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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17일, 사순절 5주 예배준비 노트

서무천사 2013. 4. 7. 17:55

향유 잔치

 

먼저, 성서일과 4본문부터 올립니다.

 

(이사 43:16-21)

16. 내가 바다 가운데 길을 내고, 거센 물결 위에 통로를 냈다.

17. 내가 병거와 말과 병력과 용사들을 모두 이끌어 내어 쓰러뜨려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그들을 마치 꺼져 가는 등잔 심지같이 꺼버렸다. 나 주가 말한다.

18. 너희는 지나간 일을 기억하려고 하지 말며, 옛일을 생각하지 말아라.

19. 내가 이제 새 일을 하려고 한다. 이 일이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내가 광야에 길을 내겠으며, 사막에 강을 내겠다.

20. 들짐승들도 나를 공경할 것이다. 이리와 타조도 나를 찬양할 것이다. 내가 택한 내 백성에게 물을 마시게 하려고, 광야에 물을 대고, 사막에 강을 내었기 때문이다.

21. 이 백성은, 나를 위하라고 내가 지은 백성이다. 그들이 나를 찬양할 것이다."

 

(시편 126)

1. 주님께서 시온에서 잡혀간 포로를 시온으로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을 꾸는 사람들 같았다.

2. 그 때에 우리의 입은 웃음으로 가득 찼고, 우리의 혀는 찬양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그 때에 다른 나라 백성들도 말하였다. "주님께서 그들의 편이 되셔서 큰일을 하셨다."

3. 주님께서 우리 편이 되시어 큰일을 하셨을 때에, 우리는 얼마나 기뻤던가!

4. 주님, 네겝의 시내들에 다시 물이 흐르듯이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돌려보내 주십시오.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둔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

 

(빌립 3:4b-14)

4. (하기야, 나는 육신에도 신뢰를 둘 만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육신에 신뢰를 둘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

5. 나는 난 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6.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7. [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8.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9.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나는 율법에서 생기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10.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11.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12.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13.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요한 12:1-8)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가셨다. 그 곳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에 살리신 나사로가 사는 곳이다.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마르다는 시중을 들고 있었고, 나사로는 식탁에서 예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 가운데 끼여 있었다.

3. 그 때에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다.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4.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하나이며 장차 예수를 넘겨줄 가룟 유다가 말하였다.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6.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는 도둑이어서 돈자루를 맡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것을 훔쳐내곤 하였기 때문이다.)

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8.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들어가면서]

노파심에서 종종 하는 얘기지만, 성서일과 4본문은 각각 독립적인 본문이라 이해하며 읽고, 묵상해도 됩니다. 시편은 대체로 구약본문에 대한 응답찬송이지만, 이 또한 별개로 생각하고 읽고 묵상해도 됩니다. 그럼에도, 제가 가능하면 4본문을 관통하는 소통의 끈을 찾으려 애쓰는 까닭은, ‘말씀 기억력’ 때문입니다. 언제 기회 있을 때, 말씀기억력에 대한 평소 제 생각을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성서일과 4본문을 이어주는 끈 찾기]

* 구약 본문의 앞부분, 이사야 43:16∼17절은 오래전 출애굽 때를 기억나게 합니다.

** 18∼21절은 두 번째 출애굽에 해당하는 출(出)바벨론에 대한 예언입니다.

*** 19c, 20c에 반복해서 나오는 <광야에 길을 내고(물을 대고), 사막에 강을 낸다>는 표현은, 16절의 <바다 가운데 길을 내고, 거센 물결 위에 통로를 냈다>는 말씀과 묘한 대구(對句)를 이룹니다.

아울러 시편 본문 126:4의 <네겝의 시내들에 다시 물이 흐르듯이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돌려 보내주십시오>와도 통합니다.

 

* 18b의 “옛일”과 19a의 “새 일” 역시 대(對)를 이룹니다.

** 구약과 서신서를 비교하자면, 구약 이사야 18b, “옛일을 생각하지 말아라”는 서신서 본문인 빌립보서 3:13c의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와 통합니다.

*** 구약 18절 “옛일(지나간 일)”은 서신서 본문 빌립 3:7절의 “내게 이로웠던 것”과 통합니다

**** 19a의 “새 일”은, 시편본문인 126:2, 3절에 반복해서 나오는 “큰 일”과, 그리고 서신서 빌립3:13c의 “앞에 있는 것”과 통합니다. 8절의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도 통합니다.

복음서에서, “옛일”에 사로잡힌 사람은 가룟 유다, “새 일”을 향하여 전진하는 사람은 마리아입니다.

 

* 전반적으로, 잊어야 할 ‘옛것’(포로생활; 바벨론의 포로생활, 구습舊習의 포로생활)과, 기억해야 할 ‘새것’(본향, “시온”, 시 126:1,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 빌립 3:9c, “부르심의 상” 14절, “목표점”12절,14절)의 대립입니다.

지금 나에게 잊어야 할 그것과 잊지 말아야 할, 기억해야 할 그것은 무엇 무엇일까요?

** 구약과 서신서 사이에는 한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서신서가 추구하는 ‘새것’(“앞에 있는 것” 13c,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8a)은 육신의 안락과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그분의 고난에 동참”(10)합니다. “육신에 신뢰를 둘만한 것” (4절), 육체의 자랑을 “오물”(8c)로 여기는 바울입니다.

 

* 서신서 본문 빌립 3:12, 14절에 반복해서 나오는 “목표점”, 14절의 “그 부르심의 상”에 대해 묵상하면서, 복음서 본문의 ‘마리아’가 떠올랐습니다.

** 서신서 바울과, 복음서 (베다니)마리아가 통합니다.

⇒ (빌립 3:8)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12절“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 (누가 10:39) “이 여자에게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 (요한 11:32-33) 마리아는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 발 아래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33. 예수께서는 마리아가 우는 것과, 함께 따라온 유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마음이 비통하여 괴로워하셨다.

⇒ (요한 11:43-44 43)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외치시니,

44. 죽었던 사람이 나왔다. 손발은 천으로 감겨 있고, 얼굴은 수건으로 싸매여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서,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복음서 묵상]

* 방금 위에서 살핀 대로 마리아는, 예수님 말씀에 사로잡히고, 오빠 나사로를 살리신 사랑에 사로잡힙니다.

  그리하여 지극한 사랑의 표현을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직전, 유월절을 코앞에 둔 때입니다. 베다니라는 마을 이름 뜻이 ‘슬픔의 집’이라는 것이 기억나서 그런지 더욱 예수님의 장례식을 준비하는 마리아의 애절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죽었던 오빠는 살고, 그를 살리신 예수님은 죽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완전히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시리라는 것을 마리아는 알고 있었을까요?

  그러고 보니, 베다니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축복하시고 승천하신 곳이기도 합니다.(누가 24:50, 51) 슬픔의 집이 환희의 집이 됩니다. 오늘 시편 126:5, 6절이 절로 나옵니다.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둔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

 

** 오늘 본문인 요한 12:1-8은 베다니의 마리아와 가룟 유다가 대조적입니다.

말씀에 사로잡힌 자 / 돈에 사로잡힌 자

 

베다니의 마리아는 특히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에 단 세 차례 등장하는 이례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누가 10장, 요한 11, 12장)

오늘 마리아는, 누가 10장에서 보였던 ‘말씀 경청’의 모범생으로, 그리고 요한 11장, 오빠 나사로의 죽음에서 보여준 지극히 인간적인 약한 모습으로, 이어서 오늘 본문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베다니에서 열린 예수님을 위한 잔치자리에서, 매우 값진 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은 것입니다.

 

이 사건을 잘 느끼기 위해, 먼저 몇 가지 살펴봅니다.

 

* ‘바리새 시몬’과 ‘베다니 시몬’에 대한 기억을 정리해봅니다.

누가 7:36절 이하에 바리새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께 기름 부은 사건입니다. 이름 모를 한 여자가 한 일인데, 성경은 그가 죄인이었다고 소개합니다. 아마 바리새 시몬은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이 없는 사람이었나 봅니다. ⇒ 44...너는 이 여자를 보고 있는 거지?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에,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았다. 45. 너는 내게 입을 맞추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들어와서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46.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발랐다.”

그 뒤에, 마가 14:3절 (마태 26:6절) 이하에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또 한 차례 예수님께 기름 부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1절(마태 2절)에 의하면, 때는 유월절 이틀 전입니다. 베다니의 시몬은 나병환자였습니다. 그 집에 이름 모를 여인이 와서 식사 중이신 예수님의 머리에 매우 값비싼 향유를 깨뜨려 붓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나무랍니다.

 

** 바리새 시몬의 집에 나타난 죄 많은 여인과, 베다니 시몬의 집에 나타난 이름 모를 여인은 서로 다른 사람 같습니다. 그리고 시점으로 보아, 베다니의 이름 모를 여인이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인 것 같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오늘 복음서 본문인 요한 12장에서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가 먼저이고,(“유월절 엿새 전에” 1절) 며칠 베다니에 머무르시면서, 연이어 예수님을 사랑하는 여인들이 기름을 붓게 된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그러나 거룩한 낭비에 대해 나무라는 사람들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거의 같은 것으로 보아, 기름을 머리에 부은 것과 발에 부은 것의 차이는 있지만, -먼저 머리에 절반을 붓고 나머지를 발에 부었던 것일까요? - 아무튼 그 이름 모를 여인은 마리아인 것 같습니다.)

 

*** 오늘 본문인 요한 12장과 마가 14장에는 “매우 값진 순(수한) 나드 향유”라고 했습니다.

나드에 대해 인터넷 여기 저기 뒤지며, 마치 제비가 집짓듯이 이것저것 물어 와서 다음과 같이 정리해보았습니다.

 

  나드는 히브리어로 네르드(Nerd)라고 하는데, 이는 산스크리트어로 Nalada(향기를 뿜다)의 변형이라고 합니다. 원산지는 히말라야, 부탄, 네팔, 티베트, 인도 동부 등 해발 3∼4,000미터 고지대입니다. 15∼30㎝까지 자라는 마타릿과의 다년생 초본으로서, 그 야생 뿌리를 건류(乾溜)하여 향유를 얻습니다. 그 향기는 매우 깊고 은은한데, 특히 남성들에게 잘 어울리며 주로 머릿기름으로 애용된다고 합니다.

팔레스타인은 워낙 바람 많고 건조하고 더운 기후라 피부가 말라 트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몸에 기름을 발랐다고 합니다.

나드 향유가 그렇게 비싼 까닭은, 먼저 나드 풀 자체가 귀하며, 워낙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풀이고, 딱딱한 뿌리 한 아름을 쪄야 한 두 방울 얻을 뿐인데다가, 멀리 팔레스타인까지 운반하는 운반비와 국경 관세까지 더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정정숙.『성서식물』 등에서 얻음)

 

  아마도 이런저런 사연과 뜻과 정성을 모아 여러 사람들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머리와 발에 향유를 부었겠지만 (집주인 또는 집 주인 아닌 여러 여성들), 아마 마리아의 기름부음이 마지막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7절)”라고 말씀하셨겠지요. 그렇다면, 마리아는 오빠 나사로가 죽었을 때도 바르지 않고 아껴두었던 그 향유를 지금 살아계신 예수님 발에 쏟아 바르고 있는 것입니다. 옆에서 누가 구시렁거리건 말건 그 일에 몰두합니다. 죽은 오빠를 살려주신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과 곧 죽으실 스승에 대한 연민이 섞여 있었을까요? 이 장면이 누가복음 7장의 그 죄 많은 여인의 모습을 닮아서인지...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은 없습니다만, 어쩌면 곧 죽을 스승님에 대한 연민으로 눈물을 펑펑 쏟지 않았을까요? 머리털에 가려 그가 흘리는 눈물을 못 보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눈물방울이 향유와 엉겼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 추측이 맞는다면, 마리아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보다 예수님 말씀을 경청(傾聽, 敬聽)하던 제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눈물은 오래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예수에 대한 기대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추측이지만, 나드 향의 향기가 얼마나 더 오래갔을지 잘은 몰라도, 예수님께서 돌무덤에 들어가실 때까지 그 향기가 은은히 진동했을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부활예수님의 기억 속에도 그 향기는 은은히 남아 있었을 것만 같습니다.

  

  또 한 가지, 마리아의 기름부음은, 예수님 발을 씻는 지극한 자기희생과 진심을 다한 섬김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요한 13장)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비약인지 모르겠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베다니 마리아의 섬김을 기억나게 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때 제자들은 엊그제 마리아의 그 행동을 기억했을까요? 스승님의 발에서 계속해서 진동하는 마리아의 향유 향내를 느꼈을까요? 그리고 스승님의 마음속에 흐르는 그 눈물과 향유를 보았을까요?

 

[나머지]

* 순 나드 향유의 향내는, 자극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고 은은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몸에 바르면 3일 동안이나 그 향기가 지속된다고 합니다.

 

** 누가 12: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가룟 유다의 말을 들으며 문득 판소리 흥보가의 ‘돈타령’이 떠오릅니다.

“삼백 데나리온”, “가난한 사람”, “낭비”... 낭비, 낭비라니... 점입가경(漸入佳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어도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돈타령’이 문제입니다.

돈타령은, 매우 말초적이면서도 설득력 있고, 자극적이면서 선동적이기까지 합니다.

특히 제 돈 아닌 남의 돈에 대한 판단이 더 빠른 게 돈타령의 생리이고, 값을 매길 수 없는 만물에 일일이 값을 매기는 것도 돈타령의 생리입니다.

유다는 필경 돈타령에 익숙하여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붓는 향유조차 값으로 매기더니, 급기야 그걸 가리켜 “낭비”라고까지 말합니다.

돈 없이 오천 명, 오만 명을 먹이셨던 스승님 앞에서 감히 돈타령입니다.

돈타령의 결정판입니다.

 

 

[말씀동화] 잔치잔치 향유잔치

 

  안녕하세요? 저는 향유예요. 이름이 참 곱죠? 저는 향유 중의 향유라고 꼽히는 나드 향유, 순수한 나드 향유랍니다. 그런데 나드가 뭔지 아시나요? 내 이름 ‘나드’는 옛날 인도에서 쓰던 글자인 산스크리트어에서 나온 말인데요, 향기를 내뿜는다는 뜻이에요. 그만큼 향기가 많은, 향기 덩어리라는 뜻이죠.

  저는 신비로운 산 히말라야가 고향이랍니다. 히말라야라는 말은 역시 산스크리트어로 ‘눈의 집’이라는 뜻이에요. 온 세상에 내리는 눈들의 고향이라는 뜻이죠. 그만큼 높고, 그만큼 온통 눈으로 덮여 있는 산이 바로 히말라야에요. 저는 히말라야 산맥의 중턱인 약 4천 미터나 되는 높은 고지대에서만 자라는 희귀한 여러해살이 풀이랍니다. 나드의 향유는 나드 풀의 뿌리를 쪄서 만들죠. 그런데 뿌리 한 아름을 쪄야 겨우 한두 방울밖에 못 얻어요. 그래서 내가 좀 비싼 편이죠.^^

 

  저는 아주 오래 전에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티베트와 네팔 근처에서 태어났어요. 나드 향유를 만드는 어느 할머니가 아들, 손자, 며느리와 함께 히말라야 산 곳곳을 누비며 나드 뿌리를 캐오셨죠. 히말라야의 12월 겨울 추위를 견디면서, 마치 보물찾기를 하듯이 귀한 나드 뿌리 수백 개, 수천 개를 찾아 뿌리를 캐 와서 오랜 시간 공을 들여서 바로 나를, 이 귀하신 몸 나드 향유를 만들어 낸 것이죠. 나는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며 장사하는 대상(隊商)들에게 비싼 값에 팔렸습니다. 그리고 아주 귀한 옥합에 담겨 단단히 밀봉되었어요. 왜냐하면 저는 밖에 두면 공기 중으로 연기처럼 사라지는 성격이 있어서 - 이걸 휘발성이라고 하는데요 - 휘발성이 하도 강해서 이렇게 단단히 밀봉을 해두어야 하죠. 그렇게 해서 저는 대상 아저씨들과 함께 장장 6천 킬로미터나 되는 길고 긴 거리를 여행해서 여기, 팔레스타인 땅, 그 중에서도 예루살렘 동쪽 10리 떨어진 마을 베다니에까지 오게 된 것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6천 킬로미터가 도대체 얼마나 긴 거리인줄 아세요? 여러분이 사는 한반도의 꼭대기 백두산에서부터 제일 아래 한라산까지가 약 1천 킬로미터니까, 상상이 되시나요? 도대체 몇 배나 먼 거리지? 그뿐 아니에요. 히말라야에서 팔레스타인까지 가려면 아주 거칠고 험한 난코스를 많이 지나야 한답니다. 게다가 수많은 나라의 국경들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장사하는 분들은 국경 통관세를 많이 내야하죠. 그러다보니 제 몸값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는 것이고요. 그럼에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저를 매우 좋아한답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은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건조하고 바람도 많은 지역인데다가 물도 좋지 않기 때문에 피부가 잘 망가지거든요. 그래서 피부 관리를 위해 늘 좋은 기름을 바르길 원했던 거예요.

 

  제가 오래 전 이곳 베다니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따뜻한 춘삼월이었어요. 때마침 어느 복스러운 집에서 혼례식을 준비하고 있었죠. 그들은 혼수로 큰돈을 들여 저를 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새색시가 간직하게 해주었어요. 이건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죠. 부모님들의 사랑이 이처럼 지극했고, 저는 그렇게 지극한 사랑의 열매로 베다니 어느 사랑 많은 집 안방 깊숙한 곳에 둥지를 틀게 된 거예요. 그리고 저는 기나긴 잠에 빠져들었어요. 그리고 세월이 흘렀죠. 얼마나 흘렀을까? 잠결에 들으니 시간은 물처럼 흘러가고 있었어요. 제가 담긴 향유옥합도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죠. 엄마가 자식에게, 자식에게, 또 자식에게 여러 대에 걸쳐 저를 물려줬어요.

  아! 나는 언제나 세상 구경을 하게 될까? 아마 아주 중요한 때 저를 깨뜨려 쓰게 되겠죠. 혹은 아주 긴급할 때 저를 팔아서 큰돈을 마련할 수도 있겠죠. 맞아요. 저는 그 집안의 가보였던 거예요. 가보가 뭐죠?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큰 보물이라는 뜻이죠.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저는 잠결에 참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 때 제 주인은 나사로와 마르다 그리고 마리아 삼남매였는데요, 삼남매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소리가 아주 세차게 들리는 거였어요. 모처럼 잠이 확 깼죠. 가만 들어보니까 집에 손님이 오신건대, 아주 귀한 손님이 오신 게 틀림없었어요. 그분은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아저씨였어요. 예수 아저씨는 아주 따사로우면서도 시원시원한 음성을 가진 분이셨죠. 그리고 매우 지혜로운 분이었어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내가 그걸 왜 모르겠어요? 내가 누구죠? 아주아주 귀한 나드 향유잖아요. 제가 태어난 히말라야의 네팔과 티베트 지역에는 지혜로운 선생님들이 매우 많았답니다. 구루(Guru)라고 불리는 분들인데요, 베다니 마을에서는 구루와 비슷한 사람을 랍비라고 부르죠. 그리고 저는 구루 아저씨들은 물론, 세상물정에 환한 대상(隊商)들과 함께 오랜 세월 여행하면서 참 많은 유복하고, 유식한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것들을 듣고 배웠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 말씀을 몇 번 듣고는 금세 알게 되었죠. 예수님은 세상 어떤 구루나 랍비보다 더 지혜롭고 신비로운 분이라는 사실을요.

 

  콩닥콩닥 뛰던 마리아의 가슴이 쿵덕쿵덕 아주 세차게 뛰기 시작했어요. 예수님 말씀이 너무너무 신비롭고 재미있었기 때문이었죠. 그 때 언니 마르다의 가슴도 쿵덕쿵덕 세차게 뛰었죠. 그런데 그 느낌은 서로 달랐어요. 마리아의 심장이 사랑의 기운 가득했던 것과 달리, 언니 마르다의 심장은 왠지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죠. 귀한 손님 예수님을 대접하느라 혼자서 이리뛰고 저리뛰고 너무너무 분주했는데, 동생 마리아는 꼼짝달싹 안 하고 예수님 곁에 바짝 다가앉아 있으니 질투와 분노가 마구마구 솟아오른 거였어요. 참다못한 마르다가 예수님께 불평을 했죠. 싸가지 없는 동생을 그냥 두면 안 된다고요. 그래서 예수님은 따뜻한 사랑이 담긴 말씀을 해주셨어요.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에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란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어.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셨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예수님은 마리아를 조금 더 사랑하시는 게 느껴졌어요.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열심히 땀 흘려 봉사하는 것도 좋아하시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예수님 말씀에 귀 기울여 듣는 거, 그걸 가장 좋아하셨던 거예요.

 

  예수님이 떠나시고 나서 다시 집안은 조용해졌어요. 그리고 나도 다시 잠이 들었죠. 그런데 얼마 지나 다시 잠이 확 깨는 일이 생겼어요. 집안이 좀 어수선하다싶었는데, 아뿔싸 잠을 깨보니 집안에 난리가 났어요. 큰 병에 걸려 끙끙 앓던 오빠 나사로가 죽은 거예요. 마르다와 마리아는 불쌍한 오빠 때문에 참 많이도 울었죠. 그 때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저 동구 밖에 와계신다고 말했어요. 왜 집에 들어오지 않으시는 걸까? 저는 그게 궁금했어요. 사랑 많은 예수님이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었는데 왜 빨리 안 들어오시는 거지? 마리아가 뛰어나갔어요. 그리고 잠시 뒤에 다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이윽고 밖에서는 “와∼, 만세∼!” 하는 함성소리가 들렸어요. 알고 보니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가 되살아난 거예요. 좀비도 아니고 강시선생도 아니고 완전 생생한 사람이 된 거예요. 와!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예요. 내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곳을 다니면서 많은 얘기를 들어보았지만, 이렇게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은 듣도 보도 못한 일이예요.

  원래 베다니라는 말의 뜻은 ‘슬픔의 집’이라는 뜻이에요. 베다니에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다니! 슬픔의 집이 변해서 완전 기쁨의 집이 되어버린 거예요. 상가에 와서 울던 사람들은 이 놀라운 광경에 기뻐 어쩔 줄 몰랐죠. 누군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시편을 노래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온 동네 사람들이 이 노래를 따라 합창했어요.

 

“하나님 고맙습니다. 죽음의 포로가 되었던 우리 나사로를 다시 돌려보내 주셔서 참 고맙습니다.”주님, 네겝의 시내들에 다시 물이 흐르듯이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돌려보내 주십시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둔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시편 126:4∼6) 할렐루야! 할렐루야!!

 

  정말 대단하죠? 어리둥절한 나사로 오빠를 마르다와 마리아는 얼싸안고 뽀뽀를 하고 아주 난리가 났겠죠? 너무너무 고마운 분 예수님은 어떻게 되셨을까? 마르다와 마리아는 그 큰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했을까요? 막 뽀뽀하고 업어드리고 그랬을까? 아주아주 맛있는 거 해드렸을까? 아니에요. 그 정도가 아니었어요. 마르다와 마리아의 고마운 마음은 그보다 훨씬 컸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저는 마침내 세상구경을 하게 되었던 거구요. 무슨 얘기냐고요? 제 얘기를 조금만 더 들어보세요.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예루살렘이 유월절 준비로 분주해질 무렵이었어요. 베다니는 다시 시끌벅적해졌죠. 나병환자였던 시몬 아저씨네 집에서 큰 잔치가 벌어진 거예요. 바로 우리 예수님을 위한 잔치였어요. 예수님이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직전에 베다니의 초청을 받고 다시 오셨어요. 지난번에 오셨을 때 귀한 말씀도 들려주시고, 죽은 나사로까지 살려주셨던 예수님께 마을 사람들이 크게 한턱내는 자리였어요. 아직까지도 어리둥절한 나사로는 동네 아저씨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있었고, 부지런한 마르다는 동네 아줌마들과 함께 열심히 잔치음식을 차리고 있었어요. 바로 그 때, 마리아는 집안 깊숙한 곳에 보관해두었던 가보를, 집안 보물 1호인 바로 나, 나드 향유옥합을 꺼낸 거예요. 사랑하는 오빠가 죽었을 때도 시신에 바르지 않고 아껴두었던 나를, 마침내 나를 꺼낸 거예요. 마리아의 콩닥거리는 심장소리가 들렸어요. 몹시 흥분해있었지만, 그 마음에는 뜨거운 사랑이 흐르고 있었죠. 마리아는 달렸어요. 시몬 아저씨네 집으로 달렸어요. 마리아의 손 안에서 출렁이는 제 마음도 달렸어요. 마리아의 손은 참 따뜻했어요. 그리고 점점 뜨거워졌어요. 제 마음도 덩달아서 뜨겁게 달아올랐어요.

 

  마침내 잔칫집에 도착한 마리아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예수님께 나아갔어요. 그리고 주저하지 않고 저를 담은 옥합을 깨뜨렸어요. 참 기나긴 세월동안 밀봉되어 있던 나는 마침내 바깥세상으로 나오게 된 거예요. 정말 역사적인 날이 아닐 수 없어요. 오랜 세월동안 램프 속에 갇혀 있었다는 램프의 요정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정말 너무나 아름다운 날, 아! 아름다운 밤이었어요.

  사람들이 내 향내를 맡기도 전에 내가 먼저 바깥 향기를 맡았어요. 고소한 음식냄새와 왁자지껄한 포도주 냄새도 좋았어요. 무엇보다 좋은 건 우리 예수님 냄새였어요. 예수님에게서는 매우 깊은 향내가 풍겼어요. 그건 마치 깊은 산속 옹달샘 같은 느낌이었어요. 순간 저는 예수님의 발에 쏟아졌죠. 예수님의 복숭아뼈를 타고 발등으로 흐르는 나를 마리아는 머리카락을 풀어 닦기 시작했어요. 순간 잔치자리는 쥐죽은듯이 조용해졌어요. 마리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고, 예수님도 눈물을 글썽이셨어요. 아!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거였어요.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가보를 깨뜨려 바친 거예요. 나는 팅커벨처럼 씽씽 날았어요. 예수님을 비롯해서 방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코를 향해, 피부를 향해 날아다녔어요. 나의 향내를 맡은 사람들이 하나 둘 눈을 감았죠. 평화롭고 행복한 미소가 잔치자리에 가득 번졌어요. 그런데 바로 그때 분위기를 확 깨뜨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거야!”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였어요. 분명히 유다는 지독한 비염환자임에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내 향내를 맡고 어떻게 저런 소리를 할 수 있지? 이 자연스럽고 은은한 평화의 향기(香氣)를 맡은 사람이 어떻게 저런 분위기 확 깨는 소리를 할 수 있담? 그리고, 뭐? 내가 삼백 데나리온이라고? 아니 나를 어떻게 저리 천박(淺薄)하게 표현할 수 있지? 유다는 내가 돈으로밖에 안 보이나 봐요. 돈을 위해서 나를 파는 것밖에 생각 못하다니! 꼭 필요할 때 나를 깨뜨리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그게 얼마나 용감하고 돈으로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유익한 일인지 유다는 모르는 게 틀림없어요. 유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아!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이제야 나는 마리아의 마음을 조금 더 알게 되었어요. 마리아는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었던 거예요. 마리아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그야말로 상상 이상이었어요. “나의 장사 날”! 그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던 일이었어요. 예수님께서 이제 곧 돌아가실 것이라는 사실을 마리아만 예감하고 있었던 거예요. 마리아가 평소에 얼마나 예수님 말씀을 깊이 귀 기울여 듣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 때문에 예수님은 마리아를 또 얼마나 깊이 사랑하셨는지, 이제 좀 알 것 같아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또 말씀하셨어요.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쩐지 내 마음이 짠했어요. 철부지 유다의 돈타령으로 우리 예수님이 더 외로워지신 게 느껴졌어요. 사랑하는 스승님의 장사(葬事)를 위해 값비싼 나드 향유를 부어드린 것을 가리켜 ‘낭비’라고 말하다니! 돈 한 푼 없이 오천 명을, 오만 명을 먹이신 스승님 앞에서 돈타령을 늘어놓는 유다는 정말 철부지 중에서도 상 철부지네요. 그리고 제자라면서 스승님이 곧 돌아가실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저 엉터리 제자들! 그래도 예수님은 마리아가 있어서 조금 덜 외로우실 거예요. 언제나 예수님 말씀에 귀를 쫑긋 세우고 귀 기울이는 참 제자 마리아! 그래서 스승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할 수 있었던 믿음직한 제자 마리아! 그리고 또 내가 있잖아요. 난 예수님 발에 스며들었어요. 앞으로 여러 날 동안 예수님의 발에 머물면서 순수한 나드 향의 기운을 느끼게 해드릴 거예요. 예수님은 외로우실 때마다, 내 향내를 맡으시며 마리아의 사랑을, 마리아의 ‘말씀 사랑’을 기억하시고 힘을 얻으실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바로 며칠 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밥을 드셨어요. 제자들과 함께 있었지만 예수님은 어쩐지 매우 외로우셨어요. 그러다 문득 예수님은 은은한 내 향내를 맡으며 며칠 전 마리아가 발을 닦아주던 것을 기억해 내시고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셨죠. 마치 깊은 산속 옹달샘처럼 예수님 마음에 새힘이 퐁퐁 솟으신 게 틀림없어요.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셨죠. 그리고 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어요. 어리둥절하고 어리버리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예수님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    )

[이정훈 지음, 2013년 3월 16일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