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1일, 부활절 4주 예배준비노트
수전절 복음(福音)
[성서일과 4본문]
(사도행전 9:36-43)
36. 그런데 욥바에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있었다. 그 이름은 그리스 말로 번역하면 도르가인데, 이 여자는 착한 일과 구제사업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37. 그 무렵에 이 여자가 병이 들어서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씻겨서 다락방에 두었다.
38. 룻다는 욥바에서 가까운 곳이다. 제자들이 베드로가 룻다에 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을 그에게로 보내서, 지체하지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였다.
39. 그래서 베드로는 일어나서, 심부름꾼과 함께 갔다. 베드로가 그 곳에 이르니, 사람들이 그를 다락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과부들이 모두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지낼 때에 만들어 둔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여 주었다.
40. 베드로는 모든 사람을 바깥으로 내보내고 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시신 쪽으로 몸을 돌려서,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 여자는 눈을 떠서,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서 앉았다.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서, 그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서, 그 여자가 살아 있음을 보여 주었다.
42. 그 일이 온 욥바에 알려지니,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43. 그리고 베드로는 여러 날 동안 욥바에서 시몬이라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묵었다.
(시편 23)
1.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2.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3.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4.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5.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6.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7:9-17)
9. 그 뒤에 내가 보니,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인데, 흰 두루마기를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10. 그들은 큰 소리로, "구원은 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의 것입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11. 모든 천사들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을 둘러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12.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영원무궁 하도록 있습니다. 아멘!" 하고 말하였습니다.
13. 그 때에 장로들 가운데 하나가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 사람들은 누구이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14. 내가 "장로님, 장로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더니,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서 희게 하였습니다.
15.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밤낮 그분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이 그들을 덮는 장막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16. 그들은 다시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도 않고, 해나 그 밖에 어떤 열도 그들 위에 괴롭게 내려 쬐지 않을 것입니다.
17. 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10:22-30)
22. 예루살렘은 성전 봉헌절이 되었는데, 때는 겨울이었다.
23. 예수께서는 성전 경내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다.
24. 그 때에 유대 사람들은 예수를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시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그렇다고 분명하게 말하여 주십시오."
25.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가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그 일들이 곧 나를 증언해 준다.
26. 그런데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도 더 크시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본문 가운데 눈에 띄는 때와 장소]
※ 수전절(修殿節)
수전절이라는 이름은 신구약 성경 중에, 요한 10:22 단 한곳, 단 한 번 나옵니다. 성전봉헌절이라고도 하고 광명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성탄절과 날짜가 거의 일치합니다. 지난주일 시 30편 묵상 노트에 언급했었습니다.
이번 주일 복음서 본문의 때가 수전절이어서, 마침 수전절과 관련이 깊은 지난주일 시편 본문인 30편을 다시 묵상했습니다. 특히 2절과 3절이 인상적이었습니다.
2.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께 울부짖었더니, 주님께서 나를 고쳐 주셨습니다.
3. 주님, 스올에서 이 몸을 끌어올리셨고, 무덤으로 내려간 사람들 가운데서, 나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수전절을 맞아 솔로몬 행각(주랑)을 거니시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지 궁금합니다. 추측컨대, 주전 165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더럽혀지고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정결하게 회복되고 재건된 것을 기념하는 이 절기를 맞아, 성전이신 당신의 몸이 모욕당하시고 무너지실 것, 그리고 마침내 다시 정결하고 신비로운 부활의 첫 열매로 세워지시리라는 언약(요한 2:19-21)을 되새기고 계셨을 것 같습니다.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20.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짓는 데에 마흔여섯 해나 걸렸는데, 이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다구요?"
21. 그러나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 솔로몬 행각(주랑)
요 10:23, 행 3:11, 행 5:12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사람들과 신론(神論)에 관하여 심하게 갑론을박하는 장면이 나오고, 반면에 사도행전에서는 사도들의 놀라운 표적을 본 백성들이 모여드는 장면이 나옵니다. 솔로몬 행각에는 이방인들도 들어갈 수 있었으며, 주로 종교적인 강의, 대화, 토론이 이루어지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성서일과 4본문을 이어주는 -말씀기억력을 도와주는- 단어,양(羊)∼성전(聖殿)]
순서대로 보면, 사도행전에 나오는 중요한 등장인물인 다비다(도르가)의 이름 뜻이 산양(山羊; 염소, 가젤)입니다. 사슴, 노루라는 뜻으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제가 보기에 산양(염소)이 더 어울립니다. 왜냐하면, 산양은 험한 바위산을 오르내리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매우 모험심도 강하고 적극적이며, 그 젖과 고기 또한 사람들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산양의 젖이 우리 몸에 우유보다 더 유익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도르가의 평소 삶이 이웃들에게, 마치 산양처럼, 적극적이고 유익했습니다. 산양의 억센 활동력과 그 활동반경을 연상하며 도르가의 평소 착한 일과 구제사업의 정성이 느껴집니다. 도르가만큼이나 적극적인 욥바의 제자들과(38) 과부들(39)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리고 그 거울에 나와 우리 교회를 비추어 봅니다.
(노파심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양과 염소는 모두 여러모로 유용한 동물들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5장 33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최후의 심판에서 양과 염소를 비유로 의인과 그렇지 못한 자들을 오른쪽과 왼쪽으로 갈라 두십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양과 염소의 가장 큰 차이는, 양은 염소에 비해 약합니다. 자기 방어도 못합니다. 신체구조나 성정 또한 그렇습니다. 생존을 위해 오직 목자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 양입니다. 이런 면 때문에, 비록 비유지만, 예수께서는 염소보다 양을 택하셨다고 봅니다. 그러나 양과 염소는 구약시대부터 큰 차이 없이 사랑받는 유용한 가축입니다. 오른쪽과 왼쪽 역시 구분을 위해 필요하지만, 오른 팔은 귀하고 왼팔은 귀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양과 염소, 오른쪽과 왼쪽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보적인 관계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는 관계요, 함께 상부상조 할 때 더 큰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관계입니다.)
시편 본문 23편은 양의 노래입니다. 양이 목자를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부르다보면 양과 목자의 관계가 얼마나 끈끈한지 절절히 느껴집니다.
서신서 본문은 요한계시록입니다. 참고로 부활절 2주부터 끝주까지 내내 서신서는 계시록이 이어집니다. 모두 부활 예수님이 주인공입니다. 이 가운데 ‘어린 양’이라는 표현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부활절 3주, 4주, 6주 등)
복음서 본문은 ‘내 양’이라는 표현이 중심입니다. 요한 10:26, 27절에 4차례 반복해서 나옵니다. 예루살렘 성전 솔로몬 행각에서, 수전절 거룩한 날 외치신 예수님의 복음은 이것입니다.
(요한 10:28-30) “…아무도 그들을(내 양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그런데 복음서를 묵상하면서, 양과 성전이 이어집니다. 복음말씀에서 양은 주님의 제자들이고 성도들이지만, 주님께서 어린 양으로 이어지는 오늘의 주제에 비추어 어린 양과 성전이 자연스레 이어집니다. 수전절이라는 절기주제를 묵상하며 주님의 몸이 곧 성전이요, 특히 요한계시록 21:22에서처럼, 어린 양이 곧 성전입니다.
22. 나는 그 안에서 성전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어린 양이 그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시 23:6절에서 시인은 양의 소망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산양 도르가의 죽음과 되살아남을 묵상하면서, 도르가의 몸이, 성도의 몸이 바로 성전이라는 사실을 되새깁니다. 지난주 묵상노트에 기록한 것처럼, 주님의 영, 주님의 이름을 모신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수전절의 교훈처럼, 허물어진 성전은 반드시 깨끗하게 재건되는 법입니다. 오늘 이리저리 더럽혀지고 허물어진 우리 교회를 봅니다. 그리고 나를 봅니다. 우리 교회는 원래 도르가처럼 씩씩했습니다. 용감했습니다. 활동력이 억셌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더러워지고 찌그러졌지만, 우리 교회가 다시 정결하게, 이전보다 더 씩씩하게 되살아나는 꿈을 주시는 오늘 말씀이 한없이 은혜롭습니다.
엊그제 4.19가 지났습니다. 불의한 독재자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다가 숨지신 어른들이 계셨기에 대한민국은 지금 민주주의를 숨 쉬고 있습니다. 조금 더 건강한 대한민국을 위하여, 나아가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가 건강하고 평화로운 몸으로 온전히 되살아나기 위하여, 교회가 먼저 건강하게 되살아나야 합니다. 주님과 나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언약대로 온전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부활절 4주에 주시는 복음! 2천 년 전 솔로몬 행각에서 외치신 우리 예수님의 수전절 복음을 명심(銘心)하고 또 명심(銘心)해야 합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그리고 그 전에 하나 더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알맹이입니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
과연 지금 나는 주님의 복음을 알아듣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말씀을 따르고 있습니까? 지금 내가, 지금 우리 교회가, 지금 대한민국이, 지금 한반도가 거룩한 성전으로 되살아나야 할 첫 걸음, 첫 단추입니다.
[말씀동화] 수전절(修殿節) 복음(福音)
펄펄 눈이 옵니다. 예루살렘에 함박눈이 내립니다.
평화의 도시라는 좋은 뜻 이름을 가진 예루살렘은 지금 이름값도 하지 못하는 동네입니다.
늘 시끄럽게 다투는 동네로 유명합니다.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서로 서로 제 잘났다고 으쓱거립니다.
서로 자기네 종교가 더 낫다고 씩씩거립니다. 자기네 나라가 더 낫다고 으르렁거립니다.
툭하면 칼을 휘두르고 돌도 던지고 심지어 총도 쏘아댑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가 아니라 불편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제 위험한 도시, 눈물의 도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펄펄 눈이 옵니다. 눈물의 도시 예루살렘에 함박눈이 내립니다.
그 옛날 찬란했던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진 뒤, 통곡의 벽만 남고 그 자리에 이슬람의 사원이 생겼습니다.
황금사원(바위돔 사원)도 생겼고, 알 아크사 사원도 생겼습니다.
2천년 동안 예루살렘은 참 많고 많은 다양한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루살렘은 다양한 종교, 다양한 종파만큼이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순례자들, 관광객들, 장사꾼들, 거기서 사는 주민들도 있습니다.
관광객들은 사진기 셔터를 누르느라 바쁘고, 장사꾼들은 그들에게 기념품을 파느라 바쁩니다.
동네 개들은 하릴없이 어슬렁거리고, 총을 멘 이스라엘 군인들도 이리저리 어슬렁거립니다.
펄펄 눈이 옵니다. 불안한 도시 예루살렘에 함박눈이 내립니다.
아무리 불안해도, 아무리 불편해도 눈 덮인 예루살렘은 다시 평화로워 보입니다.
부자동네 서예루살렘도, 가난한 동네 동예루살렘도 똑같이 흰 모자를 씁니다.
황금사원의 지붕도 오랜만에 흰 모자를 씁니다.
승용차도 군인차도, 똑같이 흰 모자를 씁니다.
고급차도 낡은 차도 똑같이 흰 모자를 씁니다.
펄펄 눈이 옵니다.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에 함박눈이 내립니다.
눈이 오면 가장 좋아하는 건 어린이들입니다.
유대아이들도 팔레스틴 아이들도 눈이 오면 강아지처럼 깡충거립니다.
함박눈이 많이 오면 학교도 가지 않고 신나게 뛰어놀 수 있어서 더 깡충거립니다.
펄펄 하얀 눈 때문인지, 깡충깡충 어린이들 때문인지, 예루살렘은 다시 평화의 도시가 됩니다.
예루살렘의 평화는 군인들의 총이 아니라 깡충 어린이들의 깔깔 웃음소리에서 시작됩니다.
주차해 놓은 자동차들이 마치 하얀 양떼들처럼 평화롭습니다.
펄펄 눈이 옵니다. 2천 년 전 예루살렘 성전에도 함박눈이 내립니다.
수전절, 예루살렘 성전 솔로몬 행각 주랑을 거니시던 예수님께서 함박눈을 바라보십니다.
200여 년 전에 어느 못돼먹은 왕 때문에 더럽혀지고 허물어졌다가 다시 깨끗하게 재건된 성전입니다.
얼마 전에도 못돼먹은 지도자들과 장사꾼들 때문에 더럽혀졌었는데,
예수님이 친히 채찍을 휘둘러 깨끗하게 청소하셨던 성전입니다.
“이것을 걷어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요한 2:16)
치워도 치워도 다시 때가 타는 성전 위로 오늘은 새하얀 함박눈이 내립니다.
펄펄 눈이 옵니다. 예루살렘의 수전절 함박눈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어리석은 유대인들이 몰려와서 예수님을 둘러싸고 다그칩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그렇다고 분명하게 말하여 주세요.”
들을 귀 없는 자들의 소리를 들으시다가 문득 눈 덮인 세상을 바라보십니다.
흰 눈을 잔뜩 이고 조용히 앉아있는 만물이 마치 하얀 양떼처럼 평화롭습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펄펄 불꽃이 내립니다. 불꽃처럼 신바람나는 성령이 내리십니다.
천방지축 베드로, 겁쟁이 베드로에게 성령이 내리십니다.
벚꽃처럼, 살구꽃처럼 꽃비가 내립니다. 생선비린내 베드로에게서 꽃향내가 납니다.
수많은 병자들과 장애인들이 베드로의 복음을 듣고 되살아납니다.
예루살렘 성전 솔로몬 행각에 모두 모여 수전절 예수님의 복음을 기억합니다.(행 3:11, 행 5:12)
펄펄 꽃비가 내립니다. 풀죽은 내 위에, 숨죽은 교회 위에 단비가 내립니다.
욥바의 일꾼 다비다, 산양(山羊)처럼 활발한 일꾼, 어린양처럼 순결한 성도 다비다가 죽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처럼 기도합니다. 베드로가 예수처럼 소리칩니다.
다비다가 나사로처럼 다시 삽니다. 허물어졌던 성전이 다시 섭니다.
"아무도 내 양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한다!"
"죽음조차 내 양들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한다!"
솔로몬 행각을 울리던 예수님 그 음성이 내 위에 쏟아집니다.
복스러운 그 음성, 예수님의 복음이 교회 안에 진동합니다.
펄펄 눈이 옵니다. 펄펄 성령이 옵니다. 펄펄 말씀이 옵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예수님의 복음이 더러운 교회를 씻어주십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무너진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2천 년 전 그 복스러운 음성, 수전절 그 복음입니다.
나와 예수님은 하나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입니다.
2천 년을 진동시킨 복음입니다.
2천 년 내내 내리시는 수전절(修殿節) 복음(福音)입니다.
(이정훈, 2013년 4월 21일 새벽기도 직전에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