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후 제4주 (한정훈)
1.
네 본문을 아우르는 열쇠말을 '유형화'라고 생각했다. 사람 위에 사람이 있는가? 사람 아래에 사람이 있는가? 태생적으로 열등한 인간, 우월한 인간이 있는가? 없다고 하는데 왜 역사와 사회에는 계급이 존재하는가? 이런 질문들을 하게 됐다.
2.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왕을 원했을 때 사무엘은 기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왕이 제멋대로 백성들의 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왕을 세워달라는 요청이 사무엘을 거절한 행위이기 전에 자신을 거절하고 물리치는 것임을 지적하셨다.
구약 본문은 열왕기상 21: 1 - 10,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뺐는 아합과 이세벨 이야기이다. 법을 비웃는 부자-혹은 권력-들을 생각했다. 아합왕은 정당한 이유로 거절당한 자신의 욕망을 인정하지 못하는 존재이고, 이세벨은 다른 사람의 필요를 넘어선 부적절한 욕망을 채워주는 존재이다. 자신도 어떤 욕망의 충족을 기대했겠지 싶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적실하게 들어맞는 세상이다. 좀 더 나아가서 용산 참사, 강정, 밀양 송전탑 등이 떠올랐다.
3.
시편 본문은 시편 5: 1 - 8, 아침에는 희망만 있다는 말을 인상 깊게 들은 기억이 있다. 시인은 아침에 아무도 모르는 답답한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3절에 ‘바라다’(문자적으로는 ‘망보다’)는 (제사장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대답을 긴장하여 기다린다는 뜻이다(독일 성서 공회 해설 참조). 아침은 하나님의 대답을 긴장하여 기다리는 시간일 때 희망이다. 밤새 고민하고 씨름하며 기도했는지 자고 아침에 일어나 기도했는지 모를 일이지만 하나님의 대답은 기다리는 시간이기에 아침은 완전한 희망이다.
기도하면서 고백하는 하나님은 ①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② 악과 함께 머물지 못하시며 ③ 오만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④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고 ⑤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⑥ 피 흘리기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미워하시는 분이시다. 피 흘리기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 즉각 이세벨이 떠오른다. 시인은 기도 끝에 확신을 갖는다. 회개하지 않은 죄인은 들어갈 수 없는 성소에 자기는 머물 수 있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한다(독일 성서 공회 해설 참조).
4.
신약 본문은 갈라디아서 2: 15 - 21, 훌륭한 율법 체계를 가지고 민족의 정신적 기반을 다졌다고 해서 태생적으로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갈라디아서 본문은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을 보면서 도움을 받는다.
좋았던 부분은 ① 나는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고심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율법의 사람”이 되기를 포기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② 내가 율법을 준수하거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종교로 되돌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격적으로 누리는 자유를 송두리째 포기하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③ 하나님과의 생생한 관계가 율법을 지킴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리스도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됩니다.
태생적인 서열의식이 본성처럼 의식에 밴 사람만큼이나 가시적인 서열화에 익숙한 사람도 문제다. 지키는 사람, 지키지 않는 사람, 유형화된 틀을 가지고는 사람을 볼 수 없다. 설명되지 않는 (소중한) 부분이 있다는 진실을 놓치기 쉽다. 사람을 순간 포착한 사진으로는 사람을 사람으로, 영혼을 영혼으로 대할 수 없다.
5.
복음서 본문은 누가복음 7: 36 - 8: 3, 개인적으로 가장 공감가는 본문이다. 예수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은 이 여인의 심경 변화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깊은 공감이 된다. 여인의 감정을 무어라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불쾌하거나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라 설움과 감격이 뒤섞인 긍정적인 격정을 경험하고 있다. 힐링이 유행인데 이 여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진정한 힐링이다.
사람은 누구나 겉으로 보이는 것을 보기 쉽다. 그래서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유향화하고, 때로 서열을 매기기도 한다. 오랫 동안 예수의 얼굴을 코가 오똑한 백인 남성으로 이해했다. 다른 얼굴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 미남이 역사적 예수의 얼굴과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미지는 영향력이 오래 간다.
구원이 존재의 문제라면, 겉모습만 보는 눈으로는 구원을 볼 수 없다. 내면의 눈을 떠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