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주일 | 생의 무게 (한정훈)
수난주일
이사야 50: 4-9a
4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9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시편 31: 9-16
9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10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 때문에 약하여지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11 내가 모든 대적들 때문에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12 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 죽은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깨진 그릇과 같으니이다
13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었으므로 사방이 두려움으로 감싸였나이다 그들이 나를 치려고 함께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14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15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16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빌립보서 2: 5-11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마태복음 27: 31-50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생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라는 노래가 있다.
쌀 한 톨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무게를 잰다.
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과 외로운 별빛도 그 안에 스몄네
농부의 새벽도 그 안에 숨었네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었네
세상의 노래가 그 안에 울리네
쌀 한 톨의 무게는 생명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평화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농부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세월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우주의 무게
노래는 쌀 한 톨의 무게는 세월의 무게이며, 우주의 무게라는 말로 맺는다. 손바닥에 올려놓은 것은 작고 가벼운 쌀 한 톨뿐이다. 하지만 그 무게는 세월의 무게이며, 우주의 무게라고 말한다. 쌀 한 톨이 울려내는 노래를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던가(로마서 10: 17).
귀가 열린 사람
하지만 귀가 열려 저 쌀 한 톨이 울려내는 노래를 들은 사람은 쌀 한 톨은 그저 쌀 한 톨일 뿐이라고, 그러니 가볍게 여기자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작은 것에 큰 것이 담겼고, 큰 것이 작은 것에 붙들려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 이 조리(條理)를 아는 사람은 귀가 열린 사람이다. 귀가 열린 사람이 말한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이사야 50: 5-6)
귀가 열린 사람은 저항과 조롱에 물러서지 않는다. 옳고 그름을 알기에 아닌 것을 맞다 할 수 없고, 맞는 것은 아니다 할 수 없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는 언제나 “예”만 있다고 말한다(고린도후서 1: 19). 그리스도 안에 “예”만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이든 긍정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진리에 성실했다는 말이다. 귀가 열린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귀가 열려 진리를 알았으므로 진리에 성실하지 않을 수 없다. 저가 귀를 열어 성실하게 된 것인지, 진리에 성실했기에 귀가 열린 것인지 따지는 것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묻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진리에 성실한 사람
진리에 성실한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버릴 수 없는 다시 말해 지켜야 할 게 있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강하다. 하지만 강한 사람도 아픔을 느낀다. 시인은 아픔을 노래한다.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시편 31: 9) 진리에 성실하여 강한 사람에게도 눈물이 있다. 아니, 어쩌면 눈물이 없는 사람은 진리에 성실할 수 없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가 사는 세상은 빛을 영접하지 않는 세상이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 9-11).
사람 속에는 근본적 외로움이 있다. 잊히는 것을 두려워하는 기억되고 싶은 마음, 저항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인정에 목마른 마음이 있다(12-13). 이런 마음이 거절되면 “깨진 그릇”이 된다(12). 어느 시인의 말마따나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오세영 <그릇>). 남을 찌르고 결국, 자기도 찌른다. 그러나 진리에 성실한 사람은 상처와 자기 연민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그가 저 자신보다 무거운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고, 저 자신보다 큰 주제에 생이 붙들려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내 희망을 본다.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 나를 건져주소서”(15)
희망의 죽음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말이 있다. 다른 무엇보다 사람이 희망이 되어야 한다. 기술과 제도, 체제와 사상 그 어떤 것도 사람을 제쳐놓고 희망이 될 수는 없다. 희망이 사람에게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을 돕고, 연대할 수 있다. 사람이 희망이라는 말을 듣고 신앙을 부정하는 말로 듣는 사람은, 귀가 닫힌 사람이다. 닫힌 귀를 여는 일, 그건 설명으로 될 일이 아니다. 귀가 열리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진리에 성실한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그리스도인은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사실을 알고, 또한 예수가 참사람이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다.
예수를 고발하고, 십자가에 단 사람들은 예수를 희망으로 보는 데도 실패했고, 예수를 참사람으로 보는 데도 실패했다. 귀가 닫혔으므로, 진리에 불성실하므로 예수를 희롱한다. 예수가 매달릴 장소를 당시 사람들은 “골고다”라 불렀다(마태복음 27: 33). 해골의 곳이라고 하는데, 쉽게 말해 해골산이라는 뜻이다. 예수라는 희망, 희망이 된 참사람 예수는 귀가 닫히고, 진리에 불성실한 이들에 의해 죽음으로 끌려간다. 희망은 타살됐다. 그러므로 희망의 죽음 곧, 절망은 핑계할 수 없는 저들의 몫이 된다.
울어야 할 때
예수를 죽음으로 끌고 간 이들의 관심은 꾸준히 “예수의 구원”이다.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었도다 (...)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40-42) 만약 그들이 저 자신의 구원에 관심을 두었더라면, 예수를 희망으로 보고 또 예수에게서 희망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희망의 구원에 집착하는 이는 희망을 볼 수 없다. 예수는 자신을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를 위해 울라”고 했다(누가복음 23: 28).
희망이 어디 있는지, 행복이 어디 있는지, 기쁨이 어디 있는지 묻기보다는 우리와 우리의 미래를 위해 울어야 한다. 우리에게 기대할 것이 없음을 알고 울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고통이 가득하고,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없는(로마서 7: 18), 없어도 너무 없는 밑천이 바닥난 광경을 보고 울어야 한다. 듣그러운 소식을 접하고 우리가 보이는 반응은 눈물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울지 않는다. “말세다” “세상이 어찌 되려고” 마치 자신과 자신의 미래와는 무관하다는 듯이 세상의 민낯을 조롱한다. 하지만 그 어둠이 우리이고, 바로 우리 미래이다.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은 십자가 위의 예수가 한 마지막 말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전한다.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뜻이다(46). 예수는 버림받은 것 같은 게 아니라 실제로 버림받았다. 엘리야도 구원하지 않았고, 예수 자신도 스스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예수를 조롱한 사람들의 말처럼 예수는 하나님을 신뢰했지만, 하나님은 끝내 침묵하셨다. 예수는 버림받았고, 소리치며 세상과 작별했다(50).
눈물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기쁨을 맡기겠는가? 쌀 한 톨에 담긴 세월과 수고의 노래를 듣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감사로 식사기도를 올리겠는가? 생의 무게가 곧, 상실의 무게이기도 하다는 사실, 잊힘과 저항의 무게 역시 생의 무게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진실의 뒷모습만 본 것이다. 때로 진실은 감당하기 힘든 무게이다. 쌀 한 톨이 우주의 무게라면, 생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예수가 겪은 이 무력감, 이 철저한 외면, 이 완벽한 절망의 무게를 기어 넘지 않은 사람의 희망은 초월의 신앙이 아니라 초라한 신앙이다.
느린 절망
물론 우리는 희망을 믿는다. 우리는 우리보다 더 큰 존재에 자신을 붙들어야 한다. 사람에게서 희망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희망의 가능성을 붙들고, 끝내 희망을 봐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쉽게 희망을 보고, 너무 빨리 부활로 넘어간다. 내일은 수난주일이고, 고난주간이 시작된다(청년회 예배는 토요일이므로). 해마다 맞는 고난주간 즉, 예수의 수난과 죽음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죽음의 무게를 재보지 않은 채 너무 빨리 또 너무 쉽게 부활로 가면, 생의 무게를 온전히 잴 수 없다. 절망의 무게를 재 본 사람만이 희망의 무게도 알 수 있으므로.
모든 절망이 희망일 수는 없다. 어떤 절망은 끝내 희망이 되지 못하고, 어떤 실패는 끝내 의미가 없다. 하지만 희망이 되지 못한 절망을 가진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절망을 알지 못하는 이가 희망을 말할 때 부끄러워해야 한다. 낮아지지 않고 들어 올리는 이름은 없다. 죽지 않고 사는 이가 없다. 우리는 예수에게서 이 진실을 본다. 절망을 온새미로 겪은 사람만이 참된 희망을 말할 수 있다. 절망의 무게를 달아 본 사람만이 희망일 수 있다. 재빨리 부활로 넘어가지 말고, 느린 절망을 살아야 한다.
슬퍼하자, 울자
억지로 진 십자가가 아예 없다고 말할 수 없지만, 기본적으로 십자가는 선택한 수난이다. 예수는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귀가 열린 예수는 진리에 성실했기에 피하지 않았고, 또 피할 수 없었다. 당장 우리에게 예수가 진 십자가와 같은 생의 무게를 짊어질 상황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자신이라는 절망을 짊어져야 한다. 깨진 그릇이 되어, 칼날이 되어 남을 찌르고 자신을 찌른 저 자신이라는 어둠과 마주해야 한다. 이 일을 미루다가 평생을 깨진 그릇으로 사는 사람도 적지 않다.
실패하고 외면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버림받고 잊히는 것을 두려워 말자. 실패보다 더 나쁜 것은 실패를 부정하는 일이다. 빛이 어둠과 싸워야 하듯이, 진실이 거짓과 싸워야 하듯이 우리는 자신의 어둠을 부정하려는 모든 시도와 싸워야 한다. 감추고 싶은 마음에 저항해야 한다. 자신의 허물을 사랑으로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람과 진실하게 대화하는 것도 도움이 되고, 세상을 통찰력 있게 바라보는 사람의 깊고 넓은 시선으로 자신과 세상을 들여다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나는 우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을 알지 못한다. 느린 절망을 사는 가장 정직한 방법은 슬퍼하는 일이다. 오세영 시인의 시를 하나 더 읽어본다. <눈물>이라는 시에 이런 문장이 있다. “묵은 때를 씻기 위하여 걸레에/ 물기가 필요하듯/ 정신을 말갛게 닦기 위해선/ 눈물이 있어야 하는 법,/ 마른 걸레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교회는 호곡장이 되어야 한다. 예수는 희망의 약속이기도 하지만, 좋은 울음터이기도 하다. 절망을 아는 사람 품에서 마음 놓고 슬퍼하는 것으로 없던 희망이 새로 생겨나기도 한다. 느린 고난주간 보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