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후 4주 (2017년 7월 2일 주일) 예배준비 노트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창세기 22:11)
[성서일과 4본문]
(창세기 22:1-14)
1.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를 부르셨다.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니, 아브라함은 "예,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3. 아브라함이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나귀의 등에 안장을 얹었다. 그는 두 종과 아들 이삭에게도 길을 떠날 준비를 시켰다. 번제에 쓸 장작을 다 쪼개어 가지고서,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그 곳으로 길을 떠났다.
4. 사흘 만에 아브라함은 고개를 들어서, 멀리 그 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
5. 그는 자기 종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아이와 저리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너희에게로 함께 돌아올 터이니, 그 동안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6.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장작을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챙긴 다음에, 두 사람은 함께 걸었다.
7. 이삭이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그가 "아버지!" 하고 부르자, 아브라함이 "얘야,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이삭이 물었다.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8.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걸었다.
9. 그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곳에 이르러서,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제단 위에 장작을 벌려 놓았다. 그런 다음에 제 자식 이삭을 묶어서,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10. 그는 손에 칼을 들고서, 아들을 잡으려고 하였다.
11. 그 때에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예, 여기 있습니다."
12.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
13.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고 살펴보니, 수풀 속에 숫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다. 가서 그 숫양을 잡아다가, 아들 대신에 그것으로 번제를 드렸다.
14. 이런 일이 있었으므로, 아브라함이 그 곳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는 말을 한다.
(시편 13)
1. 주님, 언제까지 나를 잊으시렵니까? 영원히 잊으시렵니까?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시렵니까?
2. 언제까지 나의 영혼이 아픔을 견디어야 합니까? 언제까지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하여야 합니까? 언제까지 내 앞에서 의기양양한 원수의 꼴을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3. 나를 굽어살펴 주십시오. 나에게 응답하여 주십시오.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나의 눈을 뜨게 하여 주십시오.
4. 나의 원수가 "내가 그를 이겼다" 하고 말할까 두렵습니다.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두렵습니다.
5. 그러나 나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의지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실 그 때에, 나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입니다.
6. 주님께서 나를 너그럽게 대하여 주셔서, 내가 주님께 찬송을 드리겠습니다.
(로마서 6:12-23)
12. 그러므로 여러분은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서, 여러분이 몸의 정욕에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13.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겨서 불의의 연장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14.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15.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다고 해서, 마음 놓고 죄를 짓자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16. 여러분이 아무에게나 자기를 종으로 내맡겨서 복종하게 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복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죄의 종이 되어 죽음에 이르거나, 아니면 순종의 종이 되어 의에 이르거나, 하는 것입니다.
17.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 여러분은 전해 받은 교훈의 본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함으로써,
18. 죄에서 해방을 받아서 의의 종이 된 것입니다.
19. 여러분의 이해력이 미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방식으로 말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의 종으로 내맡겨서 불법에 빠져 있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종으로 바쳐서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십시오.
20. 여러분이 죄의 종일 때에는 의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21. 여러분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거두었습니까? 이제 와서 여러분이 그러한 생활을 부끄러워하지마는, 그러한 생활의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22.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을 받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거룩함에 이르는 삶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23. 죄의 삯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마태복음 10:40-42)
40.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요,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을 의인이라고 해서 맞아들이는 사람은,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성서일과 본문들을 관통하는 알맹이는 ‘두려움’입니다.
구약,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창세기 22:12)
시편,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두렵습니다”(시편 13:4)
서신서, “죄의 삯은 죽음이요”(로마서 6:23)
복음서,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마태복음 10:42)
오늘 요절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입니다.(창세기 22:11)
[구약과 시편본문 정리 (창세기 22:1-14 / 시편 13)] 오늘 구약본문의 주인공은 아브라함과 이삭 두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십니다. “모리아”라는 곳으로 가서 바치라는 말씀에서 문득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시던 첫 부르심이 떠오릅니다. 그때도 다 버렸는데, 지금은 그것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귀한 것, 사랑하는 외아들을 버리라 하십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주님의 명에 순종합니다. 비록 히브리서 기자는, 이삭을 부활시키시리라 믿었다고 해석했지만(히 11:19) 이 해석보다 훨씬 전 아브라함의 첫 마음은 온통 두려움과 혼란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조금 전 이스마엘까지 버렸는데, 이삭까지 버리다니, 게다가 산채로 잡아 번제로 바치다니요!’ 본문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오늘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속이 새까맣게 타버렸을 것입니다. 그의 창자는 조각조각 단장(斷腸)이 되어있었을 것입니다. 지난 주 이스마엘을 버릴 때도,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21:11) 부활의 믿음으로 똘똘 뭉치셨던 예수님조차 끝까지(겟세마네) 고통에 시달리셔야하지 않았습니까?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이 순종은 아브라함뿐 아니었습니다. 부전자전이라더니! 이삭의 순종은 또 어떻습니까? 추측컨대, 그 많은 장작을 짊어지고 산을 오를 만큼 장성한 이삭이 그 늙은 아버지를 피해 도망하지 않고 순순히 묶여 아버지의 칼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란! 오늘 구약본문은 이름 모를 두려움으로 가득합니다. 자식을 바쳐야 하는 아버지의 두려움, 아버지의 낯선 표정과 치켜든 칼날 앞에서 아들의 공포, 그리고 치켜든 아브라함의 칼날에 화들짝 놀라시는 하나님의 마음...(11) 오늘 시편본문은, 추측컨대, 중병에 걸려 죽음의 공포로 떨고 있는 성도의 기도입니다. “언제까지”를 다섯 번이나 반복하며 애태우는 기도입니다.(1-2) 그럼에도 마지막 5-6절에서, 하나님의 한결같으신 사랑을 의지합니다. 아브라함의 시험과는 비교도 안 되겠지만, 성도의 인생은 “언제까지∼”의 애타는 기도의 연속일지도 모릅니다. 사족이지만, 3절의 “나의 눈을 뜨게 하여 주십시오”는 살려달라는 간구이며 동시에, 그래야 ‘여호와이레!’ 한결같으신 하나님 그 사랑을 목격할 수 있으리라는 탄원처럼 느껴집니다. [서신서와 복음서본문 정리 (로마서 6:12-23 / 마태복음 10:40-42)] 오늘 서신서본문의 알맹이는 이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몸의 정욕”(12)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를 바쳐야 한다.(13) 그럴 때, 니골라당(계시록 2:6) 같은 잘못을 피할 수 있다.(15) 나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더 이상 공포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구약본문의 아브라함과 이삭처럼 힘든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분들의 순종 덕분에,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의 순종 덕분에 우리가 나를 하나님께 바치는 길이 매우 쉬워진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를 바치는 것은, 하나님과 점점 더 가까워지고 친해지고 마침내 거룩해지는(19) 지름길입니다. 교회에 나의 물질과 시간을 바치는 것을 넘어서 내 인생 순간순간 만나는 작은이들에게 그것을 바치는 것입니다.(마태 25:40) 그럴수록 나는 시나브로 그분과 가까워지는 천국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본문의 상황은 예수님 제자들이 겪게 될 두려움입니다. 그 수많은 고난에 대해서는, 바로 앞 본문인 지난 두 주간 본문에서 이미 살폈습니다. 걱정이 태산 같을 어린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다독이시며 힘을 주십니다. 예언자나 의인과 같은 큰 제자뿐 아니라 지극히 작은 소자들조차 제자라면 챙겨줄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하십니다. 특히 40절 말씀처럼, 우리를 성자와 성부와 한 몸처럼 묘사하시는 대목이 감동입니다. (이상, 독일성서공회판 해설관주성경 참조) [정리]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던 곳 주변 나라들의 문화는 맏이를 바침으로써 더 많은 자식, 즉 다산(多産)을 약속받는 문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말도 안 되는 문화를, 복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이 탐욕스런 몹쓸 문화를 적어도 그 후손들만큼은 물들지 않도록 아브라함과 이삭이 씻어주었습니다. 성경에 ‘모리아’라는 이름의 땅은 두 번 나옵니다. 오늘 구약본문인 창세기 22:2절과 역대하 3:1절입니다. 이 근거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산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 또는 그 근처 골고다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리아 마지막 순간에 아브라함의 칼을 멈추어 외아들 이삭을 살리셨으나,(창세 22:11) 하나님께서는 골고다 마지막 순간에 외아들 예수를 향한 칼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이상, 독일성서공회판 해설관주성경 참조) 거룩하신 아드님의 순종으로 우리는 생명을 얻었고, 아드님의 부활로 우리는 나를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믿음의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로마 6:13) 무언가에 나를 송두리째 바치는 데는 두려움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합니다. 대의(大義)를 위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 보다 더 힘든 일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작은 자를 위해 나를 바치는 일일 것입니다. 작은 자를 위해 헌신하는 일이 주님께 나를 바치는 일이라는 확신이 점점 짙어가는 것이 바로 아브라함처럼, 이삭처럼 믿음이 자라 마침내 “순종의 종”(로마 6:16)이 되어가는 정도(正道)일 것입니다. 내 순종의 도가 무럭무럭 자라나 마침내, 오래전 다급한 목소리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부르셨던 것처럼 주님께서 내 이름 부르실 날을 내다봅니다.
[말씀동시] 냉수 한 그릇 (이진구 지음. 성실교회 중등부 3학년. 「성실문화」91호)
목이 말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사람을 본다면
당신은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세요.
혹시 알아요?
하나님께 상을 받을지
[말씀시조] 백세에 얻은 아들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91호)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바치거라
청천벽력 그 말씀에 순종하는 아브라함
외아들 바치라시고 먼저우신 하나님
[말씀한시] 구원의 역사는 이렇듯 잔인하나이까? (오세종 지음. 「성실문화」91호)
期頤生獨子(기이생독자) 백세 나이에 낳은 독생자를
上帝要火燔(주요요화번) 하나님이 번제로 바치라 하셨다
執刀將割頸(집도장할경) 칼을 들어 목을 따려 할 때에
主急毋加焚(주급무가분) 주께서 급하게 불태우지 말라 명하셨다
睹羊繫林叢(도양계림총) 수풀에 걸려 있는 저 양을 보아라
其牡代以撒(기모대이살) 그 양을 대속물로 번제를 드렸다
曰今知悉誠(언금지실성) 이제 네 정성을 알았도다.
主兮, 救援之役如此殘酷乎 (주혜, 구원지역여차잔혹호?) 주여. 구원의 역사는 이렇듯 잔인하나이까?
[말씀서예] 창세기 22:14 (오세주 작품. 「성실문화」91호)
[말씀노래] 내 작은 제자들아 (이정훈 작사, 이길승 작곡. 「성실문화」91호)
[본문] (마태복음 10:40-42)
[노랫말]
1. 의인들 받을 상이 고귀하여라, 예언자 받을 상이 아름다워라
의인과 예언자를 영접하는 이, 그들도 이 좋은 상 받을 것이다.
2. 하나님 주시는 상 고귀하여라, 내 제자 섬기는 이 아름다워라
작고 작은 내 제자 영접하는 이, 그들도 이 좋은 상 받을 것이다.
3. 사랑하는 제자여 두려워마라, 내 작은 제자여 외로워마라
작고 작은 너희를 영접하는 일, 이것이 성부성자 영접함이라.
[해설]
본문을 성실교회 이정훈 목사가 다듬었고, 성실문화원 동인이며 찬양사역자이신 이길승 선생이 가락을 붙였다.
[악보] 내 작은 제자들아 (이정훈 작사, 이길승 작곡)
[시편 송서(誦書) 시편 13 (이정훈 다듬음. 「성실문화」91호)
(※ 천자문독송 가락, 즉 전래자장가 가락으로)
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 나이까---∼
2.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5. 나-는 오-직 주-의 사랑-,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다함께]
6. 내-가 여호와-를- 찬--송--,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말씀놀이] (이정훈 지음)
성령강림후 4주(성령강림절 5주) 2017년 7월 2일 (성서일과 본문 낱말 맞추기)
창세기 22:1-14, 시편 13, 로마서 6:12-23, 마태복음 10:40-42
|
|
|
① |
|
|
|
② |
|
|
|
|
|
|
|
|
|
|
|
|
|
|
|
|
|
|
|
③ |
|
|
|
|
|
|
|
|
|
|
|
|
|
|
|
|
|
|
|
|
|
|
|
|
|
|
④ |
|
⑤ |
|
|
|
|
|
⑥ |
|
가로열쇠
①‘여호와(주님)께서 준비하여 주심’이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 할 때 이삭 대신 주님께서 숫양을 예비하여 주신 그곳을 가리켜 아브라함이 ‘○○○○○’라 이름 하였다.(창세기)
②제물을 불에 태워 그 향기(연기)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제사. 즉 성전마당의 ‘○○단’ 위에서 희생이 되는 짐승은 그 가죽과 내장을 제외한 모든 것을 거룩한 불에 완전히 태워 그 향기(연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말한다(레 1:2-9) (가죽은 제사장의 몫이었다, 레 7:8). 이스라엘의 5대 제사(○○,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레 1:1-7:38) 중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또 예배자의 전 인격이 하나님께 바쳐짐을 상징하는 중요한 제사 방법이었다.(창세기)
④말과의 포유류 동물로 한글 표준이름은 '당○○'이다. 당○○는 전 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 분포되어 있고, 키 140~150cm이며 몸무게 350~400kg정도이다. 물자 운반을 위해서 BC 4000년경 아라비아를 중심으로 가축화 되었다고 추측된다. 현재는 성경의 비유 동물학 용어로 남아있을 뿐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에 당○○(donkey)로, 완전히 가축화된 이름으로 쓰인다.(창세기)
⑤노아의 12대 손이요 데라의 아들이며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났다.(갈대아는 지금의 이라크 남부지역으로서, 바벨론이 수도였는데, 뒤에 바벨론 제국으로 컸다. 우르는 이라크 남단 유프라테스 강변 도시로서, 예전 수메르의 도시국가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의 부인 사라에게서 이삭을 낳았다. 그의 형제는 나홀과 하란이며, 그의 조카는 롯이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며,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조상으로 널리 존경받는 인물이다. 이름 뜻은 ‘열국의 아버지’이다.(창세기)
⑥하나님, 임금, 주인, 기타 높은 지위에 있는 이를 부를 때, 그 권위를 인정하는 의미로 쓰던 호칭.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이렇게 부르며, 특히 개역성경의 ‘여호와’를 새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했다. 아람어로 ‘마레’, 헬라어로 ‘퀴리오스’를 이렇게 번역한다.(창세기, 시편)
세로열쇠
①아브라함이 100살에 부인 사라를 통해 얻은 아들. 이름 뜻은 ‘웃음’이다. 주로 농업에만 전념하였기 때문에 아버지 아브라함이나 아들 야곱같이 다사다난한 생활을 하지 않고 비교적 평온하게 살았다. 40세에 리브가와 혼인하여 60세에 쌍둥이 형제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 180세에 사망했다.(창세기)
②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거나 받은 사람이라는 뜻.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 ○○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복음)
③히브리어로 ‘보냄 받은 자’, ‘심부름꾼’, ‘사자’를 의미하는 말을 우리말(한자)로 번역한 것인데, 주로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심부름꾼을 가리킨다. 때때로 이 심부름꾼이 하나님처럼 보일 때도 있다. 이 경우 마치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드러내시려는 듯한 느낌을 준다.(창세기)
④만유의 창조주시며 구원자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성부, 성자, 성령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하느님이라고도 부른다. 천주교식으로 천주(天主) 즉 하늘의 주인, 즉 하늘님이 변해서 하느님이 된다. 그런데 ‘하늘’은 예전에 ‘하날(하ᄂᆞᆯ⟨한ᄋᆞᆯ=큰 알)’이라 불렀던 것에 비추어 하늘님보다 하날님, 즉 ○○○이 더 오랜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천주교와 개신교가 함께 보기 위하여 공동번역 성경은 ‘하느님’으로 뜻을 모았다. ○○○에는 ‘하늘’이란 느낌 외에도 ‘하나’를 뜻하는 느낌도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창세기, 시편, 로마서)
⑤이름 뜻은 ‘높다’ 또는 ‘여호와의 계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오른 산이다(창 22:2). 브엘세바에서 대략 3일 거리(약 80㎞)에 위치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립한 예루살렘의 북동편 언덕과 동일한 곳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대하 3:1). 그렇다면 이곳은 다윗 때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 있던 곳과도 일치한다(삼하 24:16-25).(창세기)
(*「독일성서공회판 해설관주성경」(대한성서공회), 「성경낱말사전」(성도출판사), 인터넷 사전 등을 참고하고 부분 인용했습니다.)
[말씀동화] 나는 칼이다
옛날옛날 한 옛날에, 이것은 호랑이가 칼춤 추던 시절 이야기예요.
나는 칼이다.
작지만 단호하고 예리한 칼.
짐승의 몸에 대기만해도 피가 쏟아진다.
어떤 짐승도 고통 없이 숨을 거두는 칼이다.
그렇다.
나는 짐승을 잡는 칼이다.
아무 짐승이나 잡는 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바칠 번제물만 잡는 칼이다.
하나님의 종, 하나님이 아끼시는 벗(역대하 20:7)
아브라함의 칼.
아브라함의 여러 칼들 가운데서도
가장 소중하고 귀하고 엄중한 칼이 바로 나다.
아브라함의 간절한 마음이 서린 탓인지
언제부턴가 내 몸엔 짐승의 피가 묻지 않는다.
그 많은 피를 쏟아도
내 몸에선 피비린내 한 점 배지 않는다.
이삭이 가쁜 숨 몰아쉬며 물었다.
“아버지,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떨리는 음성이었다.
어두운 음성이었다.
사흘 길을 함께 걸어온 종 둘은 남겨두고
아버지와 단 둘이 모리아 산을 오르는 중이었다.
사흘 내내 아버지는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였다.
하나님께 번제를 바치러 이렇게 멀리 여행한 적도 없었지만,
아버지가 이렇게 긴 시간 내내 말도 없고 잠도 없으신 적은 처음이었다.
물만 마시고, 밥도 제대로 못 먹는 아버지 아브라함!
늙은 아비 아브라함은
나를 들고 불을 들고 산을 오르고 있다.
어느덧 사나이로 자란 이삭은 그 무거운 장작을 혼자 다 짊어지고
저 뒤에서 헉헉 숨을 몰아쉬며 아비 뒤를 따른다.
체력과 정신력이 동시에 바닥난 아브라함은
산위에 오르자마자 쓰러지고
뒤따라온 이삭이 얼른 장작더미를 내려놓고 아비를 부축한다.
“아버지, 이제 물 좀 드시고 쉬세요. 제사 마치고 어서 내려가서 밥도 드셔야겠어요. 잠도 좀 주무시고요...”
마지막 말꼬리를 흐리며 이삭은 등을 돌린다.
아버지의 눈에서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본 것이다.
그건 그냥 눈물이 아니었다.
피눈물이었다.
그 순간 내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내 작은 몸이 떨리며 웅웅 울음소리를 낸다.
번제물 짐승을 바치기 전에 내 몸에 작은 검기(劍氣)가 흐른 적은 있어도
이토록 크게 떨리며 울음소리를 낸 적은 없었다.
도대체 내 몸이 왜 이러는 것일까?
난생처음 우는 내 울음소리 탓일까?
내 주인 아브라함이 얼른 나를 꺼내어 자루를 잡았다.
이어서 한없이 부르르 떨고 있는 내 날에 아브라함은 손을 대었다.
그 순간 나는 기절했다.
깨어보니 세상에나!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이삭은 두 발이 묶인 채 발가벗겨져 있고
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들의 두 손마저 등 뒤로 묶고 있는 중이 아닌가?
이삭은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고
아비는 아들 얼굴 한 번도 쳐다보지 못하고 하늘만 바라본다.
칼자루, 나를 부여잡은 아브라함의 손은 덜덜덜 떨고만 있다.
난생처음 느끼는 내 주인 아브라함의 떨림
아브라함의 그 공포가 내 칼날 끝까지 차오른 순간
난생처음 나는 이름 모를 공포를 느끼며,
나도 모르게 악을 쓰기 시작했다.
“아브라함, 주인님! 정신 차리세요 주인님! 잠깐만 멈추세요!”
그런데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지?
그 순간 여기저기서 악쓰는 소리가 동시에 들리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내가 난생처음 악을 써서일까? 다시 한 번 기절하려는 찰나,
도대체 이건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일까?
하늘에서 나는 소리인지, 아브라함의 소리인지, 아니면 이삭의 소리인지,
그리고 내 목소리까지 마구마구 뒤섞인 소리들이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칼을 멈추라며 악쓰는 소리들이
모리아 산 가득 메아리치고 있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태복음 27:46)
내가 지금 기절을 한 것인지 만 것인지...?
여기가 분명 모리아 산은 맞는데
내 주인 아브라함과 이삭은 간 데 없고,
이삭처럼 발가벗겨진 사내 하나가 손발이 묶여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십자나무 위에 손발이 묶이고
발바닥과 손바닥에 대못이 박혀 있는 것이다.
그건 그 사내가 울부짖으며 내뱉은 소리였나 보다.
대낮인데 어둑어둑 저 멀리 화려한 건물이 보인다.
저긴 번제물을 바치는 성전이 아닌가?(역대하 3:1)
이건 번제물을 잡는 칼의 직감이다.
조금 뒤 다시 큰 소리를 외치고 사내는 숨을 거두었다.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탄식소리가 뒤섞이고...
“아∼!”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도 탄식소리가 흘러나오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군가 내 몸을 꽉 잡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내 날이 누군가를 베었고,
“메헤헤∼”
짧은 외마디소리와 함께 산양 한 마리가 죽어 있다.
순식간에 산양 한 마리가 번제로 살라지고
불타는 제단을 바라보며
내 주인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이 서로서로 있는 힘껏 부둥켜안고
엉엉 울고 있다.
사랑하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아비,
내 주인 아브라함의 눈물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순식간에 모든 것을 느껴버렸다.
하나님께서는 모리아 마지막 순간에 아브라함의 칼을 멈추어
외아들 이삭을 살리셨으나,(창세 22:11)
하나님께서는 골고다 마지막 순간에
외아들 예수를 향한 칼을 멈추지 않으셨던 것이다.
나는 칼이다.
작지만 단호하고 예리한 칼.
순식간에 시간을 쪼개어 2천년 여행을 하고 온 칼이다.
아브라함 보다 먼저 흘리신 하나님의 피눈물!
그 속에 이미 서린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의 보혈을
이 세상 누구보다 예리하게 느끼는
나는 칼이다.
[이정훈 지음. 2017년 7월 2일 주일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