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20일 (부활절) 예배준비 노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성서일과 4본문]
(사도행전 10:34-43)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
35.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가 어느 민족에 속하여 있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3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을 보내셨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주님이십니다.
37.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이 일은 요한의 세례 사역이 끝난 뒤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서, 온 유대 지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38.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 예수는 두루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억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39. 우리는 예수께서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나무에 달아 죽였지만,
40. 하나님께서 그를 사흗날에 살리시고, 나타나 보이게 해주셨습니다.
41. 그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택하여 주신 증인인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와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42. 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자기를 살아 있는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의 심판자로 정하신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하셨습니다.
43. 이 예수를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하기를,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시편 118:1-2, 14-24)
1.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2. 이스라엘아,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여라.
14. 주님은 나의 능력, 나의 노래, 나를 구원하여 주시는 분이시다.
15. 의인의 장막에서 환호하는 소리, 승리의 함성이 들린다. "주님의 오른손이 힘차시다.
16. 주님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다. 주님의 오른손이 힘차시다."
17.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주님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겠다.
18. 주님께서는 엄히 징계하셔도, 나를 죽게 버려두지는 않으신다.
19. 구원의 문들을 열어라. 내가 그 문들로 들어가서 주님께 감사를 드리겠다.
20. 이것이 주님의 문이다.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갈 것이다.
21. 주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시고, 나에게 구원을 베푸셨으니,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22.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23.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니, 우리의 눈에는 기이한 일이 아니랴?
24. 이 날은 주님이 구별해 주신 날, 우리 모두 이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골로새서 3:1-4)
1.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에 싸여 나타날 것입니다.
(요한복음 20:1-18)
1. 주간의 첫 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이미 옮겨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와서, 무덤으로 갔다.
4. 둘이 함께 뛰었는데,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서, 먼저 무덤에 이르렀다.
5. 그런데 그는 몸을 굽혀서 삼베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으나,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도 그를 뒤따라 왔다. 그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삼베가 놓여 있었고,
7. 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그 삼베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한 곳에 따로 개켜 있었다.
8. 그제서야 먼저 무덤에 다다른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9. 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10.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11. 그런데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울다가 몸을 굽혀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을 입은 천사 둘이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 머리맡에 있었고, 다른 한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여자여, 왜 우느냐?" 마리아가 대답하였다.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을 때에, 그 마리아는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가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
15.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여보세요,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 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가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부니!" 하고 불렀다. (그것은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이르기를,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18. 막달라 사람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보았다는 것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전하였다.
[4본문 전체에 감도는 느낌]
성서일과 4본문을 반복해서 읽고 묵상하는 동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시 118:1, 2)가 계속 눈에 들어왔습니다.
인자하고 자애로운 이 시대의 어른, 그런 지도자가 그리워서일까?
내가 그렇게 너그럽고 인자한 부모, 그런 목사가 되지 못해서일까?
아무튼 이번 부활절 4본문에서 저는 ‘인자하신 하나님’이 자꾸만 느껴집니다.
[시편 118:1-2, 14-24]
시편본문 1, 2절에서 반복해서 같은 문장이 나옵니다.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내가 지금 사는 게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아프고 가난한 형편이어도 주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지금 노래할 수 있고, 지금 내가 생존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바로 인자하신 주님이십니다.(14)
내가 빗나갈 때, 눈물의 회초리로 나를 때려서라도 바른 길, 생명 길로 돌이키게 하시는 주님.(18)
그 길 가느라 힘들어 부르짖을 때도 외면하지 않고 응답하시는 주님.(21)
세상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처럼 세상이 나를 버려도, 아니 내가 나 자신을 버려도, 나를 보배처럼 아끼시고, 머릿돌처럼 치켜세우시는 주님.(22)
이런 주님의 인자하심이 느껴지는 인생, 주님의 인자하심을 늘 느끼며 사는 인생은 복스러운 인생입니다.
그런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늘 찬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0:34-43]
사도행전 본문에서도 주님의 인자하심이 여러 곳에서 느껴집니다.
‘누구나 다 받아주시는 주님’(35),
말씀을, 평화를,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신 주님(36),
“마귀에게 억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시도록 예수와 늘 함께 하신 주님(38),
우리가 죽인 예수를 끝내 되살리신 주님(40),
원수를 끝까지 사랑하고 벗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십자가 사랑, 그 사랑덩어리 예수님을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로 정해주신 주님(42),
아! 인자하신 주님!
[골로새서 3:1-4]
서신서 본문에서도 주님의 인자하심을 찾아 느껴봅니다.
우리를 살려주신 주님(1),
우리 생명을 그리스도와 함께 꼭 품고 계시는 주님(3),
우리 생명을 예수그리스도와 굳게 묶어주시는 주님(4),
이렇게, 보잘 것 없게 느껴지던 나를 빛나는 존재로 만드시는, 나 스스로에게 무한 자부심을 갖게 하시는,
참 인자하신 주님!
[요한복음 20:1-18]
복음서 본문에서도 주님의 인자하심이 곳곳에서 느껴집니다.
우리 예수님을 다시 살려 주마 하신 약속을 끝내 지키신 주님(9),
예수님의 아버지이시면서 동시에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시는(17) 지극히 인자하신 주님!
어질 인(仁), 사랑할 자(慈), 인자(仁慈)!
부활의 신비, 부활의 능력, 부활의 기쁜 소식은, 오늘도 우리 주 하나님의 인자(仁慈)하심을 온누리에 파도치게 합니다.
[나머지]
* 사도행전 10:43절에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는 구절을 묵상하다가 다시 한 번 죄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죄’란 하나님의 중심에서 빗나가는 것, 즉 사랑의 결핍이 아닐까?
그러니 ‘죄 사함’이란 잃어버린 사랑, 말라버린 사랑, 변질된 사랑이 참 사랑으로 회복되는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죄 사함 받은 증거’라는 말입니다.
사랑덩어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사함 받았으니, 그 이름 예수! 그 사랑을 믿으니, 그 사랑만 의지한다니 말입니다.
** 요한복음 20:16절, “마리아야”하고 부르시는 예수님 음성을 묵상합니다.
제자를 향한 인간적인 사랑과 더불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물씬 묻어납니다.
그 인자하신 주님 목소리에 마리아의 귀가 번쩍 열리고 눈이 열리고 마침내 그 심령 가운데 진리의 눈이 열립니다.
*** 요한복음 20:17절을 읽으면서 골로새서 3:1-2절과 함께 묵상해 보았습니다.
**** 2014년 부활절은 4월 20일, 마침 4.19혁명 기념일 바로 다음날입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부정한 독재정권에 과감히 맞서서 피 끓는 청춘들이 목숨을 걸고 싸운 날입니다.
이 땅의 수많은 약자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할 민주주의를 위해 수많은 젊은 생명들이 죽은 날입니다.
다시 부활절을 맞이하며, 이 땅에 더 이상 약자들의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대한민국에 다시 정의가 꽃피고 평화 열매 풍성한 참 민주(民主)세상이 부활할 수 있도록, 죽음권세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이 이 나라를 뒤덮으시길 빕니다.
***** 2014년 부활절은 4월 20일, 마침 절기상 곡우(穀雨, 4/20)날입니다.
곡우란 곡식을 위해, 즉 우리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단비를 가리킵니다.
이 얼마나 귀하고 고마우신 하늘사랑인가!
****** 매일 밤 기도회 때마다 다음 주일 성서일과 본문을 읽고 질문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한 주간 7번 반복하는 동안 아이들의 질문이 점점 발전하는 게 느껴집니다. 오늘 토요일쯤 되니 봇물 터지듯 질문이 매우 많아지고 무르익어갑니다. 천사 둘이 발치와 머리맡에 앉아 있는 까닭부터, 왜 천사들이 “여자여 왜 우느냐?”는 질문밖에 안했느냐는 질문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왜 두 제자 중에서 늦게 도착한 베드로가 먼저 무덤에 들어갔느냐는 질문도 있었습니다. 정돈 되지 않은 불충분하고 검증 안 된 거지만 대충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냥 상상의 나래를 펴본다면... 빈 무덤이 딱 지성소를 연상시킨다... 지성소의 언약궤와 그 위 속죄소, 그리고 위에 있는 두 그룹의 모습이 연상된다. 천사는 보통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역할과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데, 빈 무덤의 천사들은 후자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 바로 성부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드러내는! 베드로는 천국의 열쇠를 맡은(마태 16:19) 교회를 대표하는 상징인데, 유대교의 대제사장과 비교해 볼 때, 베드로가 돌무덤에 들어가듯이, 대제사장이 대 속죄일 날 지성소에 유일하게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순간 지성소 휘장이 갈라진 것처럼, 지금 무덤의 돌문이 열려 있고, 따라서 그 다른 제자도 베드로의 뒤를 이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이런 해석은, 큰 의미나 가치는 없고 자칫 억지로 꿰어 맞추려다 본질을 흐리게 할 수도 있지만, (그래서 다른 종류의 해석도 몇 개 더해주었습니다.) 아빠의 단순한 상상이지만, 아이들에게 자투리 성경 지식과 성경에 대한 흥미를 더해줄 수 있었습니다. 막내 소현이가 예리한 질문을 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애타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금세 “마리아야 나다, 나야!” 하고 드러내지 않으시고,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하고 뜸을 들이셨을까? 순간 세월호 희생자들 가족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분들과 비교하며 대략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십자가 밑을 지켰던 제자다.(요한 19:25) 그래서 누구보다 마음의 상처가 컸을 것이다. ‘그토록 사모하고 기대했던 우리 메시아 예수님이 이렇게 무기력하고 처참하게 돌아가시다니!’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차근차근 하나씩 계단을 오르듯 스스로의 입으로 정리하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마리아의 입으로, “여보세요,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 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 가겠습니다.”라고 말하게 하신 것이다. 어쩌면 이 다음에 몇 마디를 더 하게 인도하셨을지도 모른다. 비록 생전의 예수님 말씀 귀담아 듣지 않고, 부활 예수가 아니라 죽은 예수님 시체를 찾는 중이었을지라도, 주님 죽으심으로 인한 상처와 사랑해서 더 아픈 사랑의 고통을 정리해 주시는 것이 아니었을까?
마리아로 하여금 제 입으로 그 큰 상처, 즉 예수님 죽음의 근원부터 차근차근 더듬어 부활 예수님을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정리하게 하시는 모습으로 보인다. ******* 지금 대한민국은 세월호 사고로 침울합니다. 고난주간... 부활절을 코앞에 두고 너무나 많은 생명들이 물에 잠겼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누구보다 생명력 넘치는 고등학생들이 말입니다. 그것도 무책임한 어른들 때문에 어린 생명들이 죽었으니 말입니다. 선장을 비롯한 배의 책임자들이 가장 먼저 탈출하면서 승객들에게는 선실에서 나오지 말라고 했답니다. 비상상황일수록 어린 학생들은 경험 많은 어른들 말에 순종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세월은, 세월은 물처럼 흐르는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 세월호는 물속에 뒤집어져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뒤집어진 것 같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선장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습니까? 지난 성금요일 새벽 4시 반경, 예배당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새벽닭울음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때 문득 베드로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빛이 떠올랐습니다. 베드로는 구원선 교회의 지도자를 상징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선장들은 어떠합니까? ‘여자와 어린이 먼저!’라는 '버큰 헤(이)드 호' 전통에 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1852년 영국 해군의 수송선 이름입니다. 얼마 뒤 영국의 수송선 엠파이어 윈드러쉬 호가 침몰할 때 이 전통이 빛났다고 합니다. 이어서 1912년 미국의 타이타닉 호 역시 그 전통을 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세월호에서는 그 전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세월호 선장에 대해 많이들 욕합니다. 모두 잔뜩 흥분해서 무기징역감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그 선장은 지금 대한민국 기성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적어도 대한민국 고교생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치지 않을까요? 오늘, 기쁘고 행복해야 할 부활절이 너무 어둡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도 길이 안 보입니다... 마치 요나를 삼킨 큰 물고기 뱃속처럼 앞이 캄캄합니다. 부디, 큰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나온 요나처럼... 세월호 뱃속에 갇힌 이들이 모두 살아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부디 그 가족들이 그렇게 되살아나고, 대한민국이 그렇게 되살아나고, 한국교회가 그렇게 되살아나서 니느웨를 향한 예언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를 빕니다. 토요일 밤기도회를 마치면서, 가족들에게 이번 주일(부활절) 말씀노래의 노랫말의 의미를 정리해주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묘사한 1,2,3절의 ‘용감한 사람, 끈질긴 사람, 다정한 사람’을 4절에서 ‘용감하고 끈질기고 다정한 사랑’이라 묘사한 까닭을 설명해주었습니다. 우리 모두 금세 뜨거워졌다가 금세 식어버리는 냄비처럼 되지 말자고 했습니다. 죽음의 공포와 대결하고 있는 세월호 뱃속 사람들, 그리고 그 가족들을 용감하고, 끈질기고, 다정하게 사랑하는 의리 있는 이웃이 되자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 부활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의 눈물을 닦아주셨듯이 저분들의 눈물도 닦아주시길 빕니다. 1. 막달라 마리아는 용감한 사람 / 이른새벽 무덤도 무섭지 않아 / 그런데 그런데 깜짝 놀랐죠 / 예수님의 빈무덤이 너무 놀라워 2. 막달라 마리아는 끈질긴 사람 / 제자들이 돌아가도 혼자 남았네 / 그런데 그런데 깜짝 놀랐죠 / 빈무덤의 천사들이 너무 놀라워 3. 막달라 마리아는 다정한 사람 / 예수님이 그리워 눈물 흐르네 / 그런데 그런데 깜짝 놀랐죠 / 부활하신 예수님이 너무 놀라워 4. 마리아야 부르시는 그분 목소리 / 눈물을 닦아주는 주님 목소리 / 용감하고 끈질기고 다정한 사랑 / 막달라 마리아의 예수님 사랑
[말씀동시] 위대하신 예수님 (김민서 지음. 명암교회 교회학교 3학년. 『성실문화』 78호)
위대하신 예수님
무덤에서 나오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어요
정말 정말 위대하신
예수님 예수님
어쩌면 나도...
예수님처럼 되지 않을까?
아니야 아니야
그렇게 할 수 있는 분은
바로 예수님뿐이지!
[말씀시조]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 78호)
막달라 마리아가 빈무덤서 울음우니
천사도 예수님도 여자여 왜 우느냐
내이름 불러주실 때 부활예수 만나다
[말씀한시] 비어 있는 관 (오세종 지음. 『성실문화』 78호)
女人至墓旣石移(여인지묘기석이) 여인이 무덤에 이르러 보니 이미 무덤의 돌문은 옮겨져 있었다
俯見壙中枲布在(부견광중시포재) 구부려 들여다보니 무덤 속에는 삼베가 놓여져 있었다
誰取主尸不在此(수취주시부재차) “주의 시신을 누가 가져갔는지 여기에는 없습니다.”
觀處空柩已復生(관처공구이부생) 비어 있는 관 그는 살아나셨다.
[말씀서예] (오세주 작품. 『성실문화』 78호)
[시편송서]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 78호)
(※아리랑 가락에 맞추어)
(뒷소리)[찬양대]
1. 여- -호 와께, 감- -사 하라, 그는 선- 하시, 며- -- --,
그- -- 의-, 인자 하심 이-, 영- 원함 이로, 다- -- --∼
(앞소리)[독창]
2. 이- -- 제-, 이스 라엘 은-, 말- 하- 기-, 를- -- --,
그의 인자 하심((이)), 영원 하- 다-, 할- -지 로-, 다- -- --∼
[회중]
14.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
15. 의인들의 장막에는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뒷소리)[찬양대]
16. 여- -호 와의, 오- -른 손이, 높- 이들 렸으, 며- -- --,
여- -호 와의, 오른 손- 이-, 권능((을)) 베푸 시((는))도, 다- -- --∼
(앞소리)[독창]
17. 내- -- 가-, 죽지 않- 고-, (죽지 않고) 살아, 서- -- --,
여호 와- 께서, 하- 시는 일을, 선- 포하 리로, 다- -- --∼
[회중]
18.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넘기지 아니하셨도다
19. 내게 의의 문들을 열지어다 내가 그리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뒷소리)[찬양대]
20. 이- -- 는-, 여- -호 와의, 문- -- 이-, 라- -- --,
의- -인 들이, 그- 리- 로-, 들어 가- 리로, 다- -- --∼
(앞소리)[독창]
21. 주께 서내 게-, 응답 하시 고-, 나의 구- 원이, 되- -셨 으니,
내- -- 가-, (내가) 주- 께-, 감사 하- 리이, 다- -- --∼
[회중]
22.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23.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앞소리)[독창, 또는 찬양대]
24. 이- 날- 은-, 여호 와께 서-, 정- 하신 것이, 라- -- --,
이날 에우 리가, 즐- 거워 하고, 기뻐 하- 리로, 다- -- --∼
(뒷소리)[다함께]
아- -리 랑-, 아- -리 랑-, 아- 라- 리-, 요- -- --,
아- -리 랑-, 고- 개- 로-, 넘- -어 간-, 다- -- --∼∥
※ 가락은 아리랑가락이고, 장단은 세마치로 읊는다.
(뒷소리는 세마치로, 앞소리는 중중모리로 해도 좋다.)
※ 쉼표(‘,’)까지 세마치 한 장단 3박 이다.(중중모리일 경우는 한 줄이 한 장단)
(즉, 세마치 4장단이 중중모리 1장단이다.)
※ 세마치장단이 익숙하지 않은 분들을 위하여 편의상 1박을 3분박 대신 2분박으로 구분했다.
(예; 악보 세 번째 마디에 종종 나오는 셋잇단음표 식으로 표기한 것이 3분박의 맛을 살린 것이다.)
※ 뒷소리는 찬양대 합창으로, 앞소리는 독창이나 이중창으로 하면 좋겠다.
[말씀노래] 막달라 마리아는 용감한 사람 (이정훈 작사, 최지혜 작곡. 『성실문화』 78호)
1. 막달라 마리아는 용감한 사람 / 이른새벽 무덤도 무섭지 않아 /
그런데 그런데 깜짝 놀랐죠 / 예수님의 빈무덤이 너무 놀라워
2. 막달라 마리아는 끈질긴 사람 / 제자들이 돌아가도 혼자 남았네 /
그런데 그런데 깜짝 놀랐죠 / 빈무덤의 천사들이 너무 놀라워
3. 막달라 마리아는 다정한 사람 / 예수님이 그리워 눈물 흐르네 /
그런데 그런데 깜짝 놀랐죠 / 부활하신 예수님이 너무 놀라워
4. 마리아야 부르시는 그분 목소리 / 눈물을 닦아주는 주님 목소리 /
용감하고 끈질기고 다정한 사랑 / 막달라 마리아의 예수님 사랑
[말씀동화 1 ; 사일구 할아버지의 부활절]
펄펄 눈이 옵니다. 하늘에서 눈이 옵니다
하늘나라 선녀님들이 하얀 가루 떡가루를
자꾸자꾸 뿌려줍니다. 자꾸자꾸 뿌려줍니다∼♬
(이태선 작사, 박재훈 작곡 '눈')
꽃피는 봄날 난데없는 눈타령이라니?
시절 없이 능청능청한 목소리로 누군가 눈 노래를 부르고 있네?
구성지게 부르는 게 보통 솜씨가 아닌걸?
‘눈’ 노래는 창수의 애창곡입니다.
그것도 2절만 골라 반복해서 부르죠.
특히 ‘하얀 가루 떡가루를∼’ 이 대목을 가장 힘차게 부른답니다.
철부지(不知)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사시사철 얼마나 자주 부르는지요!
두 달 전 소치 동계올림픽 때도 얼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창수 눈에는 온통 눈밖에 안 보입니다.
두 달 전 영동지역 눈사태를 보면서도, 아 글쎄 창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니까요?
‘저게 다 떡가루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한 건 아마 창수밖에 없을걸요?
그나저나 우리 창수는 왜 이렇게 눈을 좋아하는 걸까?
단순히 눈가루가 떡가루를 닮았기 때문일까?
맞아요. 단순히 떡가루를 닮았기 때문이래요.
세상에 이런 싱거움이?
언제나 창수의 구호는 ‘밥 위에 떡!’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밥보다 더 위에 있다니?
그게 바로 떡이거든요.
창수는 ‘배스킨라빈스 31’가지 아이스크림보다도 훨씬 더 많은 종류의 떡 이름을 줄줄 꿰고 있다죠?
“시루떡, 백설기, 꿀떡, 인절미, 찰떡, 부꾸미, 개떡, 가래떡, 콩떡, 무지개떡, 알떡, 수수떡, 절편, 두텁떡, 증편, 모시떡, 송편, 바람떡...”
아예 ‘독도는 우리 땅’ 가락에 맞춰 떡 노래를 부릅니다.
창수가 개사한 ‘세상의 모든 떡’입니다.
사실 창수네 집이 부자여서 ‘밥 위에 떡’타령을 하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동무들 보다 훨씬 가난하죠.
떡은커녕 방학 때는 점심밥을 굶기 일쑤랍니다.
창수는 영등포 쪽방동네에서 외할아버지와 단둘이 살아요.
할아버지는 연세도 많고, 몸도 불편해서 일을 하기 힘드시죠.
그래서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들처럼 폐지수집 다니는 일도 벅차세요.
청년시절 4.19혁명 때, 부정부패한 독재정권에 맞서 정의를 외치시다가 총상을 입으셨대요.
결국 다리를 절단하는 큰 수술을 받고 간신히 목숨을 건지셨고요.
그래서 늘 술만 드시면 4.19이야기로 밤새는 줄도 모르신답니다.
동네사람들이 ‘창수 할아버지’ 보다 ‘사일구 할아버지’라고 더 자주 부르게 된 까닭이죠.
아무튼 할아버지는 한 쪽 다리가 없으시기 때문에 눈 오는 걸 무척 싫어하세요.
눈만 오면 바깥출입은 아예 엄두도 못 내시거든요.
그래서 창수가 눈 타령을 할 때면, “저런 고얀 녀석!” 하고 야단을 치신답니다.
그래도 창수의 떡 타령만큼은 별로 나무라지 않으세요.
그러나 마음은 편치 않으시죠.
하나밖에 없는 손자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떡을 맘껏 먹여주지 못하는 할아버지 마음입니다.
오늘도 동네 목사님이 찾아오셨네요?
이것저것 먹을거리를 싸들고 종종 놀러 오시는 목사님이신데, 오늘은 맛있는 떡을 가져오셨어요.
“사일구 어르신, 이 떡 좀 드리려고 왔어요. 혼례식장에 갔다가 얻어온 건데 참 맛있네요.”
사일구 할아버지라고 부르면 좋아하시는 할아버지 마음을 목사님은 꿰뚫고 계시나 봐요.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으시면서도 군침만 꼴깍꼴깍 삼킬 뿐 그 떡을 잡숫지 않았어요.
철부지 손자, 떡 타령 떡보 창수 때문이죠.
저녁밥도 거르고 정신없이 나가놀다가 한밤중에 들어온 창수 눈이 휘둥그레지네요.
“아니 이게 웬 떡이람?”
손도 안 씻고 허겁지겁 떡을 먹기 시작합니다.
“아니 이건 그 전설의 모듬떡?”
넉살을 떨어가며 꾸역꾸역 떡을 먹는 창수를 할아버지께서 흐뭇하게 바라보십니다.
빙그레 웃으시는 할아버지를 얼핏 보더니 창수가 우물우물 말합니다.
“할아버지도 좀 잡숴보세요. 이거 되게 맛있어요.”
“너나 실컷 먹으렴, 난 아까 많이 먹었다.”
듣는 둥 마는 둥 대단한 집중력을 발휘하며 창수는 떡에 몰두합니다.
할아버지는 물끄러미 창수를 바라보시다가 문득 다리를 긁기 시작하네요?
아뿔싸! 오늘도 없는 다리를 긁으려다 깜짝 당황하시는군요.
“이런! 그렇군, 벌써 4.19로군. 이 무렵만 되면 없어진 다리가 가려워진단 말이지... 이젠 잊을 때도 되었는데 이게 무슨 조환지 원...”
54년이나 세월이 흘렀어도 할아버지는 4.19가 가까워질 때마다 다리가 근질거립니다.
없는 다리를 긁적이며 마음도 근질거립니다.
다리가 없어진 건 참을 수 있지만, 민주주의가 없어진 건 참을 수 없습니다.
근질거리던 마음은 어느덧 통증으로 욱신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술을 찾으셨죠.
술은 통증을 치료하는 약이지만, 인자하신 할아버지를 무서운 헐크로 변신시키는 독약입니다.
그런데 이제 할아버지는 술을 안 드셔요.
마음의 통증을 치료하는 다른 약을 구하셨기 때문이죠.
도대체 무슨 약이냐고요?
종종 찾아오시는 동네 목사님이랑 말벗이 되신 뒤부터였을 거예요.
허름한 쪽방에 낯선 목사가 찾아오는 게 좀 부담되긴 했죠.
그래도 자주 보니까 슬슬 정이 드네?
지난 성탄절 전야에는 교회 장로님, 집사님과 셋이서 찾아오셨죠.
동방박사 세 사람이라나 뭐라나?
멀리서 새벽송 팀이 핸드벨 반주에 맞추어 ‘고요한 밤’을 부르고 있었고요.
자칭 동방박사들은 교회를 대표해서 선물을 세 상자나 가져왔죠.
아기예수님 뵙는 심정으로 왔다는데, 도대체 뭐라는 소린지는 몰라도 선물은 마음에 들었어요.
상자 하나에는 창수가 좋아하는 떡도 들어있었거든요. 잔뜩!
그 성탄절 무렵부터 거의 매일 놀러오시던 목사님이 어느 날 할아버지께 진지하게 말씀하셨어요.
“사일구 어르신, 이제부터 술을 좀 줄여보시면 어떨까요?”
“목사님도 참, 내가 어떻게 술을 줄여요? 끊으면 끊었지 줄일 수는 없어요.”
“그럼, 이참에 아예 술을 끊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목사님, 술은 내게 약이라오. 내 마음의 병, 내 가슴속 통증을 치료하는 약이예요. 술 때문에 내 뱃속이 점점 망가지고, 더욱이 우리 창수가 술 취한 이 할애비를 무서워하는 걸 알면서도, 내 가슴이 너무 아파서 도저히 이놈을 끊을 수가 없네...!”
“어르신 마음의 통증은 무슨 병 때문인가요?”
“내 다리와 바꾼 민주주의 때문이지. 민주주의를 위해 내 다리까지 바쳤는데 지금 이 나라의 꼴을 좀 보시오, 민주주의가 죽어 나자빠져 있지 않소? 그러니 내 다리가 이렇게 아리고 내 마음이 터질 듯이 아플 수밖에! 내가 말이요, 할 수만 있다면, 저 썩어빠진 정치인들, 저 추한 엉터리 판검사들 꿈속에 밤마다 나타나서 ‘내 다리 내놔라’ 하고 싶은 마음이 아주 굴뚝같아요, 굴뚝!”
잠깐 동안 곰곰이 생각하던 목사님이 이윽고 입을 엽니다.
“사일구 어르신! 새해부터 저희 교회에 한번 나와 보세요. 제가 늘 소개해드렸던 예수님 만나러요. 혹시 압니까? 어르신 마음병이 싹 나을 수 있을지?”
“그렇게만 된다면, 내가 매일매일 교회에 갈 거요. 그런데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믿음은 없어도 정 때문에, 할아버지는 새해 첫 날 예배 때 창수랑 함께 처음 교회에 가셨어요.
극진히 환대하는 목사님과 교우들 덕분에 그 다음주일에도, 또 그 다음주일에도 교회에 가셨답니다.
그렇게 창수와 할아버지는 주일마다 교회에서 지내는 것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따뜻한 점심밥도 좋았지만, 시나브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게 차차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머릿속에만 들어있던 예수님 부활 소식이 조금씩 가슴으로 내려와 가슴이 점점 따뜻해집니다.
집에서도 매일매일 성경책을 펼치고 하나님과 만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말씀에는 빨간 색연필로 여러 번 줄을 쳐가며 읽고 또 읽습니다.
성경말씀으로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하자 점점 술이 필요 없게 되가네요?
마음의 통증이 차차 사라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맞아요. 할아버지의 마음을 고친 약은 바로 성경말씀이었어요.
성경책을 열 때마다 느끼는 인자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따뜻한 체온 때문이었죠.
이제 나인성 과부 아들처럼, 베다니의 나사로처럼 죽어 자빠져 있는 민주주의만 되살아나면 됩니다.
사랑덩어리 예수님의 부활소식은 읽고 읽고 또 읽을수록 가슴이 뜁니다.
부활의 신비가, 부활의 능력이, 부활의 기쁨이 할아버지 마음속에서 보글보글 발효되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할아버지는 이번 부활절에 창수와 함께 세례를 받기로 결심하셨죠.
부슬부슬 비가 옵니다.
식목일도 지나고 청명(淸明)을 지나 바짝 말랐던 산천에 반가운 봄비가 내립니다.
“아이고! 나 오늘 세례 받아야 하는데, 무슨 부활절에 비가 내리지? 예수님 돌무덤에 우산 갖다드려야 하지 않을까?”
철부지(不知) 창수가 투덜거립니다.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으시며 창수를 바라보십니다.
“창수야, 세례 받으니까 좋으냐?”
“네, 좋아요. 할아버지도 좋으시죠?”
“그래, 나도 좋다. 그동안 세례교육 받느라 우리 창수 애썼다.”
“할아버지도 수고 많으셨어요. 매일매일 성경말씀 읽으시느라 힘드셨죠? 제가 좀 더 일찍 돋보기안경 구해 드렸어야 했는데...”
“아니다, 나는 성경말씀 읽으면서 힘들기는커녕 힘이 났단다. 왠지 모를 새 힘이 마구마구 솟구치던걸? 성경말씀 안에는 한없이 인자하신 하나님 사랑이 가득하지 않니? 봐라, 이제 할애비가 술도 끊었잖아?”
“맞아요 할아버지! 저도 이제 세례 받고 나면 할아버지처럼, 더 열심히 성경말씀 읽을래요. 그나저나 오늘 세례 받아야 하는데 비가 와서 어쩌죠?”
“창수야 오늘이 바로 곡우(穀雨)아니냐? 곡우에 비 오는 건 아주 자연스럽고 또 좋은 일이란다.”
“곡우요? 곡우가 뭐죠?”
“허허, 이런 철모르는 녀석이 다 있나? 곡우도 몰라? 곡우란 곡식 곡(穀), 비 우(雨), 바로 논의 벼와 밭의 오곡백과들을 위해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단비란다. 24절기로 곡우 바로 전에 있는 청명이 있는데 그 무렵에 한식(寒食)도 겹쳐있단다. 한식은 찰 한(寒), 밥 식(食), 바로 찬밥 먹는 날이지. 한식날 왜 찬밥을 먹는지 아느냐? 바로 불을 피우면 안 되기 때문이란다. 우리나라는 그 무렵이 바람이 드세고 또한 가장 건조하고 산천이 바짝 말라 있어서 산불이 나기 십상일 때거든, 그래서 오곡백과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이 청명 직후 곡우 무렵에는 하늘에서 단비가 내려야 한단다. 예로부터 곡우에 비가 안 오면 논바닥이 석자나 갈라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지. 그러니 오늘 부활절 아침에 내리는 이 곡우 비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야! 마치 부활절 물세례 받듯이, 죽었던 대지가 곡우 비에 촉촉이 젖어 만생명이 다 살아나게 되니 말이다.”
“아, 네, 그렇군요.”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창수를 바라보시던 할아버지 눈이 순간 반짝이십니다.
“창수야, 너 떡 좋아하지 않느냐? 떡을 만드는데 곡우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 곡우에 비가 안 오면 일 년 열두 달 떡 구경하기 쉽지 않을 걸?”
창수의 눈이 쟁반처럼 휘둥그레집니다.
“그, 그게 정말인가요? 아니 이럴 수가! 그러면 안 되죠, 절대 안 되죠. 그러고 보니 오늘 비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네요? 은혜의 단비네요.”
“아무렴, 그렇고말고! 이 곡우 비를 맞고 오곡백과가 무럭무럭 잘 자라듯이 우리 창수도 무럭무럭 잘 자랄 것이다. 우리 인자하신 하나님 사랑으로 창수랑 이 할애비랑 오래오래 건강하게 잘 살아야 할텐데... 그리고 우리 예수님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나라 민주주의도 불끈불끈 되살아나야 할텐데...!”
할아버지 말씀을 듣고 있던 창수는 불현 듯 기억나는 게 있습니다.
바로 창수의 애창곡인 눈타령입니다.
노랫말을 살짝 바꾸어 비타령을 부르기 시작하네요?
“주룩주룩 비가옵니다. 하늘에서 단비옵니다.
하늘나라 선녀님들이 은혜의 비 곡우 비를
자꾸자꾸 내려줍니다, 자꾸자꾸 내려줍니다∼♬”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 78호 예배마당에서 옮김]
[말씀동화 2 ; 막달라 마리아 이모를 만났어요!]
큰 빛이 번쩍 하더니 동그란 알처럼 생긴 것이 나타났어요. 타임머신이 온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옮겨다닐 수 있는 기계라서 이름이 타임스페이스인데, 아주 먼 미래에서 날아왔대요. 그것도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 경기도 양평 봉성리 동그란 동산에 있는 동그란 성실교회로 온 거예요. 타임머신에는 아줌마 한 사람이 타고 있었어요. 옷차림새는 좀 달랐지만, 생김새도 우리처럼 동글동글하고, 말도 우리말 쓰고, 엉? 그러고 보니 대한민국 사람이잖아? 그것도 양평사람이래요. 대한민국 양평에서 타임머신을 발명한 과학자가 났다니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어쩌다 2013년 현대로 왔는지 물어볼 겨를도 없이, 우리 오총사 선구, 영원이, 영훈이, 진구, 소현이는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질문을 퍼부었어요. 타임머신 아줌마는 그 많은 질문에 대답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죠. 평소 먹고 싶은 것이 많은 것만큼이나 궁금한 게 참 많았던 아이들인데, 딱 걸린 거죠. 먼 미래의 우리 후손인 타임머신 아줌마는 교회생활 열심히 하는 분이었대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타임머신을, 그것도 타임스페이스를 만들게 되었고, 오랜 꿈이었던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시간과 장소를 입력했는데, 그만 실수로 장소는 안 옮겨지고 시간도 2013년으로 오게 된 것이었어요.
우리는 마침 2013년 부활절을 앞두고 ‘말씀연극’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부활주일 본문말씀인 요한복음 20장 1-18절을 읽고 또 읽고 거의 외울 정도로 읽으며 연극 대본을 만드는 중이었죠. 그런데 본문말씀을 많이 읽다보니까 생각도 많아지고 궁금한 것도 많아졌어요. 그러다 보니 연극 대본을 만드는 토론시간마다 서로 다른 생각들, 아주아주 다양한 상상력들 때문에 늘 옥신각신하느라 대본을 만들기가 어려웠던 참이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타임머신 아줌마에게 부탁을 했죠. 예수님 부활하신 그 때 그 자리로 가보자고! 타임머신 아줌마는 열심히 기계의 고장 난 부분을 고쳤어요. 드디어 봉성리 성실교회 다섯 꾸러기들과 타임머신 아줌마를 실은 타임스페이스는 2,000년을 더 거슬러 팔레스타인 예루살렘 부근, 예수님의 돌무덤까지 날아가게 되었어요. (두근!)
우리 타임머신, 아니 타임스페이스의 네비게이션 성능이 정말 대단했어요. ‘예수님 무덤돌’이라고 치니까, 한번 번쩍 하더니, 어느새 큼지막한 무덤 돌 앞에 도착한 거예요. 어라?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사람이 아무도 없네? 무덤 돌이 문 옆에 옮겨진 것을 보니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인 건 분명한데,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딜 간 것일까? 아마 정확한 시각을 맞추지 못했나 봐요. 타임머신 아줌마가 머리를 긁적이고 있네요.
우리는 먼저 누구를 만나면 좋을까 의논했어요. “그야 당연히 막달라 마리아지!” 소현이가 큰소리로 말했어요. “마리아는 여자라서 제일 친절할 것이고, 또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일 말도 많이 나눈 사람이니까!”라고 영원이가 말했어요. 평소 터프한 베드로를 좋아하던 진구가 조금 불만이었지만, 결국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기로 결정했어요. 그런데 어쩐다지? 우리는 이스라엘 말을 모르고, 막달라 마리아 아줌마는 우리말을 모를 텐데? 그러자 타임머신 아줌마가 빙그레 웃었어요. 이미 다 준비해왔던 거예요. 타임머신 아줌마도 원래 예수님 만나러 가기 위해,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쓰던 말인 아람어 통역기를 만들어 두었던 거예요. 정말 대단하죠?
우리는 다시 타임머신을 타고 ‘막달라 마리아’를 입력했어요. 그리고 또 한 번 번쩍하더니 우리는 어떤 아담한 집 앞에 도착했어요. 마침 그 집안에서 예쁜 아줌마 한사람이 나왔어요. 우리가 인사를 건네자, 그 아줌마는 깜짝 놀랐어요. 완전 낯선 옷차림에 낯선 생김새 때문에 크게 놀랐을 거예요. 공손히 머리 숙여 인사를 하니 아줌마는 금세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자신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라고 했어요. 마침 집 안에는 예수님 제자들이 한 명도 없었어요. 막달라 마리아 아줌마가 우리를 집 안으로 초대했고, 우리는 집 안으로 들어갔어요. 정갈하고 소박한 살림살이가 눈에 들어왔어요. 자리에 앉은 우리는 마리아 아줌마께 많이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했어요. 그러자 아줌마는 좀 놀라긴 했지만, 금세 괜찮아졌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얼마 전에 이보다 더 큰 놀라운 일을 겪었기 때문라네요. 바로 우리 예수님 부활사건이었어요. 그리고 아줌마라고 부르지 말라고 웃으며 말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이모라고 부르기로 결정했어요.
우리는 이모에게, 우리가 찾아온 이유를 말했어요. 그리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책을 펴서 요한복음 20장 본문말씀을 보여드렸어요. 한글을 읽을 줄 모르지만, 놀랍고 기쁜 표정이었어요. ‘내 이름이 성경에 나오다니!’ 아마 이런 흥분된 마음이셨겠죠? 드디어 우리는 한 줄 한 줄 짚어가며 질문을 하기 시작했어요.
1절; 무덤돌이 왜 움직인 거죠? 예수님이 무덤 밖으로 나오시기 위해서였나요? 그리고 어떻게 누가 옮겨줬는지 아세요?
이모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어요. 그 때 우리 중에서 가장 똑똑한 타임머신 아줌마가 끼어들었어요. “무덤돌이 움직인 건 예수님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막달라 마리아 이모랑 제자들을 위해서가 아닐까? 부활 예수님께는 이미 무덤돌이 장애가 되지 않으실테니까. 그리고 정확히는 모르지만, 마태복음 28:2절에는 무덤돌을 움직인 지진과 천사가 등장한단다.” 타임머신 아줌마는 우리보다 성경공부를 훨씬 많이 한 게 틀림없어요. 그러자 영훈이가 중얼거렸어요. “그럼 왜 요한복음에는 그 지진이랑 천사가 안 나온 거지?”
2절; 이모가 제자들께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했잖아요? 왜 그러셨어요? 예전에 예수님이 부활하신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는데, 도대체 왜 그러셨어요?
이모는 잠깐 동안 아무 말도 없었어요. 그러고 나서 이렇게 말했어요. “솔직히 난 예수님이 수난당하시고 부활하실 것이라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나지 않아요. 정확히 말하자면, 수난 당하실 것이라는 말씀은 기억나는데 부활하실 것이라는 말씀은 기억이 잘 안나요. 부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해본적도 없었던 것 같아요. 사실 아직도 우리 예수님 다시 살아나신 것이 실감이 안 나요. 어리벙벙해요.”
3, 4절; 왜 제자들은 나란히 뛰지 않았나요? 이모도 같이 뛰어갔나요? 만약 그랬다면, 셋이 나란히 서서 뛰면 힘도 안 들고 운동도 되고 좋았을텐데?
“정말이지 그 땐 우리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답니다. 그 때 누가 먼저 달려 나갔는지도 기억나지 않아요. 아무튼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 나갔어요. 내가 가장 뒤에 뛰었죠. 물론 운동을 하기위해 뛰어간 게 아니니까 옆으로 나란히 뛰진 않았고,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성격 급한 우리 베드로님이 먼저 뛰쳐나간 것 같은데, 그 뒤로 누가 먼저 무덤에 도착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7절; 우린 7절 말씀이 가장 궁금했어요. 다른 복음서말씀과 달리 무덤 속 광경을 아주 자세하게 묘사했어요. 우리 생각에 그 때 모두 멘붕 상태였을텐데, 아 여기서 멘붕이라는 말은, 넋이 나간 것 같은 거예요. 얼빠진 상태!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 입으셨던 세마포와 머릿수건의 상태와 위치까지 자세히 기억할 수 있었나요?
“글쎄요? 저는 사실 무덤 안에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서만 들여다보았을 뿐이고, 무덤 속이 밝지 않아서 자세히 볼 수도 없어서 잘 몰라요. 성경말씀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었다면, 아마 그 날 무덤 안에 들어갔던 두 제자들의 기억이었을 것 같네요.” 바로 그때 선구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어요. “이모, 여기 1절과 2절을 보면요, 이모가 무덤 돌이 옮겨져 있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예수님 시신을 누군가 가져갔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렇다면 이모가 무덤 안을 들여다보고 예수님 시신이 없어진 것을 확인하신 게 맞나요?” “그건 맞아요. 무덤 속이 어두웠어도 새벽이라 바깥도 밝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때마침 먼동이 터오는 때라 햇빛이 무덤 속에 조금씩 비추기 시작해서, 다른 건 몰라도 예수님 시신이 없어진 것은 틀림없이 확인했었어요.” 영원이가 질문했어요. “이모, 혹시 그 때 무덤 안에서 무슨 냄새 같은 건 안 났나요? 시체 썩는 냄새라든가, 아니면 동굴 속 퀘퀘한 냄새 같은 거? 혹은 아주 신비로운 향내 같은 건 못 느끼셨어요?” “글쎄요. 내가 좀 정신을 차리고 오래 있었다면 냄새를 느꼈을 텐데, 너무 긴박하고 정신없어서 잘 기억나지 않네요. 미안해요.”
8절; 8절에 보면 ‘사랑제자’가 무덤에는 먼저 도착했지만 안에 안 들어가고 있다가 베드로가 들어간 뒤에야 뒤늦게 따라 들어갔다고 했는데요. 왜 그랬나요? ‘사랑제자’는 겁쟁인가요? 그리고 따라쟁인가요?
“아 그건, 그는 매우 섬세한 사람이랍니다. 겁쟁이라기보다는 섬세하고 감성도 풍부하고 사랑도 많은 분이예요.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그만큼 사랑이 넓고 깊어진 것 같아요. 그래서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깊고 조심성도 많죠. 내 추측에는, 아마 무덤 속 상황을 바깥에서 먼저 자세히 살펴보고 조심조심 들어가려고 했던 게 아닐까 싶어요. 다른 곳도 아니고 예수님을 모셔둔 무덤이잖아요.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겠죠. 그런데 뒤늦게 달려온 베드로님이 거침없이 쑥 들어가버리니까, 뒤따라 들어간 것이겠죠?”
9, 10절; 그리고 그 두 분 제자들이 그냥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고 했는데요. 돌아갈 때는 뛰어가지는 않았겠죠? 그리고 무슨 대화를 하며 걸어갔다거나, 혹시 뭐 아시는 게 있나요?
“아뇨. 모르겠어요. 난 함께 돌아가지 않았거든요.” 타임머신 아줌마가 끼어들었어요. “9절에 보면, 아직도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예언말씀을 깨닫지 못했다고 하신 것으로 봐서, 그저 누가 예수님 시신을 훔쳐갔을까? 그런 이야기만 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문득 드는 생각인데,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두 제자의 모습이 딱, 누가복음에 나오는 엠마오 길의 두 제자들과 느낌이 같아요.”
11절; 근데 이모는 왜 제자들을 따라서 무덤 안에 들어가지 않았어요? 그리고 왜 계속 우셨어요? 너무 오래 우시는 것 같은데... 그리고 왜 또 무덤 속을 들여다보셨죠? 이미 이모도 확인했고, 두 제자들도 다 들어가서까지 확인했었는데 말예요.
“난, 난 도저히 그냥 돌아갈 수 없었어요. 남들은 다 포기해도 나는 정말이지 어떻게 해서라도, 아무 거라도 붙잡고 우리 예수님을 찾아야 했죠. 얼마나 불쌍하고 억울하신 분인데... 그 고통스럽고 억울한 죽음으로도 모자라 시신까지 빼앗길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눈물이 났어요. 잠시 그쳤다가도 예수님 생각만 하면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어요. 그날 내 눈은 마치 하염없이 물이 쏟아지던 노아의 홍수 때 같았답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 내 눈이 많은 눈물 때문에 아주 흉하게 퉁퉁 부었던 것 같아요.” 그 때 영훈이가 순발력있게 말했어요. “맞아요. 울고울고 너무 많이 울면 아예 앞이 안보이게 되요. 지난 주 수난주일 시편도 그랬어요. ‘주님,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나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울다 지쳐, 내 눈이 시력조차 잃었습니다. 내 몸과 마음도 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시 31:9)
“맞아요. 그래서 눈앞이 침침했죠. 그리고 무언가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문득 무덤 속에서 무언가 작은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무덤 속을 다시 들여다보았죠.” 그 때 옆에서 듣고 있던 타임머신 아줌마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어요. “마리아님 심정이 아프게 느껴져요. 얼마나 사랑했던 예수님인데,,, 그가 찔리신 상처, 찢기신 상처가 마리아님의 심장을 찌르고 있었던 것이 저도 조금은 느껴져요. 제가 그걸 어떻게 느낄 수 있냐하면... 언젠가 컴퓨터로 본 옛날 사진 한 장 때문이죠. 예수님의 도시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의 21세기 사진이었어요. 고향을 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 군인들의 총칼 앞에서 돌을 던지며 싸우다가 총에 맞아 숨진, 그리고 그 시신조차 빼앗겨 크게 우는 가족들의 사진이었죠. 그 사진 속에 내 나이 또래의 우는 여자를 보면서 저도 가슴이 아파 울먹였던 기억이 나네요. 좀 엉뚱한 얘기 같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랑하는 사람의 시신을 빼앗긴 사람들의 심정은 아마 어느 나라나 다 비슷할 거예요.”
12절; 흰옷 입은 천사 둘이 있었다는데,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죠? 아까 제자들이 무덤 안에 들어갔을 때는 분명히 못 보았던 것 같은데요?
“맞아요. 처음에는 무덤 안이 텅 비어 있었어요.” 그 때 진구가 말했어요. “천사는 날개가 달렸잖아요? 그리고 동굴이잖아요. 아마 박쥐처럼 동굴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어서 못 본 게 아니었을까요?” 우린 오랜만에 깔깔 웃었어요. 진구의 상상력이 참 재미있죠? “천사는 신비로운 존재니까, 그냥 신비롭게 스르륵 나타난 거겠지” 소현이의 의견이에요. 그 때 영훈이가 말했어요. “그래도 우리가 부활절 연극 꾸밀 때 천사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그게 중요한데,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하지 않을까? 좀 멋지게 나타나면 좋을 텐데?” 그 때 갑자기 선구가 소리쳤어요. “아! 갑자기 좀 멋진 생각이 나는데? 아빠가 예전에 사주신 구약 그림성경사전에 언약궤 뚜껑 위에 있는 그룹이라는 신비로운 천사가 있는데, 12절에 나오는 천사들하고 되게 비슷해요. 언약궤 양쪽 끝에 앉아 있는 모습도, 예수님 시신 있던 자리 머리끝과 발끝에 앉아 있는 것과 비슷하고요. 그런데, 이건 참... 지나친 상상인지 몰라도요, 예수님 누우셨던 무덤이 딱 지성소 같지 않아요? 예수님이 진리의 말씀 자체시잖아요. 그러니까 언약궤가 들어있던 지성소가 딱 예수님 무덤 맞네! 그리고 마태복음 27:51절에 보면 예수님 돌아가실 때 성소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둘로 갈라지잖아요. 그러니까 꽉 막힌 지성소 문이 열려버린 건데, 그게 딱 무덤 돌문이 열린 거랑 비슷한 거 아닌가?” 원래 선구는 오래전부터 상상력 하나는 알아주는 책벌레예요. 타임머신 아줌마가 입을 딱 벌리고 감탄하네요. 다른 아이들은 그냥 뭔 말인가...? 하고 쳐다보고만 있고요. 타임머신 아줌마가 덧붙여서 얘기하셨어요. “정말 대단한 상상력이네? 내 생각에도 돌무덤이 딱 지성소 같아. 그러고 보니까 천사 둘이 나타난 것은... 원래 천사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데, 이 경우는 후자 같아. 즉, 제자들과 동고동락하시던 예수님께서 완전 하나님이시라는! 성부 하나님의 아드님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지!”
13절; 이게 굉장히 궁금한데요... 이모는 그 두 천사가 진짜 천사인지 알고 대화를 나눈 거예요? 그냥 낯선 사람이 아니라 천사인 줄 알았다면 기절할 듯 놀라야 정상 아닌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궁금한 건, 천사들이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하고 묻는데, 둘이 함께 묻는 것처럼 보여요. 이중창 하듯 질문한 건가요? 왜 그렇게 질문을 하죠?
“아까 얘기했듯이, 그 때 난 제 정신이 아닌 넋 나간 사람 같았었고, 눈도 퉁퉁 부어서 눈앞에 뿌연 상태였답니다. 그러나 그 때 정신없는 내 느낌으로도, 그 두 분이 평범한 보통사람이 아닌 천사 같은 분들이라는 생각은 들었어요. 형체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랬어요. 그렇지만 예수님 시신이 없어진 마당에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어디 있겠어요? 그게 천사건 만사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무라도 붙들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뿐이었죠” 이어서 타임머신 아줌마가 설명했어요. “천사들이 이중창하듯 질문한 것은, 내 생각엔 자연스런 일인 것 같아. 요한사도가 쓴 묵시록 7:11-12절에 봐도 여러 천사들이 한목소리로 합창하듯 말하는 장면이 나온단다.”
14절; 그런데 왜 천사들과 대화하다 말고 뒤로 돌아섰나요? 나 같으면 천사의 입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을텐데? 마치 도끼 잃어버린 나무꾼이 산신령 만났을 때 처럼요. 혹시 천사가 뒤를 돌아보라고 알려줬나요? 그리고 드디어 오매불망 그리던 예수님을 만났는데 왜 못 알아보셨나요? 마치 변화산의 예수님처럼 얼굴이 완전 환하게 변모하셨기 때문인가요? 옷차림도 바뀌고?
“글쎄요? 난 내가 뒤 돌아섰는지 조차 잘 기억나지 않아요. 아마 마치 복잡한 길에서 어린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처럼 정신없이 앞뒤를 살피고 있었을 것 같아요. 물론 천사의 대답을 들으려고 귀는 쫑긋 세우고 있었죠. 그 때, 뒤돌아섰을 때 예수님을 만났어요. 그러나 예수님인줄 몰랐죠. 눈이 침침한 탓도 있지만, 평소와는 다른 느낌도 들었지만, 그보다는... 당연히 지금 예수님은 시신으로 어딘가에 누워계실 것이라는 생각뿐이었거든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답니다.”
15절; 예수님이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하고 물으셨는데요. 조금 전 천사들의 질문하고 비슷한데, 느낌도 비슷했나요? 좀 신비로운 느낌? 혹은, 왜 우느냐고 물으시는 뜻이, 왜 우는지 몰라서 질문하신 건가요? 아니면 울면 안 되는데 왜 우느냐는 말씀은 아니었나요? 그리고 왜 예수님을 동산지기인줄로 생각했나요? 무슨 근거가 있나요? 그리고 왜 동산지기가 예수님의 시신을 옮겼다고 추측했나요?
막내 소현이가 먼저 말했어요. “내 생각에는 그건 별로 중요한 질문이 아닌 것 같은데?” 영훈이가 대답했어요. “그래도 말씀연극을 만들려면 가능한 모든 걸 알아야해. 성경말씀 구석구석을!” 막달라 마리아 이모가 대답했어요. “예수님이 그렇게 물으신 뜻은 정확히 모르겠어요. 글쎄...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두 가지 뜻이 다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 것도, 내가 일찌감치 얘기한대로 지금 이렇게 멀쩡히 부활했는데 왜 죽은 시신을 찾고 있느냐고 하신 것 같기도 하고...”
16절; 예수님이 “마리아야!”하고 이름을 부르실 때 어떻게 금방 예수님인줄 알아차렸나요? 그리고 돌아서서 “라부니!”하고 불렀는데, 왜 돌아섰나요? 금방 또 뒤돌아섰던 건가요? 그리고 라부니는 무슨 뜻이죠?
“예수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실 때 돌아서 있었던 건, 우습게도 예수님이신 줄 몰랐기 때문이에요. 살아나신 예수님 못보고, 돌아가신 예수님만 찾고 있었던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분명히 예전의 예수님과는 무언가 다르세요. 우리가 아직 잘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부활이란, 죽었다가 예전의 모습으로 되살아나는 것과는 분명히 달라요.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도 그게 느껴져요. 예전과는 다른 부활예수! 그런데, 내 이름을 부르시던 그 음성은 다르지 않았어요. 일곱 마귀 들렸다고 모두들 천대하는 나를, 사랑으로 고쳐주시고 아무 차별 없이 사랑을 담아 불러주시던 내 이름! 아니 어쩌면 내가 천한만큼 더 사랑을 많이 담아서 불러주셨던 것 같아요.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마음 아시죠? 그리고 내가 라부니(랍오니)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예수님에 대한 내 마음이랍니다. 다른 제자들이 부르는 랍비라는 표현보다 더 크고 신령한 사랑을 담아 저는 예수님을 늘 그렇게 부른답니다.” 그 때 성경박사 타임머신 아줌마가 끼어들었어요. “오! 역시 그랬군요! 제가 기억하기로도 신약성경에서 모두들 ‘랍비’라고 부르는데, 요한복음 20:16절의 막달라 마리아님과 마가복음 10:51절의 맹인 바디매오만 라부니라고 부르죠. 바디매오의 경우 우리말 성경에는 그냥 선생님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희랍어 성경에는 ‘라부니’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이건 특별하고 간절한 뜻이 담긴 표현이라 여겼었는데 과연 그러했군요!”
17, 18절; 왜 예수님이 손을 대지 말라고 하셨죠? 하나님 아버지께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라고는 하셨는데... 마태복음 28:9절에는 여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을 붙잡은 기록이 있는데,,, 끝내 예수님께 손을 안 댔나요? 그렇지만 마음속으로는 손을 대고 싶었었나요? 왜죠? 그리고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했을 때 반응들은 어땠나요?
“나는 예수님을 덥석 안아드리고 싶었어요. 하지만 예수님 말씀 듣고 꾹 참았죠. 정말 안타까운 건, 내가 부활예수님 만난 얘기를 전했지만 제자들이 잘 안 믿는 거였어요. 어떤 이는 만져나 봤냐고도 물었죠. 환영이거나 유령인지도 모른다면서, 그러나 나는 분명히 확신해요. 만져봐야 믿는 것, 만져지면 믿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를! 정말 사랑한다면, 보지 않고도 믿는 거예요. 사랑하지 않는다면, 보고도, 만져보고도 믿지 못하는 법이죠. 또 살다보면 알게 되요, 만져지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속이는지를, 만져지는 것에 내 맘대로 추측을 담아 얼마나 스스로 잘 속아 넘어가는지를 알게 된답니다. 말이 좀 어렵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벌써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어요. 난생처음 타임머신도 타보고, 난생처음 꿈에 그리던 예수님 부활 현장에도 와보고, 막달라 마리아 이모도 만나게 되니, 정말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말처럼, 시간가는 줄 몰랐어요. 해가 저무니 문득 집에서 기다리실 부모님들 생각이 났어요. 가만 생각해보니 부모님께 타임머신 여행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인사도 못 드리고 나온 거예요. 어쩌지? 아무튼 어서 서둘러 돌아가야 해요. 막달라 마리아 이모랑 더 많이 얘기하고 싶었는데, 그리고 다른 제자들도 만나고 싶었는데,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도 꼭 뵙고 큰절하고 싶었는데, 다음을 기약해야겠어요. 자 이제 헤어질 시간! 우린 이모와 작별 인사를 나눴어요. 우리 모두를 한명씩 꼭 껴안아주시는 이모는 사랑이 많은 분인 게 틀림없어요. 사랑덩어리 우리 예수님의 사랑을 담뿍 받은 게 틀림없어요. 이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분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사랑이에요. 한없는 너그러움과 설렘이 담긴! 맞아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사랑 때문이에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이 크신 사랑을 우린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아무튼 오늘 이모랑 얘기한 걸 잘 다듬어서 이번 부활절에는 꼭 멋진 말씀연극을 만들고 말거예요. 하나님의 이 크신 사랑이 담뿍 담긴 예수님 부활의 비밀을 생생하게 그려볼 거예요.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 74호 예배마당에서 옮김.
지난 해 부활절에 올렸던 것을 조금 다듬어서 다시 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