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제6주 | 그의리스도 (한정훈)
부활절 제6주
시편 66: 8-20
8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의 찬양 소리를 들리게 할지어다
9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10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11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12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13 내가 번제물을 가지고 주의 집에 들어가서 나의 서원을 주께 갚으리니
14 이는 내 입술이 낸 것이요 내 환난 때에 내 입이 말한 것이니이다
15 내가 숫양의 향기와 함께 살진 것으로 주께 번제를 드리며 수소와 염소를 드리리이다 (셀라)
16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17 내가 나의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나의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18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19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음이여 내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도다
20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사도행전 17: 22-31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베드로전서 3: 13-22
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요한복음 14: 15-21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그의리스도
선거에 나선 시장 후보의 포스터가 화제다. 여느 포스터와는 달리 후보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뒷모습은 선거를 치를 후보와 유권자 모두에게 낯선 풍경이다. 뒷모습이 진취적이고, 목표 지향적인 이미지는 아니다. 그래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다. 그를 반대하는 사람은 좋은 시빗거리를 잡은 셈이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 중에도 이 포스터는 실패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정치인의 선거 포스터를 길게 논평하는 일은 부적절하고, 또 어려운 일이다. 다만 뒷모습은 부활을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인에게 반드시 넘어가야 할 주제이다. ‘뒷모습’을 화두로 삼아 신앙과 삶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나누도록 하자.
하나님의 시험
신앙과 삶에서도 뒷모습은 어려운 문제다. 얼굴을 마주하면 모든 것이 선명하다. 얼굴에는 가능성이 있고, 읽고 읽히는 표정이 있다. 하지만 뒷모습에는 얼굴이 없다.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절과 외로움, 실패와 고난이 떠오른다. 뒷모습은 낮이 아닌 어두운 밤에 가깝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시 66: 10-11)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시험했다고, 심지어 그물을 놓아 걸리게 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불신의 표현이 아니다. 자신이 걸은 힘겨운 삶의 여정을 하나님의 시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시험은 누구나 겪는 실존적 고통, 삶의 무게와 다르지 않다. 시험하셨다는 말을 하나님이 우리의 반응을 확인하려 했다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하나 보자.” 이거 아니다. 그보다 어두운 밤을 지난 이의 증언으로 읽어야 한다. 끝내 하나님을 붙들었기에 인생의 의미가 손실되지 않았다는 고백으로 읽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결론은 풍요에 있다(12). 따라서 그의 역사는 필연이다.
의리
사도 바울은 아덴 사람에게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행 17: 22) 라고 말한다. 그러나 종교심이 많다는 것이 온전하다는 뜻은 아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 “내가 두루 다니며 (...)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23) 라고 말한다. 신앙이 추구하는 것은 열정이 아니다. 신앙은 믿는 사람에게 구체적인 관점과 태도를 제시한다. 이것 없이 열심만 추구하는 신앙은 수상한 신앙이다. 하나님을 모호함으로 만나는 사람은 없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세상과 한 사람을 향한 구체적인 의지와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26-27). 그리스도인은 자연에 깃든 하나님의 솜씨를 믿는 사람이며, 인류에 대한 책임을 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이 믿음이 온전한 것인지 아닌지는 열정 곧, 힘의 세기로 증명되지 않고, 의리와 같은 관계의 깊이로 증명된다. 며칠 전 배우 김보성이 찍은 광고와 그가 나온 기사를 봤다. 그는 하나님을 알고 진정한 의리를 알았다고 했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뒷모습은 하나님의 무능이 아니라 관계의 깊이 즉, 의리의 요청이라 해도 좋겠다.
본모습
베드로는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라고(벧전 3: 14) 또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17)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세례의 의미를 말한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21) 그리스도가 씻고자 한 것은 때 묻은 살갗이 아니라 때 묻은 양심이다. 그리스도인의 복은 신적인 혜택을 마음껏 누릴 자격의 획득에 있지 않고, 고통스럽더라도 옳은 삶을 추구하려는 태도의 획득에 있다.
모두가 고난이 없는 평안한 삶을 위해 기도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평안할 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없을 거다. 누군가는 “내가 이만큼 평안한 삶을 누리게 된 것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내가 이토록 평안한 삶을 거부하게 된 것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쪽은 옳고, 어느 쪽은 그르다고 말하려는 것 아니다. 다만 평안한 삶의 보장 즉, 혜택으로만 하나님과 신앙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뒷모습을 감당할 수 없다. 이 말을 하려는 것이다. 뒷모습도 하나님의 본모습이다.
요구
관계에서 서로가 지켜야 할 약속을 정하면 불편한 쪽은 약자가 아니라 강자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누구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는 사람은 약속을 만들지 않는 편이 가장 자유롭다. 하나님은 계명을 주심으로 자신을 제한하셨다. 약속에 자신을 붙들어 매셨다. 자녀의 방해 없이 자기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아버지보다 자기 일을 멈추고 방해꾼인 자녀와 기꺼이 놀아줄 수 있는 아버지가 더 자유로운 아버지다. 놀이동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아이를 우리는 자유인이 아니라 미아라 부른다. 한없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므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 15)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21) 오늘 이 두 말씀이 부활절 제6주 복음서 말씀의 처음과 마지막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원하신다. 그리스도인에게 정말 필요한 확신은 하나님이 내 편이시라는 확신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편으로 우리를 원한다는 확신이다. 절망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남의 요구가 되는 것이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232).
하나님은 지금 등을 돌리고 계신다. 그렇지 않고서 나라 꼴이, 교회 꼴이 이럴 수는 없는 거다. 그러나 어찌 보면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남의 요구가 되지 않고서는 이 절망을 피할 수가 없다. 모든 요청에 응답할 수는 없다. 윤동주 시인의 말처럼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갈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한 번은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이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이 되어야 한다. 의리를 지키자. 희망도, 믿음도, 사랑도,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를 포기하거나 팽개치지 말자.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신다. 신앙이 빛을 발할 때는 낮이 아니라 밤이다. 반드시 그의리스도가 나타나실 것이다. 그때까지 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