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4주 (2017년 5월 7일 주일) 예배준비 노트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성서일과 4본문]
(사도행전 2:42-47)
42.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43.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44.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45.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46.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시편 23)
1.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2.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3.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4.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5.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6.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
(베드로전서 2:19-25)
19.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20.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 참으면, 그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입니다.
21. 바로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22. 그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23. 그는 모욕을 당하셨으나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이에게 다 맡기셨습니다.
24. 그는 우리 죄를 자기의 몸에 몸소 지시고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매를 맞아 상함으로 여러분이 나음을 얻었습니다.
25. 전에는 여러분은 길 잃은 양과 같았으나, 이제는 여러분의 영혼의 목자이며 감독이신 그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요한복음 10:1-10)
1.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요 강도이다.
2.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양들의 목자이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
4. 자기 양들을 다 불러낸 다음에, 그는 앞서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라간다.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5. 양들은 결코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고, 그에게서 달아날 것이다. 그것은 양들이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6.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7.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다 도둑이고 강도이다. 그래서 양들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나는 그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드나들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
10.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뿐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성서일과 본문들을 관통하는 알맹이는 ‘주의 발자취를 따름이’입니다.
사도행전,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사도행전 2:42)
시편,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시편 23:3)
서신서,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베드로전서 2:21)
복음서, “양들은 그를 따라간다”(요한복음 10:4)
오늘 요절은,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입니다.(벧전 2:21)
[사도행전과 시편본문 정리 (사도행전 2:42-47 / 시편 23)]
오늘 사도행전본문은 최초교회의 생활모습 스케치입니다.
지난주 본문에서, 예루살렘에서 세례 받은 이들로 최초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재산까지 공유할 만큼 혈연보다 진한 공동체를 이룬 것입니다.(44-45)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이들의 생활모습은 행 4:42-47과 5:12-16에 더 자세히 나옵니다.
이 세 본문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표적입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시킬 만큼, 사도들의 말씀과 행동에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교회는 마음밭이 기경(起耕)되어 경외심과(43) 순전함과 기쁨이 차오릅니다.(46)
그리하여 참 양처럼, 재산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목자만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시편본문의 주제는 ‘좋은 목자’입니다. (마침 이 주제는 오늘 복음서본문과 통합니다.)
이 시편에서 유념해야 할 부분은 일생 중 고난의 때입니다.(4-5)
이때가 바로 “새 힘을 주시고”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실(3)
참 목자를 절실히 만날 기회입니다.
이때가 바로 목자이신 주님에 대한 신뢰와 의탁, 즉 믿음이 자랄 절호의 기회입니다.
[서신서와 복음서본문 정리 (베드로전서 2:19-25 / 요한복음 10:1-10)]
오늘 서신서본문은 종(하인)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권면의 말씀입니다.
이들의 남다른 고통은 오히려 주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기회입니다.
예수님 고난의 발자취를 따르는 길이(21) 바로 의의 길, 은혜로 이르는 길입니다.(24)
지금까지 길 잃은 양과 같은 우리가 참 목자 예수님을 만나 길을 찾았습니다.(25)
오늘 복음서본문의 주제는, 오늘 시편본문처럼 ‘좋은 목자’입니다.
(오늘본문 바로 다음 구절에 보면) 좋은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15)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내 양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길, 즉 바른 길 생명의 길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님 당신입니다.
(다음 주 본문인 요 14:6절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목자를 넘어 아예 자신을 양문(羊門)에 비긴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만큼 양을 아끼시는 참 좋은 목자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정리]
오늘 4본문은 공통적으로 ‘주의 발자취를 따르는’ 길을 보여줍니다.
그 발자취는 약자들, 내 양떼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목자의 길을 가신
예수님의 발자취입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는 바른 길, 의의 길이요,(시 23:3, 벧전 2:24)
참 생명의 길입니다.(요 10:10)
그 길은 고난의 길이지만(벧전 2:21), 선한 길이요 살림의 길입니다.
그 길, 예수님의 발자취는 교회가 가야 할 길입니다.
그 길의 끝은 약한 자들이 평화롭게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입니다.
내일은 어버이날입니다.
내 목숨처럼 자식 사랑하신 어버이의 발자취를 돌아보며
한 번 더 참 좋은 목자이신 예수님 사랑을 절감하는 날입니다.
모레는 대통령선거일입니다.(2017년 5월 9일)
늑대가 아니라, 이 나라의 목자를 뽑는 날입니다.
참 종의 도를 보이신 예수님을 닮은 사람,
예수님의 십자가 발자취를 따를 수 있는 사람을 택하여 세우는 날입니다.
[나머지]
* 야누슈 코르착
최근에 동영상으로 본 야누슈 코르착의 삶이 기억납니다. 소아과 의사였다가 유대인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 원장이 된 그는 나치가 유대인 고아들 모두를 가스실로 끌고 가는 과정에서, 자신은 몇 차례 살 기회가 있었음에도, 끝까지 고아들을 버리지 않으려 죽음의 길을 갔습니다.
아이들이 놀라지 않도록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마치 소풍을 가듯 노래 부르며 행진했습니다. 행진하면서 자신의 열 손가락을 펼쳐 나이 어린 아이들이 하나씩 붙잡게 했습니다.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요한 10:15) 예수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인 히틀러 나치는 고아들을 죽이는 늑대가 되고, 유대인인 코르착은 오히려 참 목자 예수를 닮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 이웃들은 한국교회에서 참 좋은 목자 예수님의 향기를 느끼고 있을까요?
** 나는 예수님의 양(羊) 맞나? (이하 3년 전 것 다듬어 옮김)
지난 화요일 밤 기도회 때 저희 집 둘째 진구가 날카로운 질문을 합니다. 오늘 요한복음 10:3∼5절에 보면 연거푸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고 하셨는데, 왜 지난 주 엠마오 제자들은 예수님과 대화하면서도 예수님을 못 알아보았느냐는 것입니다.
‘엠마오 제자들이 예수님의 양이 아니었나요?’
이것이 진구 질문의 핵심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자들이 처음에는 양으로서 2%(또는 20%) 부족했지만, 부활예수님 만난 뒤부터 점점 100%에 가까운 양이 되어갔을 것이다. 처음에는 염소끼가 있었지만, 점점 염소끼가 빠지고 온전한 양이 되어 간 게 아니었을까?”
[그런데 우리는 염소를 산양(山羊)이라고도 부릅니다. 양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양과 염소는 염색체 숫자도 다를 정도로 차이가 많습니다. 양은 염소와 달리 맹수나 산불 등 위기상황에서 얼른 도망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목자가 어디 계시나 살피며 풀을 뜯는 편입니다. 그러나 염소는 양과 달리 풀보다 나뭇잎을 더 좋아하는 잡식성입니다. 목자를 살피는 것 같지도 않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염소는 독립심과 모험심이 강하고 생존능력도 양에 비해 강하기 때문입니다. 염소는 양에 비해 뭉치기를 싫어해서 숫자가 많아지면 금세 몇 마리씩 나뉘는 습성도 있습니다... (인터넷 여기저기서 참조)]
문제는 ‘내가 양이 맞나?’입니다. 돌아보면, 나는 양보다는 산양(염소)에 가깝습니다. 양처럼 풀(말씀)만 먹는 것이 아니라, 염소처럼 이것저것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잘도 먹습니다. 그래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주님 말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말씀에 귀 기울이는 정성이 약합니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말씀을 통해서, 세상사를 통해서 내게 다급히 외치시는 그분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편입니다. 우리도 엠마오 제자들처럼, 어서 부활예수님 제대로 만나 진짜 양으로 변해가야 합니다. 날이 갈수록 점점, 이게 참 급한 문제라는 생각이, 더 미뤄둬서는 안 될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 ‘목자여’
교회는 참 목자 예수님을 따르는 양이면서, 동시에 주님을 머리로 한, 이 시대의 목자입니다. 박재봉 목사님이 쓴 이 찬송시는 새 찬송가 개편 때 당연히 실려야 했던 한국인이 지은 최초의 찬송가입니다. 한국교회 목사와 교사들에게 가사가 너무 무거워서 싣기 어려웠다는 후문입니다.
목자여 (박재봉 작사, 장수철 작곡)
1.저목자여 깊은잠을 어서 깨어라 / 밤은벌써 사라지고 먼동이 터온다
희미하던 지평선도 완연해오니 / 목자들아 양을몰아 가야하리라
2. 금빛같은 새벽놀이 비낀 저언덕 / 신기하게 이슬맺힌 푸른 저초원
신선하고 거룩하다 내목장이니 / 목자들아 양을몰아 그리로 가자
3. 비탈길을 싸고돌제 다리 아프고 / 산마루를 올라갈때 숨이 막혀도
주린양떼 생각하여 참고 갈지니 / 양을치는 참목자의 장한 뜻이라
4. 몸에걸친 단벌옷이 내게 족하고 / 짚고나선 지팡이가 넉넉하여라
이제내게 다른염려 아주 없으니 / 이한날을 목장에서 양을 치리라
[말씀동시] 양떼들 (이선구 지음. 성실교회 청년부. 「성실문화」90호)
예로부터 양들은 낮은 울타리 안에서 살았기에
온갖 도둑이 들고나며 양들과 섞일 수 있었다.
그러니 닫혔던 문 열리며 목자가 들어와도
탐욕에 찌든 목소리가 익숙한 양들은 달아나기 바빴다.
그러나 목자 목소리를 기억하는 양들은 남아서
목자가 주는 꼴을 먹으며 행복하게 살았더라.
[말씀시조] 회개하고 힘껏배워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90호)
회개하고 힘껏 배워 기도하며 친교하니
탐욕이 달아나고 모든 재산 공유하네
날마다 향기로워라 온백성이 교회로
[말씀한시]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임했다 (오세종 지음. 「성실문화」90호)
天開靈臨瑪可樓(천개령림마가루) 마가의 다락방에서 하늘문이 열리고 성령이 강림했다
恒守祈禱又交餠(항수기도우교병) 기도하고 교제하며 늘 같이 떡을 나누며
所有公同會居欣(소유공동회거흔) 소유는 공동으로 하고 같이 지내니
日增勝友讚美頌(일증승우찬미송) 승우(勝友)가 날마다 증가하며 주님을 찬양했다.
[말씀서예] 사도행전 2:47 (「성실문화」90호)
[말씀노래] 나는 목자, 나는 양의 문! (이정훈 작사, 이석훈 작곡 「성실문화」90호)
[본문] (요한복음 10:1-10)
[노랫말]
1. 나는 목자다 양먹이는 목자로다 / 양의문 드나들며 양을치는 참목자다 /
나는 내양이름 낱낱이 알고있고 / 양들은 내목소리 환하게 알고 있다
2. 나는 문이다 양(이)다니는 양문이다 / 양들이 드나들며 꼴을얻는 양(의)문이다 /
누구나 나를통해 구원얻고 꼴을얻고 / 누구나 나를통해 참생명을 구하노라
[해설]
본문을 성실교회 이정훈 목사가 다듬었고, 문화원 동인인 종로교회 이석훈 목사님이 가락을 붙였다.
[악보] 나는 목자, 나는 양의 문! (이정훈 작사, 이석훈 작곡, 2014. 1)
[시편 송서(誦書)] 시편 23 (이정훈 다듬음. 「성실문화」90호)
(※ 천자문 독송 가락, 즉 전래 자장가 가락으로)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주--의--)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말씀놀이] (이정훈 지음)
부활절 4주 2017년 5월 7일 주일 (성서일과 본문 낱말 맞추기)
사도행전 2:42-47, 시편 23, 베드로전서 2:19-25, 요한복음 10:1-10
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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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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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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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
가로열쇠
①여호와께서 구해주신다’는 뜻을 가진 히브리 낱말인 여호수아(예수아)의 헬라 말 이름이다. 인류의 구세주시며, 거룩한 아드님이신 하나님, 곧 성자(聖子)하나님의 이름이시다.(요한복음)
②폭행이나 협박 따위로 남의 재물을 빼앗는 도둑. 또는 그런 행위.(요한복음)
③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임재하시는 집이고,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드리는 공식적인 집. ‘예루살렘 ○○’은 모리아 산에 세 차례에 걸쳐 지어졌다. 첫째 것은 솔로몬이 세웠고, 둘째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뒤 스룹바벨이 세웠다. 셋째는 헤롯 대왕이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증축했는데, B.C. 20년부터 A.D. 64년까지 공사하여 완공했으나, A.D. 70년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함께 불타버렸다. ○○은 인류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구세주 예수님,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신 예수님을 예표하는 일종의 그림자 역할을 한다(요 2:21). 또한 주님의 몸 교회를 가리켜 ○○이라고도 한다.(고전 3:17) (사도행전)
④양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하고 맹수나 도둑으로부터 양을 보호하는 자. 그들은 때때로 밤을 낮 삼아 양을 지키기도 하며(눅 2:8), 심지어 위험한 지경에서는 양들을 위해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희생적 노력을 다한다(요 10:11-17). 그들은 맹수의 공격을 물리치기 위해 지팡이와 막대기(슥 11:15), 물매 등을 지니고 다녔다(삼상 17:40). ○○와 양의 이런 관계 때문에 ○○는 비유적으로 당신의 백성을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혹은 백성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지도자들’을 가리키기도 했다. 그리고 그릇된 지도자의 폭정에 시달리는 백성을 일컬어 ‘목자 없는 양’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마 9:36). 신약성경에서 ○○는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택한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시며 또 그 백성을 영생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또한 그분이 세우신 교회를 돌보도록 사명을 부여받은 교회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시편, 베드로전서, 요한복음)
⑤‘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의 헬라어(=희랍어=그리스어)이며, 히브리어로는 ‘메시야’라고 한다. 예수님을 가리킨다.(베드로전서)
⑦만유의 창조주시며 구원자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성부, 성자, 성령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하느님이라고도 부른다. 천주교식으로 천주(天主) 즉 하늘의 주인, 즉 하늘님이 변해서 하느님이 된다. 그런데 ‘하늘’은 예전에 ‘하날(하ᄂᆞᆯ)’이라 불렀던 것에 비추어 하늘님보다 하날님, 즉 ○○○이 더 오랜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천주교와 개신교가 함께 보는 성경은 ‘하느님’으로 뜻을 모았다. ○○○에는 하늘의 느낌 외에도 ‘하나’를 뜻하는 느낌도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사도행전, 베드로전서)
세로열쇠
②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는 따위의 나쁜 짓을 하는 사람.(요한복음)
④1. 목구멍에서 나는 소리. 2. 의견이나 주장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요한복음)
⑥‘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서, 그를 보낸 사람으로부터 임무수행을 위한 모든 권리를 받는다. 성경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이 단어가 예수님의 12제자에게 쓰였고 바울서신에서는 바울을 가리키는 명칭으로도 쓰였다.(사도행전)
⑦하나님, 임금, 주인, 기타 높은 지위에 있는 이를 부를 때, 그 권위를 인정하는 의미로 쓰던 호칭.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이렇게 부르며, 특히 개역성경의 ‘여호와’를 새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했다. 아람어로 ‘마레’, 헬라어로 ‘퀴리오스’를 이렇게 번역한다.(사도행전, 시편)
(*「독일성서공회판 해설관주성경」(대한성서공회), 「성경낱말사전」(성도출판사), 인터넷 사전 등을 참고하고 부분 인용했습니다.)
[말씀동화] 코르착 할아버지의 귀천(歸天)
옛날옛날 한옛날에, 이것은 호랑이가 봄 소풍 가던 시절 이야기예요.
야누슈 코르착 할아버지가 잠든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할아버지 하얀 수염 끝이 따스한 미소로 반짝입니다.
순간 할아버지 눈빛이 반짝이더니
이내 책상으로 가서 공책을 펼칩니다.
코르착 할아버지는 동화작가입니다.
어린이들에게 재미있는 세상을 보여주려고 늘 동화를 씁니다.
원래는 소아과 의사선생님이었는데
깔깔깔 웃음소리를 잃어버린 유대인 고아들을 위하여 고아원 원장님이 되었습니다.
코르착 할아버지는 어린이가 세상의 보배라는 비밀을 일찍 알아챈 분입니다.
어린이들의 눈동자가 진짜 보배처럼 반짝반짝 빛나도록
고아원에 어린이 공화국을 차렸습니다.
어린이들이 원하는 음식을 선택할 수 있고, 원하는 공부도 할 수 있게 도왔습니다.
어린이가 더 건강해지고 더 행복해지고, 더 많이 웃을 수 있는 길은
아름다운 꽃을 보고 신비로운 곤충을 관찰하는 것보다도 먼저
어른들이 아름다워지고, 어른들이 행복해지고, 어른들이 향기로워지는 길이라는 걸
알아챈 분이 바로 코르착 할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세상 어른들은 모두 코르착 할아버지 같지만은 않았습니다.
쿵쿵 일부러 발자국 소리를 크게 내며 걷는 총을 든 군인들만 늘어갔습니다.
천둥소리처럼 요란한 장갑차를 몰고 다니는 군인들만 늘어갔습니다.
고아원 아이들은 할아버지의 동화를 아주아주 좋아합니다.
아이들이 이상한 어른들 세상을 보며 무서워 떨지 않도록,
코르착 할아버지는 이상한 어른들의 세상, 그 상처투성이 속에 숨어 자라는 진주들을
반짝반짝 재미난 동화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할아버지가 지은 꽃과 나무, 곤충과 동물 이야기도 좋아합니다.
아이들은 할아버지가 지은 신비로운 이야기 「마술사 카이투스」도 좋아합니다.
아이들은 할아버지가 지은 옛날이야기는 모두모두 다 좋아합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옛날이야기 해주세요 네?”
오늘도 고아원 막둥이들은 코르착 할아버지 뒤를 졸졸 따라다닙니다.
마치 맑은 시냇물처럼 재잘거리며 졸졸졸 따릅니다.
할아버지 뒤를 따르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돌아보면서
코르착 할아버지는 문득 성경말씀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시편 23:1-3)
코르착 할아버지 하얀 수염 끝이 다시 한 번 밝은 미소로 반짝입니다.
코르착 할아버지의 동화, 그 이야기보따리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합니다.
아마 오늘은 양떼를 이끄시는 목자 이야기를 쓰시려나 봅니다.
“쿵쿵, 쿵쿵쿵”
누군가 요란하게 고아원 문을 두드립니다.
늑대 같은 히틀러가 나치 몽둥이를 들고 찾아온 것입니다.
히틀러는 유달리 유대인 고아들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도 남김없이 가스실로 보내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난데없는 소나기처럼 심술궂은 군인들이 뿔난 몽둥이처럼 쿵쿵거립니다.
온 세상이 먹구름으로 가득하더니 드디어 소나기가 쏟아지려나봅니다.
고아원 선생님들은 코르착 할아버지께 얼른 소나기를 피하시라고 합니다.
그러나 코르착 할아버지는 사랑하는 어린이들을 두고 피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총을 든 군인들이 가시돋힌 몽둥이를 든 뿔난 도깨비들 같습니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고아들을 바라보며 코르착 할아버지가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놀라지 말고 나를 따라 오너라. 심술쟁이 거인을 피해서 우리 모두 소풍을 가자꾸나.”
코르착 할아버지는 군인들에게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부탁하십니다.
그리고 고아들에게 가장 좋은 외출복을 입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고아원 아이들과 함께 기차역으로 행진을 시작합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합창하며 행진합니다.
‘기차길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잔다, 칙 폭 칙칙폭폭 칙칙폭폭칙칙폭폭 기차소리 요란해도 아기아기 잘도 잔다. 기차길옆 옥수수밭 옥수수는 잘도 큰다, 칙 폭 칙칙폭폭 칙칙폭폭칙칙폭폭 기차소리 요란해도 옥수수는 잘도 큰다’ (‘기차길옆’ 윤석중 작사, 윤극영 작곡)
코르착 할아버지는 고아원 막둥이들이 놀라지 않도록 손을 잡아 줍니다.
여러 아이들이 한 번에 코르착 할아버지 손을 잡을 수 있도록
열손가락을 부채처럼 펼칩니다.
막둥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너도나도 할아버지 손가락을 잡습니다.
코르착 할아버지를 풀어주라고 군인 대장이 명령합니다.
그러나 코르착 할아버지는 그 명령을 듣지 않습니다.
어린 양 같은 고아들을 끝까지 지키려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문득 성경말씀 한 구절을 읊조립니다.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 (시편 23:4-6)
코르착 할아버지 이마에 땀방울이 흘러내립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할아버지도 무섭고 떨리지만, 이 성경말씀을 읊조리며 힘을 얻습니다.
양떼 같은 유대인 고아들도 코르착 할아버지 손가락을 붙잡고 힘을 얻습니다.
세월이 흘러, 시냇물처럼 흐르고 흘러
코르착 할아버지의 동화집이 흘러흘러, 여러 나라로 흘러들어갑니다.
소풍을 마치고 주님의 집으로 돌아간 코르착 할아버지와 고아원 아이들을 그리며
너도나도 노래를 부릅니다, 너도나도 눈물을 흘립니다.
너도나도 시를 짓고, 동화를 짓고, 그리고 어린이 속에 감추인 보배를 이야기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귀천歸天’ 천상병 지음)
[이정훈 지음. 2017년 5월 7일 주일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