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실문화 응용하기/설교준비 일지

사순절 제2주 | 나는 믿음으로 산다 (한정훈)

사순절 제2주


창세기 12: 1 - 4a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시편 121: 1 – 8

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로마서 4: 1 – 5, 13 - 17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요한복음 3: 1 – 17

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나는 믿음으로 산다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교회 안에서 자주 하는 말이다. 자주 쓰는 말은 늘 상투어구가 될 운명과 싸워야 한다. 자꾸 말의 본뜻을 물어, 허위의식이 되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믿음으로 산다는 말이 상투어구일 때 믿음은 오늘을 착취한다. 맹목적이고, 믿음의 이유를 더 묻지 않아도 된다는 합리화에 이바지한다. 하지만 믿음으로 산다는 말이 제 모습을 찾으면, 가렸던 눈이 뜨이고, 현실에 짓눌린 마음에 숨통이 트인다.


떠나다

성경이 말하는 순종은 눈먼 순종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도 현실감각의 반대말이 아니다. 신앙은 오히려 눈이 뜨이는 과정이다. 눈 어두운 사람이 눈이 밝은 사람이 되는 것이 거듭남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눈이 뜨여 제대로 보는 삶을 말한다. 눈이 어두운 사람은, 상투적 삶에 붙들려 떠나지 못하며, 환희 열린 미래를 보지 못한다. 보이는 것 이상을 상상하지 못하고, 보이는 것에 길드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추구하는 바가 아니다.


사순절 제2주 말씀은 고향 집을 떠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고향 집을 떠난 아브라함의 행동을 히브리서는 이렇게 해석한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브리서 11: 8). 내일은 주소가 없다. 누구도 본 적도, 가 본 적도 없다. 다만 내일은 두드리는 사람에게, 자신을 열어 보인다. 상투적인 오늘을 뒤로하고 떠날 때, 가려진 내일을 보는 눈이 뜨인다.


들다

시인은 “눈을 들라”고 말한다(시편 121: 1). 눈을 들라는 말을 지금의 현실에서 벗어나라는 말로 읽어도 무방하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데리고 나오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종살이에서 해방된 것이며, 또한 척박한 광야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이 백성을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이끄시는 것이다. 하지만 1세대는 들어가지 못하고, 2세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1세대는 현실에서 눈을 들지 못했다. 광야에 없는 것에 눈이 갇혀 결국, 거기서 눈을 들지 못했다.


길을 떠나는 것과 눈을 드는 것은 다른 표현이지만, 실은 같은 실천이다. 어느 비평가의 말마따나 “우울증 환자는 어디서나 패배를 본다” 눈을 들지 않고, 현실에 매인 눈을 해방할 수는 없다. 바라볼 곳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눈을 드는 것이 그 자체로 구원은 아닐지라도, 현실 너머에서 참된 현실을 꾸어야 할 때가 있다. 비록 몸이 갇혔을지라도 시선을 갇히지 말아야 한다.


살아야 할, 그래서 살 만한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믿음으로 사는 일의 가치가 성취로만 평가받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믿음으로 사는 삶은 “꿈은 이루어진다”보다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다”라는 말에 가깝다. 길 떠남과 눈을 드는 실천의 의미가 성취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믿음으로 사는 까닭, 믿음의 삶이 지닌 의미는 오늘을 새롭게 하는 데 있다. 길 떠나는 사람에게 여기는 집착의 땅이 아니다. 눈을 드는 사람에게 오늘은 최고의 날이 아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오늘은 살아야 할 오늘, 그래서 살 만한 오늘이다.


오늘을 살아야 할 날로 바꾸고, 살 만한 날로 바꾸는 데 특별한 자격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꿈꿀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따로 있지 않고, 믿음으로 살 만한 사람이 따로 있지 않다. 꿈꾸는 것은 그 자체로 권리이고 자격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로마서 4: 2 – 3) 아브라함의 긍지는 믿음이다.


메토이소노(聖化)

사람의 눈을 피해 바리새인 지도자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는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요한복음 3: 2) 니고데모의 이 말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전체 대화의 행방이 결정된다. 니고데모는, 예수를 잘못 알았다. 그가 예수를 눈여겨보았기 때문에, 제대로 알 길이 막혔는지도 모른다. 니고데모는 예수가 한 일로만 예수를 알았다. 예수가 한 일은 예수가 누구인지 많이 설명하지만, 예수가 한 일이 곧, 예수는 아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조르바의 입을 통해 말했다. “두목, 음식을 먹고 그 음식으로 무엇을 하는지 대답해 보시오. 두목의 안에서 그 음식이 무엇으로 변하는지 대답해 보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일러 드리리다.” 조르바의 말은 실천이 곧, 그 사람이라는, 그런 의미의 말이 아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번역자 이윤기 선생은 “포도가 포도즙이 되는 것은 물리적인 변화다. 포도즙이 마침내 포도주가 되는 것은 화학적인 변화다. 포도주가 사랑이 되고, ‘성체’가 되는 것, 이것이 ‘메토이소노’”라 했다.


실천 이상의 실천

사람은 몸의 참여라는 화학작용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한다. 사람은 선택과 책임의 실천을 통해 종이 아니라 주인이 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실천 이상의 실천을 믿는 사람이다. 예수가 한 일이 곧, 예수는 아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하시는 일을 봐야, 참 예수를 알 수 있다.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놋뱀’ 이야기를 한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십자가 위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인자도 들려야 한다는 말은 궁극적으로 “부활”을 가리킨다.


부활은 예수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라는 포도가 포도즙이 되는 것밖에 보지 못했다. 포도즙이 포도주가 되고, 포도주가 마침내 사랑이 되고, 성체가 되는 것까지는 보지 못했다. 니고데모는 예수의 탁월함을 눈여겨봤지만, 예수가 생명 하나하나를 어떻게 거룩하게 변화시키시는지는 볼 수 없었다. 또한, 하나님이 예수의 몸을 무엇으로 바꾸는지도 보지 못했다.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했다(요한복음 3: 3). 


파악

우울증에 관해 이야기한 그 비평가의 다른 말을 빌려 쓴다. 비평가는 비평 작업 중에 작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비평가가 작가의 목적은 목포인데, 작품은 대전까지 갔다는 사실을 파악했을 때, “목포까지 가려 했으나 대전까지 밖에 못 갔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길을 떠나고 눈을 드는 것은 “목포까지 가려 했기에 대전까지 갔다”고 말하는 것과 가깝다.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오늘 여기에서 그 힘을 발휘함으로써 허위의식이 아님을 증명한다. 하지만 오늘 여기가 아닌, 내일 거기로 우리를 데려가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이 최초에 품은 이 의도를 파악하고, 그 의도에 생을 거는 사람이다. 내가 속한 교회는 성결교회다. 성결교는 사중복음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복음의 노른자위라 믿어 가르친다. 그중에 “성결”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교리이다. 어찌 보면,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이 세상에서 불가능한 목표다. 그러나 얼마나 성취했는지, 얼마나 성취할 수 있는지가 목적으로서 타당한지를 따지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목포까지 가려 할 때에야 대전까지라도 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원대한 꿈을 꾸라는 말을 하고 싶다. 사실 나는 이 말이 오랫동안 싫었다. 세상에서 알아주는 높은 자리에 오르라는 부추김과 다르게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작은 자리, 작은 사람에게 향하는 꿈이 원대한 꿈이라는 증거를 명확히 제시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놓인 사닥다리를 오르라는 말과 우리 존재가 다다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경지에 이르는 것을 추구하라는 말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거듭남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이 둘을 분명히 구분하는 것도 원대한 꿈의 하나가 될지 모르겠다. 나라는 작은 한 존재의 일생이 사랑이 되고, 성체가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사는 것만으로도 우리 삶이 거듭남을 향해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