일잔재들의 추악한 모습들까지!
이제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은 거짓들,
셀 수 없이 많은 참담한 죄악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 안의 이 뿌리 깊은 적폐들을 끝까지 파내는 길, 골고다처럼 고통스러울 그 길 내내,
그리고 마침내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이룰 그날까지
주님의 선한 능력이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나머지]
* 하나님 언약의 무게
아브람은 하나님이 하늘의 별을 보여주실 때 이것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셔서 뭇별을 보여주시며 네가 이 별을 셀 수 있나 보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단지 아브람의 자녀의 숫자가 그와 같이 많으리라는 단순비교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수많은 별들을 말씀 하나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 우리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를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태양계에 속한 하나의 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 태양계는 다시 은하계에 속한 많은 비슷한 별들의 모임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은하계는 소우주의 일부이며 이 소우주는 다시 대우주의 일부이며 우리는 이러한 대우주가 수백만 개가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 이상 얼마나 많은 그리고 얼마나 더 큰 세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우주의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 많은 별들을 말씀 하나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면 우리는 반드시 이루어 질 줄로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략) (이성호. 「새벽에 길어 올린 처음말씀」(2000. 도서출판 성실문화)
[말씀동시] 나는 내 길을 갈거야 (김종진 지음. 몽골 하나님의어린양교회 목사. 「성실문화」 98호)
헤롯아 너가 나를 막아도
나는 내 길을 갈거야
오늘도 내일도 내 길을 가다가
삼일이 되어 이 길을 완전하게 해야지
예루살렘아 너는 오랫동안
선지자들을 때리고 아프게 하였지
그래도 나는 너에게로 들어갈거야
거기서 내 길을 이루어야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합니다라고 할 때까지
나를 보기 어려울거야
나는 내 길을 갈거야
[말씀시조] 밤하늘 쳐다보라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 98호)
밤하늘 쳐다보라 저 별들을 세어보라
네 몸에서 나올 자손 셀 수 없이 많으리라
너에게 이 땅을 주어 네 자손이 누리리
[말씀서예] 창세기 15:1 (오요섭 작품. 「성실문화」 98호)
[말씀노래] (홍의종 지음. 「성실문화」 98호)
[본문] 누가 13:31-35
[노랫말]
1. 예루살렘 예루살렘아 암탉이 새끼를 모으듯
내가 너희 모으려 하나 너희가 원하지 않았다
2. 주님 우리 부르실 때에 귀를 열어 듣게 하소서
주님 우리 모으실 때에 주 품에 안기게 하소서
[해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탄식하는 장면을 중심으로 노래를 만들어 보았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비롯해서 믿음 생활에 있어서 앞서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핍박하였고, 하나님께서 불러 모으려고 하셨으나 그들은 번번이 거절하였다. 오늘날 우리라고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소위 믿음에 있어서 앞서간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말씀을 통해서 혹은 일상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무시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탄식은 우리를 향한 탄식이기도 하다.
1절은 주님께서 예루살렘, 아니 우리를 향해서 하시는 탄식을 담았다. 불러도 듣지 않고 대답 없고, 모아도 모이지 않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심정을 느껴보자. 2절은 그런 예수님의 탄식에 대한 우리의 마땅한 반응을 담았다. 부르실 때 귀 기울여 듣고, 모으실 때 품에 안길 것을 다짐하며 불러보자. 돌림노래를 부를 수 있게 만들었다. 특별히 2절을 돌림노래로 부르면서 우리의 믿음을 다져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악보] 예루살렘 예루살렘아 (홍의종 지음, 2013)
[시편 송서(誦書)] 시편 27 (이정훈 다듬음. 「성실문화」 98호)
(※ 천자문독송 가락으로, 전래자장가 가락으로)
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5.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6.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7. 여호와-여- 내-가 소리-내어-,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9.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11.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 하소서---∼
12. 내 생명을 내 대적에게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13. 내-가 산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확실-히-- 믿었-도다-)∼
[다함께]
14.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말씀놀이] (이정훈 지음)
사순절 2주, 2019년 3월 17일 (성서일과 본문 낱말 맞추기)
창세기 15:1-12, 17-18, 시편 27, 빌립보서 3:17-4:1, 누가복음 1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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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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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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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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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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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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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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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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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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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
리 |
새 |
파 |
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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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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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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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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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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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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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
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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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
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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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 |
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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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
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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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
아 |
브 |
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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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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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
마 |
스 |
쿠 |
스 |
가로열쇠
②‘구별된 자’라는 뜻을 가진 유대교 종파 이름. 마카베오 전쟁(주전 160여년 경부터 시작) 이후부터 강한 종파로 대두되기 시작해서 주후 70년 경 예루살렘이 망한 뒤 가장 강력한 종파가 되었다. 율법, 십일조, 정결예법 등에 철저했다. 처음에는 평신도 운동이었으나 차차 서기관(율법학자) 계층과 긴밀히 연결되었다.(누가복음)
③하나님, 임금, 주인, 기타 높은 지위에 있는 이를 부를 때, 그 권위를 인정하는 의미로 쓰던 호칭.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이렇게 부르며, 특히 개역성경의 ‘여호와’를 새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했다. 아람어로 ‘마레’, 헬라어로 ‘퀴리오스’를 이렇게 번역한다.(창세기, 시편, 빌립보서, 누가복음)
④‘빛, 빛남’이라는 뜻을 가진 지역으로서, 바벨론의 동남 225km 지점. 유프라테스강 서쪽에 있다. 메소포타미아 갈대아(바빌로니아)인의 성읍이다. 아브라함이 한동안 이곳에서 살다가 여호와의 지시를 받고 정처 없이 떠났다. (창세기)
⑤데라의 아들이며 사래(뒤에 사라로 개명)의 남편이다. 이름의 뜻은 ‘존귀하신 아버지’ 즉 ‘나의 아버지, 곧 하나님은 크시다’라는 뜻인데, 나중에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창세기)
⑥‘활발’이라는 뜻을 가진 지역으로서, 과거 아람(시리아)의 수도였고, 현재도 시리아의 수도인데, 때때로 이곳이 수도였던 국가를 지칭하기도 한다. 삼면이 산악으로 둘러싸인 670미터 높이의 평지에 있다. 주전 64년부터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240Km나 떨어져 있었지만, 오래 전 아브라함 때부터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어온 까닭에 많은 유대인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러 이곳에 있는 여러 회당으로 가다가 부활예수님을 만나 회심하여 바울이 되었다. (창세기)
세로열쇠
①구약성경에서 ○○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무게와 명예, 힘과 권위를 주는 그 무엇을 뜻한다. 야훼의 ○○에 대해 말할 때는 하나님의 위엄이 눈에 보이게 드러나는, 즉 환히 빛나는 광채로 묘사한다. 신약성경에서 ○○은 하나님의 불멸의 생명을 가리키는데, 이 생명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통한 교회도 참여한다.(빌립보서)
②아브라함의 종으로서 다마스쿠스 출신이다. 이름 뜻은 ‘하나님은 도우시는 이, 나를 도우시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성경에 동명이인이 많다. 모세와 십보라 사이에 태어난 아들(출 18:4; 대상 23:15-17), 베냐민의 손자(대상 7:8),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옮길 때 나팔을 불던 한 제사장(대상 15:24), 르우벤 지파의 지도자(대상 27:16), 여호사밧 왕을 비난했던 선지자(대하 20:37), 예루살렘 성전에 봉사할 자를 데려오도록 보냄받은 에스라의 사자(스 8:16), 포로 귀환 때 이방인 아내를 돌려보낸 제사장(스 10:18), 레위인으로 이방인 아내를 돌려보낸 자(스 10:23), 하림의 아들로 이방 여인과 이혼한 자(스 10:31), 예수님의 조상 중 한 명(눅 3:29) 등이 있다. (창세기)
③만유의 창조주시며 구원자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성부, 성자, 성령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하느님이라고도 부른다. 천주교식으로 천주(天主) 즉 하늘의 주인, 즉 하늘님이 변해서 하느님이 된다. 그런데 ‘하늘’은 예전에 ‘하날(하ᄂᆞᆯ⟨한ᄋᆞᆯ=큰 알)’이라 불렀던 것에 비추어 하늘님보다 하날님, 즉 ○○○이 더 오랜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천주교와 개신교가 함께 보기 위한 공동번역 성경은 ‘하느님’으로 통일했다. ○○○에는 ‘하늘’이란 느낌 외에도 ‘하나’를 뜻하는 느낌도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창세기, 시편, 빌립보서)
⑤오늘날 바그다드 언덕에까지 이르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가의 충적지에 있었던 나라다. 주전(B.C.) 5천 년 전부터 이곳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주전 586년경 이 나라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파괴했다. (충적지: 흙이나 모래가 물에 흘러 내려와 범람원이나 삼각주 따위의 낮은 지역에 쌓여 생긴 비옥한 토양의 땅) (창세기)
⑥창세기 2장에 나오는 에덴동산에서 발원한 4개 강 가운데 하나로서, 티그리스강과 더불어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이루었다. 터키 동부 고원에서 발원하여 시리아와 이라크를 가로질러 흐른다. (창세기)
(*「독일성서공회판 해설관주성경」(대한성서공회), 「성경낱말사전」(성도출판사), 인터넷 사전 등을 참고하고 부분 인용했습니다.)
[말씀동화] 잠깐 꿈에 아브람 할아버지가 되었던 소녀
옛날옛날 한 옛날에, 이건 호랑이가 너울너울 나비꿈 꾸던 시절 이야기예요.
혜자는 열다섯 살 소녀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나가던 중2였는데,
검찰 엄마도 경찰 아빠도 벌벌 떠는 천하의 중2였는데,
어느덧 중3 지나 벌써 고등학생이라니!
혜자는 그 좋아하는 고등어도 끊으려 할 만큼
고등학생이 싫습니다.
그 좋아하는 다슬기도 또 하나의 이름이 민물고등이라는 바람에
이젠 쳐다보지도 않는다죠? 왜?
고등학생이 싫으니까, 고등이란 고등은 다 싫은 거니까!
어서 시간을 되돌려 중2로 가거나 아니면
반대로 얼른 대학생이 되고 싶습니다.
하루하루 고등학생 공부가 벅차고 또 벅찹니다.
어느 따스한 봄날 한없이 나른한 오후였습니다.
나폴 나폴 나비 한 마리가 날아오네?
수업종이 울려도 꼼짝하기 싫습니다.
채플 시간이라 예배당에 가야하는데 온 몸이 천근만근입니다.
운동장 끄트머리 나무의자에 앉아 꼬박꼬박 졸던 혜자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비를 바라봅니다.
어라? 나폴거리던 하얀 나비가 어느새 노란나비로 변신했나?
아하! 나비가 두 마린 건가?
한 마린 듯 두 마린 듯 생각이 나폴나폴거리더니,
문득 저 가운데 한 마리는 나로구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런 게 호접몽(胡蝶夢)이던가?”
얼마 전 수업시간에 배운 나비꿈 이야기,
호접몽 생각에 혜자의 눈은 점점 더 가물거립니다.
상당히 낯선 풍경에 혜자는 어리둥절합니다.
내가 나비 꿈을 꾸는 건지, 나비가 내 꿈을 꾸는 건지
호접몽 생각으로 나폴거리던 머리가 갑자기 하얗게 텅 비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온 하늘에 번개가 칩니다.
‘여기가 어디지? 분명히 학교 운동장이었는데? 점심시간이 막 지났을 텐데, 왜 이리 깜깜하지?’
혜자가 어리둥절 하는 사이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불쑥 칙칙폭폭 기관차가 지나갑니다.
가만 보니 그건 기관차가 아니라
연기 나는 화덕과 활활 타는 횃불이 갑자기 나타난 겁니다.
그때였습니다.
피비린내가 혜자의 코를 찌릅니다.
어디서 나는 냄샌가 했더니
바로 화덕과 횃불이 지나가고 있는 자리였습니다.(창세기 15:17)
“저게 뭐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던 혜자가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뚱딴지 같이 제 목소리에 제가 놀란 겁니다.
기겁을 한 겁니다.
화덕과 횃불이 지나가는 자리엔
송아지와 염소, 그리고 양이 죽어 있었고,
그냥 죽은 게 아니라 몸통을 각각 길게 반으로 쪼개어
아래위로 나란히 늘어놓은 기다란 기찻길 같은 사이로
불타는 화덕과 횃불이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엽기적인 광경에 놀라기도 전에
정작 혜자가 놀란 건
제 목소리 때문이었던 겁니다.
‘뭐야? 내 목소리가 왜 이래?’
더듬더듬 얼굴을 더듬다가 혜자는 더 놀랍니다.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에 거친 주름이 가득한 얼굴이잖아?
“내가 왜 이래? 뭐야 이 할아버지는?”
“아얏!”
번갯불이 머리에 떨어진 듯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까르르 웃는 아이들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여긴 또 어디람?’
화끈거리는 볼을 쓰다듬으며 부스스 일어나보니
학교 채플입니다.
‘분명히 운동장에 있었는데, 언제 들어왔지?’
정신없이 잠을 자다 벌에 쏘였나 봅니다.
나비처럼 날아와 벌처럼 쏘인 건가?
쭈글쭈글하던 주름은 다 어디 가버리고
혜자 얼굴은 풍선처럼 팽팽하게 부어오르고 있습니다.
어리둥절하고 아프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갑자기 혜자 눈이 말똥말똥해집니다.
채플시간 목사님 설교말씀이 벌처럼 번개처럼 귀에 꽂힌 겁니다.
생전 채플시간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던 혜자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방금 꿈인지 생신지 깜깜한 밤중이었던 거,
피비린내 진동하는 동물 사체 사이로 기관차처럼 지나가던
불타는 화덕과 횃불에다가,
심지어 내 얼굴이 수염 덥수룩하고 쭈글쭈글한 할아버지였던
바로 그 이야기를 지금 목사님이 하고 있는 겁니다.
내 이름, 아니 그 할아버지 이름은 아브람,
아브라함 할아버지의 옛 이름 아브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깜깜한 밤 엽기적인 상황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자손과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
그 약속을 결코 무르지 않으리라 강렬하게 다지는 장면이었습니다.
그게 다 우리 아브람을 도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었다는 걸,
설교가 끝나갈 무렵, 혜자는 환하게 깨달았습니다.
왁자지껄 까르르 떠드는 아이들 사이로
풍선처럼 부푼 볼을 쓰다듬으며 혜자가 타박타박 걸어갑니다.
“혜자 너 예배시간에 졸다가 벌 받은 거야, 벌! 까르르∼!”
수다쟁이 친구들이 벌에 쏘인 혜자를 놀리며 달아나도
혜자의 머릿속은 온통 성경말씀, 설교말씀으로 가득합니다.
생시처럼 생생하게 아브람 할아버지도 되어보고,
상상초월 엽기적인 방법까지 총동원해서 나를 도우시려는 하나님도 만난 겁니다.
나비처럼 꿈꾸다 벌처럼, 번개처럼 깨어나니
혜자는 지금
그토록 고등학생인 게 싫던 기억조차 아련할 뿐입니다.
어서 집에 가서 성경책을 찾아
그 뒤에 펼쳐지는 아브람 할아버지 이야기를 읽어야지,
내가, 아니 아브람 할아버지가 하나님이랑 얼마나 친했는지 얼른 찾아봐야지!
딱 그 생각뿐입니다.
사뿐사뿐 걸어가는 혜자의 머리위로
꽃을 찾아온 벌 나비처럼
하얀 나비 노란 나비 꿀벌 한두 마리가
뱅글뱅글 나폴나폴 춤을 춥니다.
[이정훈 지음. 2019년 3월 17일 주일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