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후 제3주 (한정훈)
1.
먼저 간단한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저는 전라도 광주에 삽니다. 이름은 한정훈이고, 전도삽니다. 제가 맡은 부서는 청년회인데 토요일 저녁에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저는 약 2년 정도 전부터 성서일과를 가지고 설교 본문을 정했습니다. 그렇지만 네 본문을 다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이번 년도부터이고, 이전에는 넷 중에 하나만 선택했습니다.
네 본문을 한 맥락으로 통하게 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렇지만 꾸준히 시도하고 있습니다. 예배가 토요일에 있지만 본문은 주일 본문을 선택합니다.
이렇게 간단히 소개를 마치고, 이번 주 설교 준비 일지를 공유하겠습니다.
(쓰다 보니 글이 상당히 길어지네요. 매번 이렇게 할 마음으로 쓴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네 본문을 따로따로 묵상한 것을 글로 옮겨 봤고, 뒤에는 설교를 어떤 맥락으로 구성했는지 요약했습니다.)
2.
본문 묵상
열왕기상 17 : 8 - 16
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10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11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12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3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5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낮은 데서 피어나는 희망>
스태니슬라우스 케네디 수녀가 이런 말을 했다. “희망은 인간의 유한함을 깨닫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희망은 인간의 삶이 마지막 순간까지 아름답고 의미 있는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우물>
엘리야는 권력에 주눅 들지 않고, 비타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다. 그러나 그는 약자일 뿐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맏뜻이 있다 하여 당장 삶이 전복되는 것이 아니다. 아래로부터, 바깥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엘리야를 이방 땅으로, 가장 소외받고 극도로 가난한 과부에게로 보냈다. 그녀의 단순한 베풂으로 생명을 얻었고, 이로써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졌다. 가장 바깥에서, 가장 낮은 곳에서 피어난 삶의 의미는 이제 어느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견고한 확신으로 자라게 된다. 그는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고, 비를 내리게 하고, 540명과 권력에도 물러서지 않을 희망을 얻었다.
엘리야는 악한 왕 아합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도전장을 던졌다.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없을 거라는 확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2) 하나님의 말씀은 그에게 숨으라고 명령하신다(3). 도피할 수밖에 없는 약자일 뿐이다. 확신과 장밋빛 미래를 뒤로 하고, 엘리야는 시돈 땅으로 간다.
그는 사르밧에 이르러 땔감을 줍는 한 과부를 만나게 된다. 어떤 감정이었을지 추측할 수밖에 없지만 아마도 비참함과 거절감을 느끼면서 부탁했을 것이다. “물 좀 주십시오.”(10) 알았다고 물을 뜨러 돌아서는 그녀를 불러 세우면서 다시 하기 힘든 부탁을 꺼낸다.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주십시오.”(11) 순간 머리속으로 지난 아합에게 호통을 치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 그때는 얼마나 당당했던가. 나는 얼마나 확신에 찬 사람이었던가.’ 그러나 지난날에 대한 자부심이 클수록 지금은 더욱더 초라하다. 차마 배가 고프다는 말이 나오질 않아 물을 달라했지만 자존심보다 삶에 대한 갈망이 더욱 간절했다.
그런데 여인 또한 간절하다. “당신 처지가 딱해서 먹을 것을 내오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방금 땔감을 주어다가 아들과 마지막 떡을 만들어 나누어 먹고 나면 죽음을 기다려야 합니다. 저는 가진 게 없는 여잡니다. 하나님이 더는 저를 돌보시지 않으시나 봐요.”(12) 엘리야는 귀를 의심했다. ‘하나님? 하나님이라고? 유대 땅에서조차 모두 다 바알 앞에 무릎을 꿇는 세월인데, 지금 시돈 사르밧의 이 이방 여자가 ‘하나님’이라고?’ 엘리야는 알 수 없는 위로를 느꼈고, 다시 한 번 삶에 대한 확신이 일어났다. “나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듣고 여기로 왔습니다. 당신이 그 마지막 떡으로 나를 먼저 먹인다면 하나님께서 결단코 당신과 아들을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확신합니다. 당신 통에 가루와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14-16)
정말 엘리야의 말대로 됐다. 과부는 소중한 마지막 양식을 이 굶주려 있던 낯선 유대인에게 주었고, 그녀와 아들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살았다. 확신에 차 왕 앞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엄중한 경고를 할 만큼 당당했던 선지자는 자신이 품은 비전과 전혀 상관없는 도피 생활을 해야 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무력감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때때로 두려움에 시달렸고, 또 자신이 품었던 이상이 헛된 꿈처럼 느껴져서 정신이 아득해졌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뤄졌다. 약속한 바와 같이 과부를 만났고, 그녀의 가족을 통해 가뭄을 견뎠다. 왜 시돈 땅 사르밧 사람 그것도 과부에게서 도움을 받아야 했을까? 그토록 결기가 드센 하나님의 선지자가 왜 이 나약하고 부서질 것 같은 이방 과부에게서 도움을 받아야 했을까?
시편 146 : 1 - 10
1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2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3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6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7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8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9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10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
<과부를 붙드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라>
성령강림 후 제 3주 성경 네 본문을 한 데로 묶어 주는 전주곡 형식의 노래로 생각된다. 우선 갈라디아서 말씀과 짝을 이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꾸준히 자신의 일을 하신다. 하나님은 검질기게 자신의 길을 가신다.
이사야 55장 6-9절 말씀에 '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같이 말씀하신다.
때로 하나님의 길이 사람의 길로 오해될 때가 많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계획하고 실천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을 담아내지 못할 때가 많다. 사람의 생각은 죽음과 함께 소멸하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의 생각은 역사를 넘어 닦이고 닦여 마침내 드러난다. 그 길로 다니는 사람만이 구원을 얻는다.
사람은 인생에서 부귀(富貴), 영달(榮達), 영화(榮華)를 꿈꾼다. 따라서 같은 꿈을 꾸는 사람끼리 패를 짓고 서로를 의지하거나 서로의 이익을 위해 다툰다. 정당 정치인, 직업 정치인에게서 이런 모습을 분명히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길은 억눌린 사람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고,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고, 나그네를 보호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붙드는 길이다. 이 길은 쉼 없이 닦여 왔다. 하나님이 의지를 가지고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 개인적으로는 자긴 인생을 단 번에 업그레이드 시켜줄 귀인을 의지할 때가 많다. 이미 자신의 업적을 이룬 사람에 기대어 자신의 역량을 훌쩍 뛰어넘는 일을 하고 싶을 때가 많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자기 인생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 삶을 지지하시고, 나를 먹이신다는 사실, 나를 빚으신다는 사실을 믿고, 자기 호흡으로 자기의 길을 걸어야 한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길을 걷는지 성찰하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조율하면서 그렇게 해야 한다.
언제나 문제는 믿음이다. 하나님 안에서 내 삶을 확신할 수 있는가? 다른 의지 없이 자기 삶을 긍정할 수 있는가? 이 믿음에 뿌리를 내리고, 고유한 삶의 영역, 고유한 삶의 리듬이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거기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허락한 자신의 삶에서 춤추고, 노래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두려움에 주도권을 빼앗겨 확신과 희망을 놓쳐버릴 수 있다. 끈질기게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비끄러매야 한다. 예레미야 29장 11절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어쨌든 이번 네 본문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단어는 '과부를 붙드시고' 이다. 하나님의 뜻과 길이 또 하시는 일이 어떤 색깔을 띄고 있는지 이 단어를 통해 알 수 있다.
갈라디아서 1 : 11 - 24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21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23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다>
바울이 전하고 싶은 내용은 단순하다. 누가 시켜서 이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신의 삶이 갑자기 변하고, 또 뒤바뀌게 된 것은 하나님의 개입 때문이지 사람의 개입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자기가 열심이 있던 전통, 교회를 없애려던 강인한 의지 등을 단번에 포기하고, 그뿐만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게 된 것은 누구의 부탁-또는 거래-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명령하셨다는 사실을 전하려고 한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를 함께 읽고, 도움을 얻었다.
친구 여러분, 아주 단호하게 말씀드립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위대한 메시지는 그저 인간의 낙관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전통으로 물려받은 것도 아니고, 어떤 학파로부터 배운 것도 아닙니다. 나는 그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았습니다. 나는 그 메시지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전에 유대인의 방식대로 살 때 어떻게 행동했었는지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철저히 파괴하려고 했습니다. 내 조상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 어찌나 열성을 다했던지, 그 면에서 나는 내 동료들보다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하나님은 나를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내가 아직 모태에 있을 때, 그분은 너그럽게도 나를 택하시고 불러 주셨습니다! 그분은 내게 개입하시고 자기 아들을 나타내 보이셔서, 나로 하여금 기쁜 마음으로 그 아들을 이방인에게 알리게 하셨습니다.
나는 부르심을 받자마자-내 주위의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과 의논하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도 않고-곧장 아라비아로 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다마스쿠스로 되돌아갔고, 삼년 후에 베드로와 함께 내가 전하는 이야기를 서로 비교해 보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머문 기간은 고작 보름 정도였으나, 거기서 지낸 시간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나는 우리 주님의 동생 야고보만 만났을 뿐 다른 사도들은 구경도 못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하는 이 말은 절대로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 후에 나는 시리아와 길리기아에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활동한 뒤에도, 나는 유대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전에 우리를 박해하던 사람이 이제는 자기가 없애 버리려던 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소문만 떠돌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나에 대해 보인 반응은, 나로 인해 하나님을 알아보고 그분을 경배한 것이었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511-512)
어떤 종류의 거래도 어떤 종류의 인간적인 지시도 없다. 다만 자기 인생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제까지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들었을 뿐이다. 바울은 줄곧 이 말을 한다. 사람에게서 난 것은 반드시 사람에게 쓸모 있어야 한다. 세상 이치는 냉정하다. 사람들은 어떤 거래가 있지 않고서야 그 살기등등하던 바울이 이렇게 180도 달라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아니라고 말한다.
두 번째 삶은 (자긴 자신도 포함해서)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삶이 아니다. 이제 그런 삶은 잃어버렸다. 이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게 내 삶의 유일한 목적이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두 번째 삶은 보다 근본적인 삶이다. 살면 살수록, 걸으면 걸을수록 깨닫는다. 나는 원래 이 삶을 살아야 했는데 이제까지 엉뚱한 삶을 살았구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열정의 정도로 평가할 수 없다.
누가복음 7 : 11 - 17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라
<예수와 함께 가는 길>
청년의 죽음. 죽은 자는 청년이었다. 우리는 살아있는가? 우리는 지금 살아서 예수의 행렬에 참여하고 있는가? 죽어서 슬픔이 된 자인가?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 일어나자 청년이여, 예수의 음성을 듣고 깨어나자!
두 무리가 만난다. 죽음의 행렬과 예수의 행렬이다.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운명이었을까? 살다보면 지나치지 말아야 할 슬픔을 만나게 된다. 예수는 그 무리 가운데 의지할 곳 없는 한 여인, 과부를 보셨다. 그리고 울지 말라 하신다.
과부의 아들은 청년이다. 예수는 말한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청년의 죽음은 과부의 슬픔이고, 많은 사람들의 슬픔이다. 자, 이제 일어나자, 예수의 음성을 듣고 살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 우리의 믿음이 돼야 한다. 예수의 꿋꿋하게 혼자라도 걸어야 할 길이지만 동시에 여럿이 함께 걸어야 할 길이다. 일어나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길을 가자!
4.
거칠게 정리 하면,
1) (시편 말씀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길과 사람의 길이 다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길을 가신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구절은 '과부를 붙드시는 하나님'이다. 그런데 왜 과부일까?
2) (열왕기상 말씀으로 이어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당하던 선지자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어찌 된 영문인가? 이방 땅, 과부에게서 도움을 받아야만 할 처지로 떨어졌다. 그러나 참된 희망은 낮은 데서 피어난다. 바알 선지자 540명과 싸울 힘은 엘리트 코스에서 얻는 게 아니라 삶의 가장 밑바닥에서 얻는 것 아닐까? 아니, 맞다. 낮은 데서 생명을 움트게 하는 하나님을 만나야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을 자기 삶에 대한 근본적인 긍정을 할 수 있게 된다.
3) 이 근본적인 긍정을 두 번째 인생, 선물로 받은 인생, 다시 찾은 인생이라 부를 수 있다. (신약 본문으로 이어간다.) 두 번째 인생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다. 진정한 생명의 역사는 사람 간의 거래나 협상, 합의나 설문조사로 일어나지 않는다. 오로지 하나님께로 받은 것이어야 한다.
4) (복음서 본문으로 이어간다.) 죽음의 무리가 예수의 무리와 마주친다. 생명은 오롯이 하나님의 역사다. 빛이 어둠을 밝히듯 생명은 죽음을 살린다. 자꾸 눈길이 가는 문장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러니 예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라 청년이여!
제목은 <예수와 함께 가는 길>로 정했고, 이런 식으로 구성했다.
5.
또 다른 묵상
구약 본문을 가지고 엘리야의 요청을 진실한 요청과 진실하지 않은 요청을 비교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를테면 정치적인 요청이나 뀀과 비교하여 전래동화 <해님과 달님> 이야기와 연결시키는 생각을 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
복음서 본문을 읽으면서 홍순관의 <힘내라 맑은 물> 가사가 기억났다. '흐린 물줄기 이따금 만나거든 피하지 말고, 뒤엉켜 가거라'
6.
성서일과 네 본문을 모두 활용하려는 노력이 주는 장점이 분명하다. 일주일 내내 말씀을 읽는다. 그러지 않고는 준비가 되지 않는다.
7.
적당한 필명이 없어, 실명을 씁니다. 성령강림 후 제 3주 한정훈의 설교 준비 일지입니다.
늘 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