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적 패스와
버저비터
예레미야23: 1 - 6
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목장의 양 떼를 멸하며 흩어지게 하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2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내 양 떼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 때문에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 내가 내 양 떼의 남은 것을 그 몰려 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4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잃어 버리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6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돌보지 않은 양들은 흩어지게 되어 있다. 흩어지면 어때, 생각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 양떼가 내 양떼가 아니라 하나님의 양떼라는 사실이다. 목자가 자신의 직업 정체성에 대해 고민할 수 있고, 혹 불만을 품을 수 있다 하더라도 우선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가 하나님의 양떼라는 생각을 놓치면 죄가 된다. 하나님의 양떼는 무엇이 특별한 양떼이기에 돌보지 않으면 죄가 되나. 먼저는 내 것이 아닌 걸 맡았으면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내 양떼를 돌보지 않아 흩어지게 하면, 미련하다 소리는 들을망정 재판 하자고 달려드는 사람은 없고, 혹 그런 사람이 있다면 수상한 사람이 틀림없다. 그러나 내게 맡겨진 양떼는 하나님 소유이다.
양떼는 비유이다. 우선 우리 모두가 양치기는 아니지 않나. 이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한 말이 아니고, 권세를 가진 사람들 들으라고 한 말이다. 로마서 13장 1절,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말과 함께 생각하면 권세를 가진 이가 마땅히 돌봐야 할 몫이 바로 양떼인 셈이고, 이 양떼는 하나님의 소유이고, 이 양떼를 돌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를 방해하는 죄이다. 하나님은 권세 잡은 자들이 자기 몫을 다하지 않아 양떼가 흩어지게 된 상황을 바로잡으시려 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고(요 3: 16), 예수님은 무리를 ‘목자 없는 양’으로 보아 불쌍히 여기셨다(마 6: 34, 9: 36).
누가복음 1: 68 - 79
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72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74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75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세상의 힘을 손에 쥔 사람이 세상을 돌봐야 할 자신의 책임을 감당하지 않고, 얼마나 착취하고, 억압했는지 역사는 증언한다. 억압과 착취는 무책임한 힘의 논리이다. 어떤 면에서 역사는 착취와 억압의 기억이기도 하다. 종교의 역할은 착취와 억압의 물줄기를 끊고, 구원으로 물길을 돌리는데 있다. 하지만 종교가 이 역할을 제대로 한 적이 얼마 없다. 어느 시대나 무책임한 그래서 무자비한 힘의 논리는 자신을 변호하는 종교의 엄호를 받았다. 억압과 착취의 기억 곳곳에는 제때 물을 얻지 못한 양떼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런 저런 선동에 휘둘린 기억이 죄책감처럼 남아 있다. 죄책감은 벗기 힘든 짐이다.
요한이란 이름은 사람들이 몸으로 한 질문을 받아 그의 아버지 사가랴가 글말로 풀어낸 이름이다(62-63). 놀랍게도 이름 짓기에는 어머니 엘리사벳의 뜻도 기적처럼 이심전심이었다(60).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했던가? 사람과 사람의 뜻이 한올져 세상에 나왔을 때, 비로소 굳었던 혀가 풀리고, 하늘의 말을 되찾았다(64). 성령 충만하여 될 일을 예언한다(67). 오늘 본문은 그 예언의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성실하게 구원의 약속을 이루시고, 아들 요한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요한은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했다. 흩어진 양떼를 모으는 길은 무책임한 힘의 논리가 종교의 합리화에 힘입어 억지로 부과한 죄책감을 없애는 일이다. 죄책감은 무거울 뿐만 아니라 눈도 멀게 해서 멀쩡히 있는 살 길을 보지 못하게 한다.
골로새서 1: 11 - 20
11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셨다는 말을 <메시지>는 이렇게 번역했다(15). ‘우리는 이 아들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봅니다. 우리는 이 아들을 보면서, 모든 피조물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원래 목적을 봅니다.’ 계속해서 ‘모든 것이 참으로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시작되고, 그분 안에서 자신의 목적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만물이 존재하기 전부터 계셨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만물을 유지하고 계십니다.’(16-17) 예수님이 만물보다 먼저 계셨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도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을 본다는 말은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통해서 몸의 죽음과 존재의 죽음이 다름을 본다(존재라는 몸은 보이지 않으나 실재하는 건축물과 같다. 따라서 존재 역시 ‘몸’이라 부를 수 있다.). 예수님의 몸은 피를 흘리고 죽었지만, 존재는 본래부터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고, 희생을 통해 평화를 이룩했다. 예수님의 존재는 몸의 지배에서 해방되었고, 이로써 몸에 의해 존재까지 지배받는 시선은 통제력을 잃었다. 농구 만화 <슬램덩크>에 보면, 개인기를 믿고 절대로 패스를 하지 않던 서태웅이 겹겹의 한계 상황에 부딪혀 패스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에서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던 내 또래의 슬램덩크 팬은 다음 페이지에서 (서태웅에게는 한계이면서 동시에 희생이었을) 패스의 의미가 어떻게 되살아나는지 괴성을 지르며 볼 수밖에 없었다. 서태웅의 단 한 번의 패스는 이제까지의 모든 기억을 리셋해 버렸다. 서태웅을 완벽하게 수비했던 라이벌은 이제 어떻게라도 돌파하는 서태웅만이 아니라 언제라도 패스할 수 있는 또 다른 서태웅을 함께 막아야만 했다. 패스 하나로 모든 것이 낯설어졌다.
누가복음 23: 33 - 43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무책임한 힘의 논리가 부과한 부당 요금을 대신 지불하시고, 죄책감이라는 노예 계약에서 양떼를 해방하셨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말은 예수를 못 박은 세력의 실체에 적확하게 적용됐다. 힘의 논리의 이상은 완벽한 무력 제압이다. 하나의 비유로서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또는 실제로 죽이는 것이 힘의 논리가 꿈꿔온 승리이다. 하지만 힘의 이상이라 여겼던 성취의 순간에 돌이킬 수 없는 패배의 운명이 시작되었다. 억압하고 착취할수록 부서지고 망가져야 할 인격은 예상과 전혀 다르게 완성되며 안정적이 됐다. 죽이면 모든 게 끝나야 하는데, 죽임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실패가 되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죽이지 말았어야 했다.
예수님과 함께 사내 두 명이 십자가에 달렸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끝내 마음의 짐을 덜지 못하고, 예수를 비방했다.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라.” 성경에 행악자라고도 하고 강도라고도 하는 이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강도나 강력 범죄를 저지른 죄인이 아닐 확률이 높다. 이들은 민족의 독립을 꿈꾼 무장단체의 일원이었다. 예수는 힘에 힘으로 붙는 방식으로는 모두를 구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교회 문화에서 이 강도는 강도나 성추행범 또는 연쇄살인마 정도로 생각하고, 끝까지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못하고, 죽음의 문턱에서까지 예수에게 대드는 인간쓰레기 정도로 생각하게 한다. 이 본문은 자주 죄책감을 자극하는데 쓰인다. 그러나 그의 문제는 다른 데에 있다. 이 문제의 핵심을 살피는 게 오늘의 목적은 아니기 때문에 넘어가기로 하고, 어쨌든 성경에 예수님이 그를 꾸짖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럴 경황도 없었겠지만, 말로 풀 수 있는 문제도 아닐 뿐더러 연민도 어느 정도 가지고 계셨을 거라 생각한다. 이쯤하고 넘어가자.
다른 쪽 십자가에 달려있던 사내가 그를 꾸짖는다. 자신들은 행위에 마땅한 대가를 치르지만, 예수님은 늘 옳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과 같은 처벌을 받게 된 것이 부당하다는 말을 한다. 꼭 해야 할 일을 찾았지만 성취하지도 못했고, 또 죄책감에 시달릴 어떤 일을 했을 이 사람은, 답이 아닌 것을 답으로 알고 좇았다는 허망함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후회했을 것이다. 후회는 죄책감으로 바뀌었을 것이고, 죽음에 순간에 십자가에서 겪는 육체의 고통 이상의 정신적 고통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그때 예수님에게 호소한다. “당신이 말한 그 나라, 그 나라가 임하는 때에, 저를 기억해 주세요.”
마지막 순간에 패스를 했다. 끝까지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저주 가운데 죽어가야 할 한 사람이, 완전한 절망의 순간, 한계의 벽 앞에서 옆에 있는 예수에게 이 짐을 패스했다. 예수님은 이 짐을 받아줬고, 이 게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의 호소와 예수님의 응답은 결정적 패스와 버저비터 같다. 어느 누구도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는 유대인의 왕, 무기력한 그리스도 예수에게 인생의 무게를 맡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도 반대편 사람처럼 철저히 부서지고, 독기만 품게 되리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자기 인생의 의미를 예수께 부탁했다. 경기가 다 끝나갈 무렵, 예수님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을 죄책감에서 해방시키고, 구원하셨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된다. 그의 패스도 돋보이고, 예수님의 승부를 결정짓는 마무리도 인상적이다. 그를 십자가까지 몰아붙이지 말아야 했다. 그는 패스 하는 법을 알았고, 무책임한 힘의 논리가 승리하리라 모두가 예상했던 이 게임은 그의 패스 한 번으로 낯설어졌다. 예수님은 승부를 결정짓는 버저비터를 넣었고, 우리는 함께 승리자가 되었다.
주님께서는 얽히고설켜 마감시간까지 씨름해도 풀 수 없던 우리의 인생도 모른 체 하지 않으시리라 믿는다. 결정적 패스에 버저비터, 극적인 조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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